(앞에서 계속됩니다.)
5. 성배에 관한 등장인물들의 견해
성배란 무엇을 지칭하는 것일까? 원탁의 기사들의 견해에 의하면 성배란 이 세상의 진리, 모든 아름다움 그리고 선 (善)을 지칭한다. 그것은 카이에에게는 행복의 순간을 체험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 주는 사물이다. (역주, 카이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배는 인간의 행복이며, 지상의 천국이네. 짤막한 행복의 순간은 성배가 있다는 것, 지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해. 성배를 찾는 일을 포기하면 우리는 한없이 불행해질 거야.” (53).) 사람들은 카이에의 견해에 의하면 보편적 법칙을 얻기 위해서는 폭력도 불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카이에는 성배가 발견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그대로 수용한다. 오릴루스는 성배를 “평화”로 간주한다. (42). 흔히 사람들은 -오릴루스의 발언에 의하면- 성배를 “거대한 보석”, “에티오피아인들의 태양의 테이블”로서, “거대한 원죄의 장소인 비너스 산” 내지 “성모 마리아” 혹은 “연인”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한다.
한마디로 기사들은 성배의 이념을 포기할래야 포기할 수 없다. 성배의 존재는 아르투스 왕국의 이념적 전제 조건이자, 그 자체 원탁의 목표를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라 성배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의 본질을 해결해 주는 무엇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성배를 실제로 발견할 가능성에 대해서는 다소 회의적인 태도를 취한다. 결국 아르투스 왕국은 성배의 실존 가능성을 의심하고, 실패를 솔직히 인정할 수 없는 기로에 처해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이에와 오릴루스는 성배를 포기하는 체념적 입장이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고 항변한다.
카이에, 오릴루스 그리고 란셀로와는 달리 아르투스와 파르찌발만이 성배를 어떤 가시적 (可視的)인 사물로 파악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아르투스의 추측에 의하면 성배를 찾는 일이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과업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국가는 어떤 물질적 성취를 포기하고, 성배를 찾는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아르투스는 자신의 임무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려고 한다. 파르치발 역시 성배의 실존을 의심하지만, 성배를 찾으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는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배는 이 세상에는 실존하지 않아. 그게 있다면, 우리는 그걸 우리의 마음속에서 찾아야 해” (42f.). 이로써 파르치발은 사회적 이상을 내면적 문제를 해결하며, 동시에 개개인의 행복을 사회적으로 확장시켜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는 더 이상 원탁의 권력을 인정하지는 않으나, 어떤 구원에 대한 확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려고 애쓴다. (역주: 소련 장교 출신이자 극작가 프리드리히 볼프의 아들인 마르쿠스 볼프는 1988년 자의에 의해 국가 안전 기획부의 직책을 팽개친다. 왜냐하면 “SED는 소련의 개혁 정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Siehe H. Mayer: Der Turm von Babel, a. a. O., S. 256f.) 그렇지만 파르치발의 노력은 허사로 돌아간다. 백성들은 기사들을 모두 한통속으로 치부하며, 비난하고, 그들에게 돌을 던진다.
“아무런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던 모드레는 예수테와 동침한 다음에 아르투스 왕국의 권력을 승계하지 않겠노라고 말한다. 한 가지 예로서 그는 원탁을 박물관으로 보내겠다고 말한다. 결말부에 아르투스가 “두려워, 모드레. 너는 많은 것을 파괴하게 될 거야”하고 말하자, 모드레는 “그래요”하고 답한다. 모드레의 대답은 다음과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차 성배를 찾으려는 노력은 깡그리 사라지게 것이며, 아르투스 왕국의 존재 역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으로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성배를 찾으려는 노력이 사라지고, 왕국이 몰락한다고 하더라도, 후세 사람들은 새로운 어떤 다른 삶 속에서 어떤 다른 가능성을 찾게 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6. 개인적 사적 행복의 대상으로서의 여성
성배를 찾는 작업은 하인의 극작품에서 기사들의 애정 관계와 묘하게 대비되고 있다. 원탁의 기사들에게 여성은 개인적 사적의 행복의 대상으로 간주된다. 그렇기에 여성은 성배와 동일한 특성으로 의인화된 인물로서 묘사되고 있다. 기사들은 오랫동안 성배를 찾는 데 혈안이 되어 있으므로, 여성들은 제각기 원탁의 기사들의 품을 떠나버린다. 모드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곳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렇게나 모두하고 정을 통하지. (...) 윤리를 강조하고 싶어서 하는 말이 아니야. 그저 불편하게 느낄 뿐이지. 더러운 짓거리거든.” (34).
모드레는 성배를 탐하지 않듯이, 여성들을 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나중에 예수테에 의해 수정된다. 이미 언급했듯이 아르투스는 성배를 가시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물건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와 유사하게 그에게 여성이란 소유의 대상이 아니다. 예컨대 기네르바가 은밀하게 란셀로와 관계를 맺었는데도, 남편인 아르투스는 이에 관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성배에 대한 오릴루스의 집착은 그로 하여금 잘못된 방향으로 향하도록 유도한다. 오릴루스의 맹목적 행동주의 및 폭음은 바로 이러한 잘못된 방향을 상징하고 있다. 가령 그는 아내 예수테가 없는 곳에서 아내를 찾을 뿐이다 (50).
기사들에 비하면 여성들은 성배를 집요하게 갈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주어진 사랑의 삶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르투스의 부인 기네르바는 해방된 여성의 전형이다. “뭐 나쁠 게 있어? 남정네들이 성배를 찾든 찾지 않던 간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있겠니? 성배를 찾더라도 그들은 실천하지 않을 테니까.” (55). 특히 기네르바는 오늘날 환경 파괴의 폐해를 지적하며, 시급한 조처를 취할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역주: 기네르바는 숲이 죽어가는 데 대해 아쉬워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40년 후에 사람들은 왜 우리가 경악에 가득 찬 채 고함을 지르지 않았는지 자문할 거야” (41).) 그미의 견해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에서 새로운 난문제가 돌출하고 있는데, 원탁의 기사들은 여전히 과거의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릴루스의 부인 예수테는 성배에 관한 논의를 망상 내지는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날”에 관한 문제로 이해한다. (54). 그미는 남편 몰래 모드레와 동침함으로써, 젊은 왕자로 하여금 삶에 대해 어떤 분명한 입장 및 계획을 지니도록 유도한다. 미래에 대한 모드레의 결단은 낡아빠진 원탁을 박물관으로 보내겠다는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예수테의 이러한 행동을 고려할 때, 제 1막에서 예수테가 우연히 성좌에 앉는 것은 다분히 상징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복잡하게 얽힌 이러한 애정 관계는 극작품에서 명시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독자 내지 관객은 지엽적으로 향수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선입견이다. 여성들은 성배의 의미와 동일한 (혹은 유사한) 특성을 지닌 대상이나 다름이 없다. 그밖에 성배는 극작품에서 사회적 이상에 대한 추상적 상징물로서, 여성은 대부분의 기사들에게 개인적 행복을 마련해주는 대상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역주: 키이비츠의 견해에 의하면 극작품에서 사랑은 구체화된 희망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한다. Chr. Kiewitz: Der stumme Schrei, Krise und Kritik der sozialistischen Intelligenz im Werk Chr. Heins, Tübingen 1995, S. 278.)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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