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3. 동서독 비평의 맹점
"원탁의 기사들"이 1989년 드레스덴에서 초연되었을 때, 사회주의 통일당의 일간지 「신독일」은 하인의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즉 "원탁의 기사들"은 “종말 극”이 아니라, “리얼리즘의 출발 극”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구동독의 현실과 관계되는 우화의 특성을 거론하지 않은 셈이다. 예컨대 「작센 일보 (Sächsisches Tagesblatt)」는 하인의 극작품에는 “아르투스 극은 현인 나탄의 지혜를 담고 있다”고 그저 추상적으로 논평했을 뿐이다. (역주: Siehe Heinz Klunker: Angst vorm Gral, in: Theater heute 7/ 1989, S. 24.). 그 이후 하인의 작품은 서구에서도 공연되었는데, 서독의 연극인들에게는 오로지 “썩어빠진, 사악한” 정치국 (Politbüro)에 대한 풍자 내지는 ‘모스크바의 횡설수설 (Moskauder- welsch)’로써 수용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구동독의 평가가 단지 리얼리즘의 일방적 원칙에 의해서 재단되었다면, 구서독의 평가 역시 다만 정치 풍자극의 차원으로 축소화된 채 이해되었을 뿐이다. 후자의 경우 수용 미학적 오류는 전혀 창조적으로 작용하지 못했다. 예컨대 아르투스 왕은 에리히 호네커를 연상시키며, 살인적이고 영리한 관료주의적 기사, 카이에는 스타지의 대표 내무부 장관 에리히 밀케를 상기시킨다고 한다. 게다가 아르투스 왕의 아들 모드레의 냉담한 태도는 무기력한 80년도 구동독의 정치 관료들의 어정쩡하고 비전 없는 정책 등과 너무도 흡사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등장인물 아르투스가 고르바초프로 해석될 정도로 단선적이다. (역주: Vgl. Bernd Fischer: Christoph Hein. Drama und Prosa im letzten Jahrzent der DDR, Heidelberg 1990, S. 145.) 하인이 작품이 오직 정치적 우화로 해석되면, 작품의 근본적 주제 및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 등은 간과되거나 은폐될지 모른다.
하인의 극작품에 대한 동서독의 해석이 작품 주제의 정곡을 찌르지 못한 것은 과연 어디서 기인하고 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해서 등장인물, 그들의 발언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실제 인물과 너무나 흡사한 데에서 비롯한다. 등하불명 (燈下不明)이라고, 인간은 가까운 사실을 정확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블로흐는 이를 실현의 아포리아로 설명한 바 있지 않은가? (역주, Ernst Bloch: Das Prinzip Hoffnung, Utopischer Bildrest in der Verwirklichung, Frankfurt a. M. 1985, S. 220f.) 하인의 극작품에 대한 독자 내지 관객은 독일 국민이 아니라, 동구의 시민 나아가서 세계 속의 인물일 수 있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원탁의 기사는 단지 통독 이전의 구동독의 현실 및 몇몇 지식인 내지 정치가에 대한 패러디로 국한될 수만은 없다.
4. 왕국과 원탁의 기사
총 3막으로 이루어진 "원탁의 기사들"은 아르투스 성 (城)을 장소로 하고 있다. 극작품에서는 시간에 관한 언급이 생략되어 있고, 커다란 사건이 전개되지는 않는다. 마치 경직된 예식과 같은 일견 ‘공허한 담화 Palaver’가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되며,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 아르투스 왕국의 과거 현실 및 미래에 대한 희망과 두려움 등이 암시되고 있을 뿐이다. 주제를 논의하기 전에, 하인의 극작품 및 등장인물들에 관해 약간 언급해 보도록 하자.
아르투스 왕은 클링조어와 같은 외부의 적과 오랫동안 투쟁하며, 왕국을 이끌어 왔다. 그러나 아직도 성배는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나이든 기사들은 오랜 투쟁으로 인하여 너무나 지쳐 있다. 아르투스는 성배의 발견에 대한 기대감을 더 이상 지니지 않으나, 여전히 기사들로 하여금 성배를 찾도록 조력한다. 그는 원탁의 다리가 망가져도 목수들에게 고쳐달라고 부탁하지 않는다. 목수들이 왕의 뜻대로 따르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아르투스는 변화된 현실을 인정하며, 아들 모드레에게 자신의 과업을 물려주려고 한다. 그러나 모드레는 기성세대의 꿈에 집착하지 않는다. 성배란 그의 견해에 의하면 기사들이 평생 추적하는 망상이며, 환영에 불과하다고 한다. (역주, Chr. Hein: Die Ritter der Tafelrunde, Neuwied 1991, S. 16; 이하 작품의 페이지는 본문에 직접 기입함.) 모드레는 나중에 오릴루스의 부인 예수테의 도움으로 헛된 삶을 보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장차 어떠한 일을 행할 지에 관해서는 미지수로 남아 있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여전히 성배를 발견하는 과업에 매진한다. 가령 기사 카이에는 철칙과 규율을 중시하는 “콘크리트 머리통”이다 (27). 특히 애정 행각, 젊은 세대의 무정부주의 및 예술 작품의 체제 파괴적인 경향 등은 카이에가 혐오하는 대상들이다. 그렇기에 카이에는 모드레를 죽여야 한다고 아르투스를 설득하려고 한다. 기사 오릴루스 역시 성배에 대한 갈망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는 아르투스 왕국을 부흥하기 위해서 격투 대회를 개최하지고 주장하기도 한다. 오릴루스의 맹목적 행동주의와 폭음 행위는 자신의 (잘못된) 입장이 관철되지 않은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다.
기사 가베인은 볼프람 폰 에젠바흐 Wolfram v. Esenbach의 작품 "파르치발"에서는 파르치발과 함께 세 명의 주인공 가운데 한사람으로 등장하지만 (역주, 파르치발 Parzival, 그의 부친 가무레트 Gahmuret 그리고 가반 Gawan이 볼프람 에센바흐의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이다.), 하인의 작품에서는 직접 무대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아르투스에게 편지를 보내, 메르베이유 성 (城)에서 백 명의 여자들과 함께 살겠노라고 전한다. 그러니까 가베인은 성배 찾기를 포기하고, (마르틴 루터처럼)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며” 농부처럼 살아가겠는 것이다.
기사 파르치발은 국민을 계몽하기 위하여 애인 쿠니바레와 함께 잡지를 간행한다. 다른 등장인물들과는 달리 그는 성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쓴다. 파르치발은 성배를 가시적인 사물로 인정하지 않으며, 성배를 찾는 방향을 새롭게 설정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로써 파르찌발은 동료들로부터 “클링조어보다도 더 사악한 적”으로 간주된다. (28). 기사 란셀로는 헛되이 성배를 찾으려고, 2년 간 세상의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다가, 피곤함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채 되돌아온다. 제 3막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하소연을 터뜨린다. “백성들은 원탁의 기사들을 바보, 백치 그리고 범죄인의 집단으로 여기고 있네.” (65).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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