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소설가 그리고 극작가로 활동한 폴커 브라운 (Volker Braun, 1939 - )은 어린 시대에 나치의 폭력을 겪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앞 세대 작가들과 비교할 때 나치즘에 대한 죄의식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나치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는 데 브라운의 세대는 직접적으로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폴커 브라운은 사회주의 재건 작업 속에서 미래의 어떤 가능성을 찾으려고 했다. 하이너 뮐러 그리고 크리스타 볼프와 마찬가지로 폴커 브라운은 사회주의 발전 작업과 개인의 자기 실현 사이의 가능성과 한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려고 애를 썼다.
브라운은 이른바 “작센 시학파”에 속한다. 여기에 속한 시인들 가운데에는 자라 키르쉬, 라이너 키르쉬, 볼프 비어만, 하인츠 체홉스키, 카를 미켈, 아돌프 엔들러 등이 있다. 이들은 60년대에 동독 문화 정책의 정체성에 항의하고, 마르크스주의의 비판적 잠재성에 더 큰 비중을 두려고 했다. 구동독은 개인에게 창의적 자유를 부여하고 있다고 했지만, 작가들은 이를 불충분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치적인 무엇은 인간적 태도 내지 자세로서, 오늘날 시의 실체와 같다. (...) 인간적 태도 내지 자세 없이는 어떤 정말로 ‘노동하는 주체성’은 존재할 수 없다.”
브라운의 시에 등장하는 시적 자아는 사회주의의 현대 산업 사회 내의 사회적 자아와 동일하다. 시인은 자아의 개념을 의식적으로 사회와 일치시킴으로써 독자에게 긴장감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과연 개인적 자아는 사회적 자아로서 기능하고, 아무런 저항감없이 사회주의 사회에 수용되고 있는가? 이러한 물음은 시집, (1) "나를 위한 도전" (1965), (2) "그들이 아니라, 우리" (1970), (3) "대칭적 세계에 대항하며" (1974), (4) "의연한 걸음의 연습" (1979), (5) "서서히 이빨 갈리는 아침" (1987)에 예술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1) "나를 위한 도전 (Provokation für mich)" (1965): 브라운의 초기시는 주제 상으로 그리고 소재 상으로 브레히트의 시집 가정 기도서에 실린 작품들과 매우 유사하다. 시적 이미지는 매우 현란한 반면, 간결한 어투, 도전적인 제스처 등이 눈에 띈다. 초기 시에서 브라운은 동독 내의 사회주의 재건의 제반 작업을 전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시인은 형식적으로는 마야코프스키 (Majakovskij)의 시적 파토스를 동원하여, 소외된 노동에 관한 경험을 다루고, 이를 과도기의 상태에서 나타나는 모순점과 결부시키고 있다. 「재즈」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다. “모두가 공동의 테마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 연주하고 있다.” 그밖에 아주 에로틱한 시편들이 아울러 실려 있다. 이러한 시편에서는 감각적 구체적 자연 체험이 사랑의 경험과 용해되어 있다.
(2) "그들이 아니라, 우리 (Wir und nicht sie)" (1970): 시집의 제목은 클롭슈토크에게서 따온 것이다. 클롭슈토크는 송시에서 프랑스 혁명에 관해 “그들이지, 우리가 아니다”라고 묘사하였다. 이로써 브라운은 두 개의 독일을 숙명론적으로 구분하여, 계급 역사의 연장선상에서 동독을 이해하는 데 반대하고 있다. 오히려 동독은 분할된 국가가 아니라, 하나의 동류의식을 찾아서, 통합적 사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게 브라운의 지론이다. 그렇지만 브라운이 지금까지 이룩해낸 성과에 대해 스스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대신에 기존의 것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무언가가 없다면/ 내가 무엇을 믿을 것인가? (...) 우리는 새로운/ 준비를 여러 대기실에서 그냥/ 기다려야 하는가?” (프로메테우스의 일부) 브라운은 1979년에 시집, 그들이 아니라 우리를 다시 간행하게 하였다. 재판된 시집에는 서정적 자아의 공동체 의식은 어느 정도 약화된다. 대신에 보다 진취적인 “나” 그리고 약간 낙후된 “우리” 사이의 차이점이 은밀히 드러나고 있다.
(3) "대칭적 세계에 대항하며 (Gegen die symetrische Welt)" (1974): 브라운은 이 시집에서 횔덜린의 편지 구절을 인용하며, 사회주의 산업 사회 내의 점점 증가하는 소외 현상에 의문을 제기한다. 어떤 인간적 공동체의 이상은 현실에서는 요원하게 비치고, 사회주의 일상의 경험 그리고 노동 세계의 강요된 삶만이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있다. 시의 구조는 초기에 비해 다소 복잡해지고, 자연 묘사는 공동체 내의 사적인 영역을 의미하고 있다. “인간은 단 한번 밖으로 활짝 핀다/ 양귀비 들판처럼 그리고 서로 움츠리거나/ 서로 펼쳐지는 유약한 사고들의 들판처럼.” (「결정적인 발견」 일부)
(4) "의연한 걸음의 연습 (Training des aufrechten Gangs)" (1979): 네 번째 시집에서 브라운의 어조는 더욱 결연하고도 개인적 태도를 취하고 있다. 시인은 파괴된 희망을 노래하고, 당과 작가 사이의 어떤 모순 상황 그리고 약자의 권한을 찾으려고 염탐하고 있다. 이로써 사용되는 것은 T. S. 엘리엇의 몽타주 기법 그리고 유추의 기술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자연을 향유하는 행위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 “어디서 그것을 받아들일까/ 이 여름에서 나는/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가? (...) 어떻게 구원받을까/ 들판에서 솟아오르는 이러한 부글거림 앞에서/ 이다지도 싫증나는 빛 앞에서?” 「자연은 나에게 얼마나 찬란한 빛을 가져다주는가?」 시인의 음색은 비판적이며, 비판적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이는 에른스트 블로흐의 인류의 의연한 걸음이 어째서 현실 상황 속에서 차단되고 방해당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시사해준다.
(5) "서서히 이빨 갈리는 아침 (Langsamer knirschender Morgen)" (1987)에 실린 시편들은 1978년에서 1984년 사이에 쓰인 것들이다. 여기서 시인은 자신의 희망 그리고 체험 등을 결산하고 있다. 브라운은 여러 고전 작품을 몽타주 방식으로 인용하는 것을 빠뜨리지 않는다. 가령 괴테, 클롭슈토크, 장 파울, 호메로스 그리고 횔덜린 등의 작품이 간간이 인용되고 있다. 브라운은 간결한 일상의 시어를 통하여 자신이 언젠가 고수했던 미래에 대한 기대감 등은 아직도 실현되지 않았음을 암시해준다. 게다가 삶의 기본적 토대가 파괴되고 전체적으로 위협 당하고 있다. 브라운은 이러한 상황이 실증주의 내지 정치적 투쟁의 결과로 대두된 것임을 분명히 규정하고 있다. 특히 마지막에 실린 164개의 베를린 경구들은 1. 구동독 내의 일상 묘사, 2. 관료주의적 상황에 대한 비판, 3. 여성에 대한 시인의 입장, 4. 동료 작품에 대한 입장 표명, 5. 자신의 습작 과정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폴커 브라운은 젊은 시절에는 젊은 세대의 대변자로서 모든 것을 조금도 참지 않고, 솔직하게 표명하였다. 그는 수미 일관적으로 체제의 경직성 그리고 사회의 정체성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해 왔다. 그의 시어 역시 모든 것을 폭파하는 화약이기를 시인은 원했다. 자신의 비판적이고 구성적인 시작품들도 “혁명의 개방적인 종말로 향해 달리”는 데에 고유한 의미가 있다고 한다. 브라운의 시는 70년대 초반까지 “대중들을 정치적으로 고무하는 정치적 적극성”을 고수해 왔다. 그의 시편들이 주제상으로 “나”와 “우리” 사이의 중개를 지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브라운은 언어의 인습적 특성을 파괴하고, 도전적이며 변증법적인 관찰 방법을 견지한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자신이 처한 상태를 성찰하도록 유도하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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