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7. 세 번째, 네 번째 유령의 상
세 번째 유령의 상은 제 6장의 마지막에서 요한의 꿈속에서 등장한다. 이태리 서커스 스칼레토에 참석한 요한은 하베당크의 무리와 유대인들이 자신의 행위를 심하게 비난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한다. 그날 밤 요한은 다음과 같은 꿈을 꾼다. 아버지 미햐엘이 시체로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실제로 보브롭스키의 증조부는 지닐로브로트라는 지역에서 1883년 1월 15일에 비명횡사했는데, 작가는 1853년 1월 15일로 변화시켜 작품 속에 다루고 있다. 또한 작품 속에서는 스트라스부르 근처의 차로스토라는 지역으로 달리 묘사되어 있다. 실제로 미햐엘은 10명의 자제를 둔 61세의 노인이었는데, 나무가 쓰러진 무덤 근처에서 완전히 불탄 옷차림으로 발견되었다. 사망 원인은 주위 흔적으로 미루어보아 벼락이 내려쳐 나무들이 꺾이고, 미햐엘이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제는 이미 지하에 묻혀 있는데, 불탄 옷차림으로 거리에서 발견된 이 남자에 대한 소문이 퍼졌다. 그는 유령의 희생자라는 것이었다. 사실 어느 누구도 1853년 1월 15일에 번개 치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날 밤은 아주 조용했고, 그믐달만 희미하게 떠 있었다고 사람들은 말했다.” (고딕체 - 필자; 3. 94).
미하엘의 비명횡사는 그 자체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내레이터인 ‘나’의 설명에 의해 요한이 꾼 꿈의 의미를 추정할 수 있다. “내 할아버지는 왜 유령이 그를 덮쳤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결국에 ‘나와는 무관해’하고 말했을지 모른다.” (3. 94). “그는 누운 채 눈을 부릅뜬다. 나와는 무관해. 유령이 아니야. 자신의 가슴을 더듬는다. 옷이 아니라, 셔츠 차림이었다.” 프로이트를 예로 들지 않더라도 “꿈이란 무의식 속에서 굴절되어 나타난 전날 느낀 체험”인 경우가 많다. 요한은 하베당크의 집시 무리들과 유대인들의 적개심에 대해서 커다란 피해 의식을 느꼈고, 이러한 느낌이 자신의 아버지의 상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렇기에 세 번째 유령의 상은 바로 (주위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요한 자신이며, 가해자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일종의 불안 내지는 피해 의식에서 비롯한 것이다.
네 번째 유령의 상은 11장의 첫 부분에 묘사되어 있다. 야스트르쳄브는 보브롭스키 가문의 선조로서, 문장 (紋章)에 보라매의 상으로 나타나는 폴란드 남자이다. 약 1000년경에 그는 볼라슬라브 쵸베리의 휘하에서 이교도를 정벌하던 장군이다. 기독교를 신봉하던 야스트르쳄브는 특히 말발굽을 발명하여, 험준하기 이를 데 없는 리사 고라의 산에 주둔하던 이교도를 정벌한 바 있다. 그러나 소설 속에는 시간과 장소가 약간 변화되어 나타난다.
소설 속에서 그는 마치 보라매처럼 날아와 암탉 한 마리를 유혹하려고 한다. 이 암탉은 다름이 아니라 자신의 적이었던 스트르체고니아의 딸 오프카였다. 옛날 전쟁터에서 야스트르쳄브는 스트르체고니아에 의해 심하게 상처를 입는다. 이때 누군가가 그를 도와 자기의 성으로 데리고 간다. 야스트르쩸브는 회복 후 1295년에 프르쩨미슬라브 왕의 취임식에 참석한 바 있다 (3. 158). 그는 오프카와 나흘 동안에 격렬한 사랑을 나눈다. 이교도의 신 예샤, 포미안이 등장하여 집의 유령 쇼바니에크와 대화를 나누는 것도 바로 이때였다. 4일이 지나자 스트르체고니아는 집으로 들이닥친다. 야스트르쳄브는 옛날에 공격적이고 힘센 기독교 장수였다면, 이제는 증오와 복수의 화신으로 변해 있다. “야스트르쳄브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그 남자는, 어쩌면 츠빌루트인데, 늙은 스트르체고니아와 마주친다. 장검을 들고.” (3. 158) 그는 늙은 스트르체고니아를 단도로 찔러 죽인다.
요한의 이러한 꿈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 집시 하베당크가 방화범으로 체포되지 않고 풀려 나오게 되자, 요한은 이에 대한 분을 참지 못한다. 그 날 농부 필히의 작은 집으로 가서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는데, 이때 요한의 떠오른 게 야스트르쳄브의 상이었다. 이로써 그의 이교도 및 집시들에 대한 노여움 및 보복 행위는 네 번째 유령의 상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야스트레쳄브가 아무런 말을 던지지 않고, 미제리코르디아라는 단도로 천적을 찔러 죽이는 꿈은 분명히 유대인과 집시들에 대한 요한의 분노를 대리 만족시켜 주고 있다. 다시 말해 네 번째 유령의 상은 요한의 마음속에서의 묘한 보상 심리로 인하여, 피해 의식이 잔악한 살인의 상으로 변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8. 다섯 번째 유령의 상
지금까지 나타난 유령들은 과거 시대의 사람들인 반면, 다섯 번째의 유령의 상은 끔찍한 미래에 대한 환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금까지의 유령의 상들은 주인공 요한이 전날 겪었던 사건에 대한 상징적 성찰로서, 그리고 ‘나’의 비판적 입장으로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다섯 번째 상은 이와는 다르다. 요한은 브리젠으로 이사하기 전날 꿈을 꾸게 되는데, 이 꿈속에는 작중 현실과 관계되는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불과 한 페이지 밖에 안 되는 다섯 번째 유령의 상은 네 개의 환영으로 이루어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 번째 환영 속에 어느 비밀스러운 공간이 비치고 있다. “검은 대들보, 거친, 벽에는 쇠갈고리, 여기서 송진 기름불이 어두운 방에 비스듬히 빛을 보내고 있다. 둔탁한 공기. 거기서 얼굴 없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서성거린다. (...) 그가 누구의 발을 밟으면 그자는 사라져버린다.” (3. 207) 이곳은 어디인가? 얼굴 없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검은 대들보는 분명히 화염이 자주 일어나는 곳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림자가 아무런 말없이 모여 살고 있는 곳 - 그곳은 저 세상의 지옥이거나 끔찍한 감옥, 이를테면 아우슈비츠의 강제 수용소를 상징할 수도 있다.
두 번째 환영에서는 (어쩌면 두 번째가 아니라, 첫 번째 환영의 연속인지 모른다) 야스트르쳄브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 역시 어느 비밀스러운 공간에 갇혀 있다. “그는 송골매에 관해 몇 마디 던진다. 은빛 말발굽을 집어 들고, 가슴에 십자가를 묶는다.” 십자가란 자신이 속하는 가문의 문장 (紋章)인데, 야스트르쳄브는 이를 저버리지 않고 간직한다. 이로써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즉 스트르체고니아를 살해한 뒤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행위가 정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비록 그의 얼굴에는 “하얀 가죽이 늘어지게 붙어 있”는데도 적을 무찌르려는 전투 욕에 광분하고 있다.
요한의 의식 속에는 또 다른 (세 번째) 환영이 떠오른다. 바깥에서는 수백 명의 목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린다. 문밖에서 서서히 횃불이 비치고 있다. 누군가 연설하고 있으며, 요한이 손을 치켜들면서 화답한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의 사항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로마의 황제, 제국주의적인 왕 혹은 히틀러가 전쟁의 필연성을 역설하고 있다는 사항 말이다.
네 번째 환영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회색의 무리, 기사들과 전차들. 모든 게 그의 옆을 지나친다./ 성문 옆에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모여 있다. 왕궁은 그대로 있고, 거리는 난생 처음 보는 것들이다. 이제 숲이 눈앞에 스친다. 검은 숲 위에 첫 번째 빛이 비친다. 아직 별들이 스러지지 않은 채 얼음 속에서 떨고 있다.” (고딕체 - 필자, 3. 207)
전쟁의 역사, 로마 궁전. 그래도 왕궁은 아무런 피해를 입지 않았고, 죽은 사람들은 수많은 가장들이다. 그렇기에 여자들과 아이들만이 성문에 남아 통곡한다. 모든 도시와 거리는 황폐화되고, 별들만이 얼음 속에서 빙하기의 냉혹함만을 보여줄 뿐이다. 고딕체의 문장에서도 알 수 있듯이, 네 번째 환영은 미래의 거대한 전쟁을 예고하는 묵시론의 미래상이나 다름이 없다. 보브롭스키가 여기서 암시하고 있는 것은 가상적 거대한 전쟁의 끔찍한 상이다. 페터 알베르트는 다섯 번째의 유령의 상이 “신화적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과거”라고 주장하나, 이는 잘못된 해석이다. -두 번째 장면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모두 검은 지옥의 방에서 기거하고 있기 때문에, 비참한 미래에 대한 상징적 상으로 봐야 옳다. 또한 우리는 다섯 번째 유령의 상을 오로지 1933년에서 1945년의 시기로 고착시켜 해석해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민족 내지는 인종간의 대립되는 모든 전쟁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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