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이어집니다.)
9. 나오는 말
레빈의 방앗간에 나타난 유령의 상의 특성을 결론적으로 정리해 보자. 이는 작품의 주제와 직결되는데, 다음의 세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마지막을 제외한) 네 개의 유령의 상은 “인간의 기억 속에는 인간의 인간에 대한 단순한 보복 행위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누가 어떤 이유에서 잘못을 저질렀는가? 하는 법적 정당성 및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상황 등을 망각하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당했다’는 심리적 피해 의식만이 앞설 뿐이다. 이렇듯 피해는 또 다른 보복을 낳는다. “첫 번째 상 - 피해, 두 번째 상 - 복수, 세 번째 상 - 피해, 네 번째 상 - 잔인한 보복”이라는 구도를 생각해 보라. 문제는 누구든 간에 피해의 원인을 타인에게서 찾으려고 하는 태도이다. 그러나 문제는 쉽사리 피해를 가할 수 있는 강자에게 있다. 네 가지 유령의 상을 통하여 보브롭스키는 독자에게 이러한 공격적 자기 방어를 지양하고, 오히려 강자의 자기반성을 통한 화해와 공존을 은근히 촉구하고 있다.
2. 첫 번째와 두 번째 유령의 상에서 묘사되는 비극적인 죽음은 주로 정치적 종교적 갈등에서 파생된 것이다. 여기서 종교적인 갈등은 기독교라는 틀 내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에 비하면 네 번째 상은 기독교 내의 갈등 구조의 차원을 벗어나 이교도 내지는 다른 인종에 대한 전투적인 보복의 상으로 이해될 수 있다. 종교적 입장은 지금까지 주어진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결탁해 왔다. 문제는 경제적 문제는 정치적 갈등을 낳고, 정치적 문제는 종교적 갈등을 야기 시킨다는 점이다. 레빈의 방앗간은 사유 재산에 대한 집착이 제국주의적 지조, 특히 파시즘 이데올로기를 낳고, 파시즘 이데올로기는 인종 탄압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3. 다섯 번째 유령의 상에서 알 수 있는 바,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이 속한 민족의 이익은 타인, 그리고 타인이 속한 민족의 손실의 대가로 쟁취된다. 이러한 일이 정당한 방법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때, 사람들이 사용하는 수단은 총과 칼이다. 등장인물 글린스키가 “여기서는 법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말한 것을 생각해 보라 (3. 52). 역사 속에 나타난 수많은 전쟁은 권력자의 부를 확장시키기 위해서 발생한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역사 속에서 불과 손꼽을 수 있는 몇 개의 혁명은 강제 노동과 억압 그리고 강제 징집을 거부하고, 생존과 평화를 지키기 위한 의도로 발생하지 않았는가? “여자들과 아이들만 성문에 남아 있”게 하고, 모든 남자들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는 것은 바로 전쟁이다. 보브롭스키의 작품은 전쟁을 통해 출현할 수 있는 “빙하기의 냉혹함”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레빈의 방앗간"은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딱딱한 이념 소설이 아니다. 보브롭스키의 시각은 잃어버린 보헤미안의 생활 풍습, 유태인들의 자생적인 삶 등에 대한 따뜻함을 잃지 않고 있다. 특히 보브롭스키는 소설의 결말 부 유머와 관용의 정신을 지니고 있는 화가 필리피를 등장시켜, 요한을 간접적으로 설득시키려고 애를 쓴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작가가 소설 속에서 자신 스스로를 가해 민족의 일원이라고 토로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얼마나 발설하기 어려운가? 야스트르쩸브에게는 죽어 가는 늙은 노인 스트르체고니아의 발언, “내가 너를 볼 수 있도록 말해 봐!” 라는 간곡한 호소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독일인이 스스로 가해자라고 자신의 가슴에 못 박는 것은 때로는 독일인의 권위적 존재 가치 및 기득권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아픔과 죄의식에 대한 기억을 망각하지 않은 채, 말하고, 기술하며, 보존하는 행위 - 바로 이것이야말로 보브롭스키가 산문 작품에서 밝히려고 했던 궁극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보브롭스키는 시, 「언제나 명명하기 (Immer zu be- nennen)」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이 시에서 자연물들은 단순히 생명에 대한 객관적 상관물로서 이해될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면 강자와 약자 사이에서 끝없이 발생하는 아픔과 고통 그리고 앙갚음과 해원 등에 관한 묘사라고 볼 수 있다. “언제나 명명하기:/ 나무를, 날아가는 새를,/ 흐르는 강에 씻기는 붉은/ 바위를, 초록의, 그리고 숲 속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뿌연 안개 속의 물고기를.// 표시, 색깔들, 그건/ 어떤 유희, 나는 의혹에 사로 잠긴다,/ 그 유희는 정당하게/ 끝나려 하지 않는다고.// 누가 깨우쳐 주랴,/ 내가 망각하는 것들을:/ 바위의 잠을/ 날아가는 새의 잠을/ 나무들의 잠을? 어둠 속에서/ 그들의 말은 그냥 사라지는가?// 신 (神)이 여기/ 물고기 속에 들어가/ 나를 부르면, 나는/ 배회하리라, 그리고/ 약간을 기다리리라.”
(끝 감사합니다.)
한국어 문헌:
서정일, 레빈의 방앗간에 나타난 가족사 전승을 통해본 조상의 죄, in: 독어 교육, 49, 2010, 255 -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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