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2)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필자 (匹子) 2024. 11. 15. 10:01

 

(계속 이어집니다.)

 

8. 망각 그리고 삶의 무거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가벼운 존재로서의 갈망의 삶은 쿤데라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에서는 무거움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우리가 감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러한 삶을 누릴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추구하려고 끝없이 애를 씁니다. 인간이 갈구하는 가벼움은 차라리 망각과 같습니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개별적 인간의 삶처럼 참을 수 없이 경박합니다. 그것은 바람에 치솟는 먼지 혹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러한 사물처럼 말이지요.” (Kundera 1987: 102). 가벼운 존재의 유희는 마치 나비의 꿈처럼 망각 속에 머물고 있는 반면, 무거운 존재의 고통은 마치 무의식 저편에서 도사린 기억으로 머물지 않습니까? 이는 니체의 영겁회귀의 이론을 연상시킵니다. 적어도 작가가 인간의 갈망을 그런 식으로 가벼운 먼지로 이해하는 한, 그의 작품이 과연 사랑과 부자유로 포장한 멜로드라마의 의미, 그 이상을 전해줄 수 있을까요?

 

9. 더 이상 찬란한 이상에 대해 기대할 수 없는가? 우울과 환멸: 쿤데라의 문학은 비록 유럽인 뿐 아니라, 제 3세계의 사람들에게도 감흥을 느끼게 해줍니다. 사람들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이상이 사라진 현실 앞에서 더 이상 절대적 가치를 느낄 수 없는 우울함에 빠지곤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쿤데라는 우리에게 거대한 질서가 무너진 다음에 느낄 수 있는 환멸감을 전해줍니다. 마치 중세 사회의 신학적 질서가 무너졌을 때 서서히 도래하는 토성의 밝음 앞에서 허탈감을 느끼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멜랑콜리아 I」을 생각해보세요.

 

1989년 이후로 사회주의 국가는 패망을 선언하고, 마르크스주의는 하나의 이상으로 치부되어 과거 역사의 영역으로 후퇴하고 말았습니다. 변화된 현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상황을 보여줍니다. 누군가 마방진의 수의 근본적 의미를 찾기 위해서 골몰하는 동안, 우연에 의해서 마방진의 판이 뒤집은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과연 어떠한 기준 내지 질서에 기댈 수 있을까요? 쿤데라의 『농담Žert』(1965)도 이와 유사한 주제를 느끼게 해줍니다. 주인공 루드비크는 처음에는 트로츠키를 신봉하다가, 나중에는 변혁의 주체로서의 총체성 내지는 진정성을 회의하고 있습니다. (Kundera 2004: 36).

 

10. 무거운 존재의 고통으로서의 삶, 그리고 해방감.: 마치 오이디푸스가 쓰라린 진리를 깨닫고 권좌에서 물러났을 때 진정한 자아와 만날 수 있었듯이, 토마스 역시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가벼운 존재로서의 인간 삶은 쿤데라에 의하면 참을 수 없는 게 아니라, 품을 수 없으며, 갈구할 수 없는 무엇입니다. 그것은 망각과 같습니다. 작가는 작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야기는 개별적 인간의 삶처럼 참을 수 없이 경박합니다. 그것은 바람에 치솟는 먼지 혹은 깃털처럼 가볍습니다. 내일이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그러한 사물처럼 말이지요. (Kundera 1987: 113). 자고로 가벼운 존재의 유희는 마치 나비의 꿈처럼 망각 속에 머물고 있는 반면, 무거운 존재의 고통은 마치 무의식 저편에서 도사린 기억으로 머물지 않습니까?

 

11. 쿤데라의 무신론, 순환의 의식이 없다. 쿤데라는 사상적으로 무신론을 표방합니다. 그렇지만 그의 무신론은 “인간의 영혼은 없고, 인간 존재는 주로 탄소, 산소, 수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경박한 무신론자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쿤데라에게 종교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완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완벽하다면, 인간이 성가시게 똥을 누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쿤데라는 인간이 태어나서, 밥을 먹고 배설하고, 죽는 자연 질서의 순환을 바람직한 것으로 고찰하지 않는 게 분명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김종철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근대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순환 구조가 깨져버렸는데, 그것을 고찰하지 못하고 쿤데라는 똥을 단지 성가신 것으로 보는 거죠. 이게 서양의 현대 작가로서 그가 가진 근본적인 한계라고 저는 생각해요. 순환의 개념이 없어요. 하느님의 질서는 순환 고리로 연결된 완벽한 질서예요. 삶과 죽음이 돌고 돌면서 우주 생명을 지탱하는 구조란 말예요.” (녹색평론: 74).

 

12. 쿤데라의 키치 비판 그리고 작품의 세 가지 주제: 쿤데라는 일방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단순한 사고를 키치라고 규정하고 이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예컨대 스탈린의 아들, 이아코프 추가슈빌리Jakow Dschugaschwili는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포로가 되었는데, 화장실 청소를 시키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서 전기 철조망에 몸을 던져 자살한 바 있습니다. 이는 더럽고 메스꺼운 현실을 철저히 부정하고 이를 거부하려는 이아코프의 외골수의 태도인데, 바로 키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키치는 영혼과 육체, 아름다움과 추함, 공공성과 사적인 특성 등이 혼재되어 있는 인간 삶의 콤플렉스를 용인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키치는 쿤데라에 의하면 예술의 적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감상성 내지는 상투성에 함몰하게 작용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입장은 키치를 예술적 대상으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포스트모던의 예술론과는 정반대되는 것입니다. 쿤데라의 소설이 오히려 로베르트 무질 내지 헤르만 브로흐의 에세이 소설의 전통을 따른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정용환, 2013: 263).

 

13. 갈망이 어쩌면 우리를 병들게 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오로지 키치에 대한 비판으로 귀결될 수는 없습니다. 소설은 또 다른 주제를 염두에 둘 때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중요한 것은 작가가 더 나은 삶에 대한 인간의 갈망으로서의 유토피아에 더 이상의 기대감을 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 역시 그러합니다. 쿤데라는 소설의 마지막 단락, “카레닌의 미소”에서 강아지 카레닌에 관해서 서술합니다. 테레사에게 강아지 카레닌은 조건 없는 사랑을 선물한 유일한 동반자였습니다. (장희창: 55).

 

작가는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우리가 진실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는 까닭은 사랑으로부터 끝없이 무언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사랑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순이 우리의 마음속에 쓰라림을 안겨줍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사랑에 대한 기대감을 저버린다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요약하건대 쿤데라의 문학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특징적으로 보여줍니다. 1. 전체주의 예술의 단순성 대신에 서구 미학의 개별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2. 일방적 미학의 키치 대신에, 추의 미학을 동등하게 용인합니다. 3. 무거움으로서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대신에, 가벼움으로서의 구속 없는 자유의 삶 내지는 대가 없는 사랑의 삶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참고 문헌

 

- 쿤데라, 밀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재룡 역, 민음사 2009.

- 장희창: 고전 다시 읽기, 호밀밭 2016.

- 정용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실존주의: 사르트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in: 비교문학, 86권, 2022, 209 – 255쪽.

- 정용환: 키치적 허위와 소설적 진실, 브레히트와 현대 연극, 29권, 2013, 243 – 272.

- 조현천: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나타난 우연의 시학, in: 독일어문학, 85권 2019, 65 – 85쪽

- Kundera, Milan: L’insoutenable légèreté de l’être, Gallimard, Paris 1987.

- Kundera, Milan: Die unerträgliche Leichtigkeit des Seins. Übersetzung Susanna Roth. Hanser, München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