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6. 소설 속의 압권, 하나의 에피소드 (1) : 뒤이어 주인공은 우연히 나스타시아와 살롱에서 조우합니다. 살롱에는 상류층에 해당하는 많은 사람이 운집해 있었습니다. 이 와중에서 므이쉬킨 공작은 사람들에게 놀라운 에피소드 하나를 들려줍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므이쉬킨 공작이 스위스에서 체험했던 이야기입니다. 나스타시아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마리라는 처녀가 살았는데, 어느 남자에게 농락당한 뒤에 버림받게 됩니다. 이웃 사람들은 사실을 잘 알지도 모르면서, 마리를 간통한 여자로 매도합니다. 마리의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절단하고 끔찍한 고통을 가합니다. 마리는 사회적으로 버림받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간통한 여자는 유럽 시민 사회에서 쉽사리 비난의 대상이 됩니다.
이러한 경우는 마치 데이비드 린 감독의 영화 「라이안의 처녀Ryans Daughter」의 경우처럼, 아니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의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1850)도 그대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영국 장교를 사랑한 아일랜드 처녀가 마음 사람들에게 고초를 당하는 이야기가 서술되고 있으며, 호손의 소설의 여주인공인 유부녀 헤스터는 마을의 목사와 사랑을 나누었다는 이유로 “간통한 여자Adulteress”라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웃들은 간통남에게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지만, 간통한 여자에게 수모를 안겨주면서, 모든 잘못을 여성에게만 덮어씌웁니다. 방종한 여성에 대한 저주는 도를 넘어서는 것이었습니다.
7. 소설 속의 압권, 하나의 에피소드 (2):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 「종(鍾, Die Glocke」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것은 고삐 풀린 여성”의 방종함이라고 합니다. 바빌론의 창녀에 대한 끔찍한 저주는 여성 혐오와 방종한 삶에 대한 두려움 내지는 질투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유럽 시민 사회는 여성을 부자유의 질곡에 가두고, 억압하는 데 조금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이러한 폭력은 소설 『백치』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마리는 주위 사람들의 핍박과 외면 속에서 육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서서히 병들어갑니다. 그미의 심리적 고통은 마리의 병든 육체를 더욱더 아프게 만듭니다. 이때 므이쉬킨 공작은 어느 누구에게도 의지할 곳 없는 마리를 찾아가서, 성심성의껏 그미를 보살펴줍니다. 그렇지만 마리의 몸 상태는 그야말로 악화일로에 처해 있습니다.
소설 속의 압권은 주인공의 노력이 마리에 대한 주민들의 증오심을 서서히 사라지게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마을 사람들은 마리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고, 그미를 도와주는 공작에 대해서도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은 공작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의 시점은 안타깝게도 마리의 시신이 땅에 묻힌 뒤였습니다. 이로써 마리의 죽음은 주인공의 마음에 깊은 트라우마를 안겨줍니다.
8. 사랑의 깊이를 깨닫는 나스타시아: 나스타시아는 참된 사내를 알아볼 줄 아는 혜안을 지닌 정열적인 여성이었습니다. 그미는 그의 경험담을 들은 뒤에 “공작이야말로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남자이다.”라고 굳게 믿습니다. 그미는 가냐 제후와의 약혼을 미루고 파기한 다음에 므이시킨 공작과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의 어느 별장에서 여름을 보냅니다. 이 시점에서 그미가 주인공과 육체적으로 깊은 관계에 빠진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그미 주위에는 자신을 따라다니던 남자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미는 이들을 자신의 아름다움에 매혹된 남정네들이라고 간주했을 뿐입니다. 나스타시아는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에 드는 남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므이시킨 공작은 다른 남자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래서 그미는 주인공에게서 깊은 애호의 감정을 느낍니다.
그미는 자신의 사랑을 무작정 쟁취하려고 결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사랑하는 임의 행복을 위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나스타시아의 마음은 공작에 대한 깊은 연정과 이룰 수 없는 사랑 사이에서 쓰라린 고통을 느끼며 방황합니다. 게다가 나스타시아는 자격지심에 못내 괴로워합니다. “나는 그분보다 나을 게 없어.” “공작만큼은 아글라야와 행복하게 살아야 해.” 결국 나스타시아는 사랑하는 임을 위하여 로고친과 마음에도 없는 결혼식을 올리려고 작심합니다.
9. 경험 없는 처녀여, 눈앞의 질투심 때문에 사랑을 저버릴 수 있는가?: 다른 한편 아글라야는 주인공이 나스타시아를 대하는 모습을 보고, 엄청난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처음에 공작은 그미의 눈에는 가련한 기사처럼 보입니다. 실제로 아글라야는 돈키호테를 묘사한 푸시킨의 시 「가련한 기사」의 시구를 떠올리면서, 이타주의의 방식으로 서툴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므이시킨 공작에게 조소를 터뜨리면서도 어떤 연민의 정을 느낍니다. 그미의 동정심은 서서히 강렬한 사랑의 감정으로 바뀝니다. 아글라야는 지금까지 한 번도 누군가를 깊이 사랑해본 경험이 없는 귀족 처녀였습니다. 그렇기에 공작과 나스타시아에 대한 자신의 질투심을 스스로 감당해내지 못합니다. 미리 말하자면 경험 없는 처녀의 질투심이 결국 자신의 귀중한 사랑을 파멸시키고 맙니다.
이를테면 그미는 나스타시아가 공작과 육체관계를 맺었다고 지레짐작합니다. 문제는 아글라야가 일견 온갖 사내들과 놀아난 것처럼 보이는 여자와 법적인 투쟁마저 불사하려는 태도에 있었습니다. 공작을 차지하기 위한 아글라야의 이러한 태도는 일견 당연하게 보였지만, 몰인정한 처사나 다름이 없습니다. 더욱이 나스타시아에게는 돈과 지위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때 므이쉬킨 공작은 이 점을 고려하고 다시금 나스타시아를 두둔하고 나섭니다. 아글라야는 제후의 딸로서 부유하게 살지만, 나스타시아는 돈 없고 사련한 여성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아글라야는 어처구니없는 공작의 태도에 실망감을 금치 못합니다. 그 후에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은 그미는 주인공으로부터 영원히 사라집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31 동구러문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서로박: (1)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0) | 2024.11.15 |
---|---|
서로박: (3)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0) | 2024.10.25 |
서로박: (1) 도스토옙스키의 '백치' (0) | 2024.10.25 |
서로박: (2)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강의 (0) | 2024.07.03 |
서로박: (1)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강의 (0) | 2024.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