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0. 비극이 발생하다: 므이쉬킨 공작은 나스타시아에게 결혼을 신청합니다. 주인공에게 결혼이란 무소유의 행위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스위스에서 병든 마리를 도와주었듯이, 이번에는 (사랑하는 임의 행복을 위하여 임을 떠나려고 결심하는) 나스타시아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돕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소설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을 맺습니다. 나스타시아는 주인공과 결혼하기 직전에 로고친에게 향합니다. 경제적 문제 등 이전의 모든 관계를 깨끗하게 매듭지어야만, 공작과 결혼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므이쉬킨 공작 역시 그미를 찾으려고 로고친의 집으로 달려갑니다. 로고친은 거칠고 단순한 사내였습니다. 그는 주인공이 보는 앞에서 자신을 배신했다는 이유로 나스타시아에게 향해 칼을 뽑아 듭니다. 나스타시아는 로고친의 칼에 찔려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면서 즉사합니다. 므이쉬킨 공작은 순간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고 기절합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은 나스타시아의 시체 옆에서 쓰러져 있는 공작을 발견합니다. 공작은 그미의 시신 앞에 엎드린 채 넋 나간 듯이 그미의 뺨을 쓰다듬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로고친은 살해 혐의로 15년 구금형을 받고 어디론가 끌려갑니다. 그런데 우리의 주인공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므이쉬킨 공작은 요양원으로 되돌아갑니다. 그의 의식은 세상의 모든 어처구니없는 모순에 방해받은 채 서서히 꺼져갑니다.
11. 파르치발, 바보 예수: 므이시킨 공작은 러시아의 파르치발이며, 바보 예수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러시아 귀족들의 간계와 술수밖에 없습니다. 백 마리의 까마귀 속에서 한 마리의 백로는 이단아로 취급당하기 마련입니다. 이로써 그의 순수성, 솔직함, 고결한 명예 그리고 고결한 인간성 등은 치명상을 입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돈과 명예를 앞세우는 귀족들의 타산적인 사고에 정면으로 대응하면서, 자신의 내면에 도사린 인간애의 이상을 내세웁니다.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그의 정직성 그리고 선한 마음에 대해 경탄을 터뜨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를 백치로 몰아세웁니다.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고, 모든 사항에 개입하는 주인공을 우유부단한 사내로 간주하였습니다.
므이쉬킨의 행동은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런 이권이 없음에도, 제삼자가 나서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형국으로 보였습니다. 어쨌든 우리는 므이시킨 공작의 비극을 타자의 시각 그리고 제삼자의 이권 개입에서 고찰할 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주인공은 스위스를 떠나 러시아에 와서 기이한 인간을 접하고, 과거의 경험을 떠올립니다. 나스타시아를 구원하기 위해서 므이시킨 공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바라봄에 근거하는 기억이 아니라, “비가시적인 믿음”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속에는 사랑하는 임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이었으며, 주인공은 이를 끝내 극복하지 못합니다.
12. 성숙하고 해방된 여성, 좌절을 맛보다: 그렇다면 나스타시아의 입장에서 고찰할 때 그미의 사랑은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요? 그미는 로고친의 소유욕에 근거한 육체적이고 열정적인 사랑 그리고 므이시킨 공작의 아가페 사랑 사이에서 어떤 하나를 선택할 수 없었습니다. 나스타시아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사랑의 대상 가운데 더 나은 하나를 택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나스타시아는 나중에야 비로소 다음의 사항을 간파합니다. 사랑은 그미에게는 육체적 결합이면서도 동시에 정신적 심리적 결합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미는 “몸 따로, 마음 따로”와 같은 구분된 사랑을 실천할 수 없었습니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19세기 말 유럽 사회의 남성 중심주의의 사회적 질서에 있습니다. 경제력을 지니지 못한 여성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능동적으로 행복을 구현하는 경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비록 도스토옙스키는 19세기 말의 러시아 현실을 배경으로 삼으면서 그들의 애환을 작품 속에 담았습니다. 그렇지만 거시적으로 고찰할 때 등장인물들이 겪는 사랑의 갈등은 어쩌면 시대를 초월하는 것일지 모릅니다. 사랑으로 인한 갈등은 언제 어디서나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다음의 사항입니다. 즉 우리는 등장인물 가운데 누구를 도덕적으로 단죄할 수도 없으며, 그들의 행동에 찬사를 보낼 수도 없습니다. 등장인물들은 19세기 러시아라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의 틀 내에서 자신의 사랑의 삶을 실천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이들을 동해서 우리 자신이 처한 현재의 정황을 성찰할 수 있습니다.
13. 프로이트의 도스토예프스키 상: 끝으로 두 가지 사항만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문학에 관해 정신분석학적으로 추적하였습니다. 필자는 다른 글에서 이에 관해 심도 넘치게 분석한 바 있습니다. 위대한 작가는 모든 면에서 과도한 욕망을 품고 있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의 폭력에 의해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나타난 것이 도벽 그리고 간질의 증세였습니다. 도스토옙스키는 도박으로 돈을 잃었을 때 허망함 내지 편안함을 느꼈습니다.
이러한 허망함은 다른 각도에서 고찰할 때 수음 행위 후에 느끼는 허탈감과 관계되는데, 이는 결국 창작의 욕구를 부추기게 했다고 합니다. 그의 이러한 극단적 욕구는 아버지 살해에 관한 무의식적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욕구는 가족에 의해서 그리고 사회에 의해서 차단되곤 했는데, 이로 인한 갈등이 결국 그의 의식과 전의식을 좌우했다고 합니다. 물론 프로이트의 이러한 주장은 아직 완전히 검증되지는 않았으나, 도스토옙스키의 창작 모티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14. 뱀의 다리, 닭의 쓸개 같은 말씀: 어쩌면 므이쉬킨 공작의 이타주의의 생활방식 역시 작가가 모든 갈등에서 벗어나기 위한 판타지 속에서 발견해낸 것인지 모릅니다. 자신의 이기심을 일차적으로 접고, 친구와 정인의 의지를 중시하면서 살아가는 이타주의자 – 그러나 사랑의 삶에서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이기주의를 선택하지 않으면, 우리의 진정한 행복은 이룩되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사랑하는 마음은 진실로 아름다운 법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신이나 천사가 아니므로, 사랑의 대가, 즉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접을 수는 없습니다. 사랑을 베풀지만, 이러한 노력의 대가가 조금도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는 섭섭함을 느끼거나 질투심에 사로잡히지요.
아무런 조건도 없고 대가도 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의 이상입니다. 물론 이러한 이상을 실천하려는 마음가짐 자체는 아름답고 귀중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이라면, 사랑하는 임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고 싶습니다. 사랑하고 싶으나, 그렇게 할 수 없는 정황, 사랑을 베풀지만, 이에 대한 대가가 조금도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리는 아픔과 섭섭함, 미움과 질투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빌헬름 라이히가 아들, 피터에게 전한 말씀을 한 번은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맛있는 음식 잘 먹고 복통을 앓지 말라.”고 말입니다.
(끝.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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