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동구러문헌

서로박: (2) 안드레예프의 '7인의 사형수'

필자 (匹子) 2024. 11. 18. 09:45

 

(앞에서 이어집니다.)

 

6. 심리적 파멸을 체험하는 시가노크 그리고 바샤: 바샤는 자신이 체포되기 전의 과정을 하나씩 기억해냅니다. 그는 테러리스트 가운데에서 폭탄 투척의 임무를 자발적으로 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로 돌아가고, 냉혹하게 전개되는 사건의 메커니즘을 떠올리니,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자신의 목이 교수대의 올가미에 씌여 끊어질 것을 떠올리니, 순식간에 기절할 것 같습니다. 처형되기 직전에 바샤는 가족과 대면할 기회를 얻습니다.

 

이때 바샤는 어머니와 마지막으로 만나게 되는데, 두 사람은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손만 붙잡고 있습니다. 이들의 언어는 속내를 드러낼 수 없는 가식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혁명 투사 그리고 어머니 사이에는 차가운 거리감만이 뎅그렁 남아 있을 뿐입니다. 죽음 직전의 시간 속에서 어떠한 무엇도 혈육의 애틋함이라든가 안타까움이 강하게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곁에서 자신을 보살펴주는 타냐만큼은 처형당하지 않고, 살아남기를 애타게 갈구합니다. 냉정한 여성, 무샤는 처형이 며칠 남지 않은데도 의식적으로 과거의 안온하고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리면서 작위적으로 행복감에 빠져들려고 애를 씁니다.

 

7. 처형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가? 등장인물들은 처형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서 각양각색의 수단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세르게이 골로빈은 자신의 철저한 생활 습관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규칙대로 살아갑니다. 인간은 자신의 모든 삶에서 즐겁고 중요한 일을 선한 마음으로 행해야 하는데, 이를 그대로 실천했다고 자기 자신을 다독입니다. 과묵한 베르너에게는 인간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이 자리하지 않습니다. 그는 독방에서 마지막 순간까지 체스 놀이에 전념하며 지냅니다. 그러나 베르너는 어느 결정적인 순간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이웃과 친구에 대한 사랑이다.”라는 사실을 되새기면서 지금까지 헛되게 살아온 것을 후회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에서 다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주제를 다시 한번 체감할 수 있습니다.

 

타냐는 지금까지 그러한 대로 주위 사람들을 수미일관 돌보려고 애를 씁니다. 그미는 타인에게 봉사하는 일이 자신의 행복을 배가한다는 것을 절감하고, 이를 마지막 순간까지 실천하려고 합니다. 등장인물들은 어느 날 두 명씩 차례대로 교수대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타냐는 마지막으로 올가미에 자신의 목이 감기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겪어야 하는 끔찍한 고독과 죽음 직전의 두려움이라는 광적인 감정을 냉정하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8. 사형집행은 인간의 존엄성에 위배된다. 작가 안드레예프는 사형수들의 여러 기지 행동 양상을 서술하면서 다음의 사항을 은근하게 비판합니다. 첫째로 사형 제도는 범죄의 척결을 의도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의 크고 작은 죄를 처벌하는 수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사형 제도는 범죄를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강력한 경고의 의미를 지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살인자는 범행을 저지르는 순간 이러한 경고를 의식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설령 계획 살인이라 하더라도 살해 욕구는 무의식으로 사형에 대한 두려움을 망각할 정도로 강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형제도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경고의 조처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로 인간은 –가령 레오 톨스토이에 의하면- 인간이 인간의 죄를 처벌하기 위해서 사형 제도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데, 작가, 안드레예프는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오로지 신만이 인간을 직접 죽음으로 처벌할 수 있다는 기독교적 믿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셋째로 인간의 법과 제도는 아무리 다듬는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 완벽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사악한 인간은 얼마든지 법과 제도를 남용하여 인위적으로 사법 살인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찰할 때 무고한 인간에게 사법 살인을 저지른 경우는 수없이 발생했습니다. 요약하건대 안드레예프의 소설은 죽음을 앞둔 사형수의 심리적 고통 그리고 이에 대한 왜곡된 본능의 행동 양상 등을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가는 다음과 같이 질문합니다. 그렇다면 사형 제도가 존속되어야 하는 결정적 당위성은 과연 무엇인가? 하고 말입니다.

 

9. 작품에 대한 비판: 막심 고리키는 안드레예프의 소설을 비판했습니다. 즉 작가는 등장인물들이 처한 숙명적 사항에 집착하면서, 그들의 심리적 내면적 변화에만 관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무시되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자행한 사건의 정치적 배경이라든가 역사적 변화의 가능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등장인물들 가운데 몇 명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간 정치적 투쟁의 흔적을 되새기고 있지만, 역사적 진보에 대한 당위성을 하나의 신념으로 수용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영웅과 그들의 혁명적 행위 사이의 관련성이 정교하게 묘사되지 않는다는 게 하자라면 하자일 것입니다. 모든 행위는 사회 정치적 조건에 의해 이해될 수 있지만, 작품은 인간의 목숨과 죽음에 관한 추상적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고통을 전적으로 추적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의 과거의 행적 그리고 이들의 거사에 담긴 세계관의 상호 관련성 등이 전혀 교차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품의 결함으로 지적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안드레예프의 작품이 무조건 혁명 운동의 결함이라든가 폭동의 문제점과 무가치함을 옹호하는 반동주의의 경향으로 매도하는 것은 문제의 소지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