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10년 전에 쓴 글인데, 지금 읽어도 별반 바뀐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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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K,
당신과 같은 젊은 사람들은 언제나 "어째서 Wozu?" "어디로 향해서 Wohin?"하고 물어야 합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야 말로 삶에서 매우 중요한 물음입니다. 전자는 가장 중요한 사회과학적 질문이며, 후자는 가장 중요한 인문학적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째서?"라는 질문은 현재의 현실에 대한 분명한 인식에서 비롯하는 질문입니다.
우리는 안개의 나라, 참으로 요상한 나라에 살고 있습니다. 선조들이 청동의 강점을 이해하지 못하고, 철기 시대를 맞이했듯이, 우리는 사회주의의 강점을 한 번도 체험하지 못하고, 사회주의 종말을 맞이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들이 한 번도 하극상을 실현해보지 않은 나라, 부와 권위주의가 세습되는 나라, 세계 경제 11위에 해당하는 나라. 그러나 사회의 부의 삼분의 2 이상을 인구 5%의 사람들이 몽땅 차지하고 있는 나라, 그런데도 소시민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자신의 일자리와 호주머니만 걱정합니다. (이게 항상 문제이지요. 홍세화 선생도 말한 바 있지만, 사회적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는 공동의 노력은 항상 소시민들의 이기심에 의해 희석되고 중화됩니다. 가령 입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근본 이유는 훌륭한 해결 방안이 도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학부형들의 태도에 기인합니다. 대부분의 학부형들은 사교육비 철폐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쓰지 않고, 제 자식 잘 되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습니다.)
자동차 사고 사망률 1위, 1.1% 가장 낮은 출생률, 이혼율 세계 1위, 자살률 세계 1위의 나라. 이제 세계 공룡으로서의 미국 경제가 서서히 한계를 드러내려고 하는 즈음 정부는 어리석게도 불평등한 한미 FTA 협정을 매듭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경제가 활기를 되찾는 반면에, 중국의 발전 속도에 여러 가지 제동을 거는 요소가 미세하게 출현하고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남한의 준비 작업은 다방면에서 여전히 답보 상태에 처해 있으며, 석유 위기에 대항할 수 있는 생태 위기 극복을 위한 노력은 그저 민간 차원에서만 경미하게 행해질 뿐입니다. (그렇지만 무조건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어진 참혹함은 변화와 갱생을 위한 전제 조건입니다. 가령 한국인들의 저력은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 인내와 끈기 - 한국인들의 이러한 특성은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습니다.)
친애하는 K,
남한에서는 학문 영역도 시장 논리에 의해서 패망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몇몇 실용주의적 논문을 제외하면, 학자들의 논문은 오늘도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기껏해야 총장 선거 철에만 몇몇 논문들은 표절 문제로 곤욕을 치를 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밥줄이 끊긴 채 학문을 행한다는 것은 그 자체 여간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 말입니다. 그밖에 우리는 순수과학을 홀대하는 풍토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수학은 순수과학입니다. 누군가 살아가는 데 고등 수학이 어디 쓰이냐? 하고 말하면, 이 말속에는 엄청난 착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수학, 물리, 화학 과목은 공학, 컴퓨터 학 등의 응용과학의 토대가 되는 과목입니다. 그런데도 이러한 과목들은 본연의 깊은 중요성과는 달리 인문학의 순수 기초 학문 (독문학, 불문학, 러시아 문학 등)과 마찬가지로 사회로부터 철저히 홀대당하고 있습니다. 농업과 수산업이 천시당하고, 제 3차 산업인 서비스업만이 활개치는 나라이니, 학문 영역이라고 해서 변방의 천민적 특성에서 어찌 벗어나 있을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답답한 것은 눈앞의 이득을 중시하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응용 학문의 결론만을 중시하는 몇몇 사회 고위층 사람들의 어떤 근시안적인 시각입니다. 언젠가 말한 바 있었듯이, 철학자 탈레스는 태양의 흑점을 관찰하여, 그 해의 올리브 풍년을 예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일을 눈앞의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실용적 작업으로 매도했습니다. 비록 가난하게 살지라도, 눈앞의 실익에 관한 문제보다, 오히려 어떤 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려야 한다는 게 탈레스의 지론이었습니다. 비록 남들이 하찮게 생각하더라도, 나는 현재와 과거 그리고 미래를 아우르는 참된 면모를 찾겠노라... 이 얼마나 대단한 생각입니까? 중요한 것은 지식이 팔리느냐, 팔리지 않느냐? 가 아니라, 주어진 앎이 참인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물음이었던 것입니다. 현재 팔리는 상품은 내일 팔리지 않고, 오늘 팔리지 않는 상품은 내일 팔립니다. 몇몇 고위층 사람들은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 사실을 추후에 뼈저리게 체험할 것입니다.
문제는 학문하는 행위를 존중하고, 이를 사회적으로 뒷받침하는 제도가 많이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또한 순수 기초 과학의 간접적이지만 위대한 능력이 인정받는 풍토가 생겨나기를 바랍니다. 친애하는 K, 당신은 어디로 향하려고 하십니까? 이토록 참담하고 눈 먼 세상에서 어떠한 가치를 찾으려고 하십니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의 갈망이 -무엇이든 간에- 가장 애틋하고 소중한 무엇이라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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