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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5)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5권 서문

필자 (匹子) 2024. 10. 30. 11:57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5

보이어로부터 피어시까지 (20세기 후반 - 현재)

서문

 

경쟁, 무한대의 이익추구, 엘리트주의, 자연파괴 등은 실증주의의 단선적 사고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협동, 절제, 평등 그리고 상생 등은 생태적 사고의 토대로 정립될 수 있다.” (필자)

계급, 종파, 정당, 국적, 성, 인종, 나이 등과 같은 구분 그리고 차별 속에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 Divide et impera’라는 지배자의 저의가 숨겨져 있다.” (필자)

 

 

친애하는 J, 우리는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제 5권에서 1940년대 이후의 문학 유토피아를 다루려 합니다. 이것은 평화 운동, 환경 운동 그리고 여성 운동과 결착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경쟁 지향적인 국가 내지는 국가 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은 평화 운동을 촉발했습니다. 둘째로 지구 전체로 확장된 환경 파괴, 특히 핵에너지에 대한 비판은 환경 운동의 관건이 되었습니다. 셋째로 남녀 불평등의 급진적인, 혹은 점진적인 비판은 여성 운동이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전반기까지의 문학 유토피아는 전체적으로 파시즘과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폭력을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인류는 세계대전으로 치닫는 국가적 폭력과 갈등보다는, 여성 문제, 환경 문제 그리고 평화 공존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가령 정치적 유토피아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오웰의 『1984년』이 1949년에, 생태주의 유토피아의 출발을 알리는 스키너의 『월든 투』가 1948년에 나란히 발표되었다는 사실은 그 자체 의미심장합니다. 이 시점을 기준으로 20세기 초반부와 후반부의 문학 유토피아의 경향은 첨예하게 분할되고 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오웰의 『1984년』 이후로 정치적 유토피아의 설계는 종언을 고했다고 주장합니다. 가령 허버드 마르쿠제, 헬무트 셸스키 그리고 대니얼 벨 등은 “유토피아는 얼마든지 발전된 과학 기술로 보완될 수 있다.”고 천명하며, 유토피아의 종말을 선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입장은 국가 시스템이라는 한 가지 측면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에서 어떤 결정적인 하자를 드러냅니다. 유토피아는 지금 여기에 새롭게 출현한 문제점 그리고 이에 대한 대안을 추구한다는 특징을 고려할 때, 생태주의 유토피아는 필연적으로 출현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태계 파괴로 인한 기후 변화, 식량 문제 그리고 잘사는 국가와 못사는 국가 사이의 대립 등의 난제는 현대인에게 유토피아의 어떤 새로운 기능을 요청합니다. 20세기 후반부터 첨단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삶의 질은 나아졌으나, 거대한 범위에서의 빈부 차이가 출현하였습니다. 게다가 인구 폭발과 생태계 파괴 현상은 현대인에게 삶의 근원적 의미를 근원적으로 짚어보게 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억압에 대항하는 투쟁이 관건이었다면, 21세기에 이르러 “물구나무선 먹이 피라미드” (필자)를 복원시키는 과업이 동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본서에서 다루는 문학 유토피아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보이어의 디스토피아 『칼로카인』(1940): 스웨덴 작가, 카린 보이어는 내적인 사상 감정을 투시할 수 있는 약물, “칼로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칼로카인”은 최면 요법을 대체할 수 있는 심리 치료로 활용될 수 있지만, 국가의 차원에서 불순분자를 제거하는 잔인한 수단으로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습니다. 보이어는 내적 사상 감정을 투시할 수 있는 약물의 발명을 서술함으로써 개개인이 국가에 어떻게 이용당하는지를 서술합니다. 세계국가의 시스템은 전체주의적이며,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지속적인 전쟁 상태에 처해 있으므로, 집권층의 독재와 테러가 강력하게 행해집니다.

 

2. 베르펠의 『태어나지 않은 자들의 별』(1945): 베르펠의 미래 소설은 십 만년 이후의 인간 세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작가는 시대비판으로서 인종 갈등, 전쟁으로 인한 파괴 그리고 죽음 등을 고발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101945년의 시점의 새로운 사회에서는 첨단 무기 등으로 인한 전쟁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거의 완벽한 제도를 마련하여 평화를 정착시키려고 합니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사이의 갈등도 해결되고 있습니다. 미래의 우주인은 자신의 영혼을 “씨눈”으로 전환되어서 겨울 정원에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품에 핵심적으로 다루어지는 것은 전쟁, 인종 갈등 그리고 죽음의 문제 등입니다.

 

3. 오웰의 『1984년』(1949): 조지 오웰의 『1984년』은 20세기 정치적 유토피아의 대미를 장식하는 “검은 유토피아”입니다. 여기에는 자연과학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작가는 전체주의의 정치적 시스템을 집중적으로 다루려고 했습니다. 전체주의 국가는 인간 삶의 자유로운 사고를 위로부터 통제하고 검열합니다. 본 장은 오웰의 작품 『1984년』의 줄거리와 주제를 추적합니다. 개개인에 대한 국가의 감시와 통제는 자먀찐의 『우리들』 이후로 가장 첨예하게 작동되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사항은 “사회주의 체제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하지만, 하나의 명징한 틀로서 확정될 수 없는 무엇”이라고 판단한 오웰의 사상적 유연성 그리고 독창성입니다.

 

4. (요약) 생태 공동체와 생태주의 유토피아: 과학 기술은 유토피아의 사고를 완전히 대체하지는 못합니다. 왜냐면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지하에 있는 화석 에너지를 활용함으로써 오늘날 생태계 파괴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물론 생태주의 유토피아는 20세기 중엽에 출현한 서구 사회에서 포스트모던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들은 의향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포스트모던이 역사적 발전과 유토피아를 부정하고 하나의 마지막 현상으로서의 냉소적 입장을 여과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면, 생태주의 유토피아는 전-지구적으로 확장된 핵 문제, 인구 폭발, 생태계의 파괴 현상 그리고 제반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생존의 문제 등을 지적하며, 어떤 대안을 찾으려고 합니다.

 

5. 스키너의 유토피아 공동체 『월든 투』(1948): 20세기 전반 서구에서는 디스토피아 문학작품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월든 투』는 이와는 달리 인간의 심리 속에 도사린 공격성향을 극복하기 위한 단초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 독창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월든 투 공동체에서는 인간의 분노와 공격성향이 심리학의 프로그램을 통해서 유년시절부터 차단되고 있습니다. 이로써 개개인 사이의 갈등과 싸움 그리고 국가적 차원에서의 전쟁은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작품은 자원을 낭비하지 않고, 자치적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소규모 공동체의 삶의 가능성을 타진합니다.

 

6. 헉슬리의 『섬』, 제 3세계 유토피아 (1962): 『섬』에서는 제 3 세계의 찬란한 삶이라는 장소 유토피아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작품은 디스토피아 문학과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헉슬리는 어느 가상적인 섬을 묘사한 이유를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그 하나는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착취당하는 제 3 세계의 문제점에 대한 우회적 서술입니다. 그렇다고 헉슬리가 마치 프란츠 파농Frantz Fanon처럼 제 3 세계의 관점에서 반식민주의의 지조를 드러낸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하나는 제 3 세계의 멋진 공간과 자연 친화적인 삶에 대한 강조입니다. 헉슬리는 서구 사회의 과학 기술 그리고 동양의 자연 친화적 삶의 방식을 조화롭게 결합하려고 했습니다.

 

7. 르귄의 『빼앗긴 자들. 어떤 모호한 유토피아』(1974): 르귄은 아라스 그리고 아나레스라고 불리는 두 개의 혹성에 존재하는 사회 구도를 서술함으로써, 현대 사회와는 다른 현실적 정황 그리고 이와 결부된 사회적 삶의 범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의 주시해야 할 혹성은 우라스가 아니라, 아나레스 공동체의 사회적 체제입니다. 이를 통해서 작가는 세 가지 사항을 밝히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남성적 지배구도 대신에 사랑과 평화를 중시하는 여성 중심의 사회를 하나의 해결책으로 내세우는 일입니다. 두 번째는 전쟁 산업의 폐해를 지적하고, 생명체의 상생을 위한 사회의 체제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일입니다. 세 번째는 인구 폭발이라는 난제를 지적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가능성을 가리킵니다.

 

8.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 (1975): 에코토피아는 1980년대 말 경에 미국 서부의 광활한 땅에서 생겨난 신생국가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생태 국가의 사람들은 환경 생태의 문제, 인종 문제, 그리고 남녀 불평등의 문제 등을 점진적으로 해결해나가려고 합니다. 이는 20세기 후반의 유토피아가 지향하는 환경 운동, 여성 운동 그리고 평화 운동의 방향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입니다. 작품은 사회 유토피아의 시스템과 틀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는 점에서 독창성을 드러내고 있으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문학 유토피아의 긍정적 면모를 명시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토머스 모어의 장소 유토피아의 전통을 다시 계승하고 있습니다.

 

9. 피어시의 『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1976): 피어시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은 우주 속의 가상적 사회입니다. 가령 “마타포이세트”는 우주의 먼 공간 그리고 미래의 시점에 설정되어 있는 공동체를 가리킵니다. 이 공동체는 양성구유의 인간형을 통해서 남녀평등의 삶을 실천할 뿐 아니라, 국가 그리고 개인 사이의 구분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국가 내지는 사회 그리고 개개인의 공적이며 사적인 삶 사이의 갈등의 소지는 처음부터 차단되어 있습니다. 작가는 마타포이세트 공동체를 묘사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환경 파괴, 의료 체계의 문제점, 남녀 불평등의 구조 그리고 감시 사회의 문제점 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10 망드라의 『시골 유토피아 나라로의 여행』(1979): 망드라는 69 학생운동 세대로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의 사회생태주의의 실천을 가장 중시한 사회학자입니다. 그는 본서에서 프랑스 가스코뉴에서의 생태 공동체의 실천을 염두에 두고 본서를 집필하였습니다. 비-국가주의의 생태 공동체는 외부 사회, 즉 생태 공동체를 둘러싼 사회의 질서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망드라의 생태 공동체 운동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자치, 자활, 자생을 기치로 하는 자발적 공동체의 삶을 추구하는데, 프랑스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극복하려고 시도하고 있습니다.

 

11.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 출현』(1981): 『에코토피아의 출현』은 구조상으로 그리고 그 의향에 있어서 1975년에 발표된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를 보완하는 작품입니다. 작가는 무엇보다도 미국 사회에 만연한 “생태계의 파괴 현상, 온갖 화학제품의 남용으로 인한 암癌 증가 현상, 권력자와 재벌 사이의 암묵적인 부정부패 그리고 자동차 문화 등으로 인한 자원의 낭비” 등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에코토피아』가 1999년에 미국 서부 지역에서 새롭게 건립된 생태 국가의 구도를 정태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면, 『에코토피아 출현』은 1980년까지 생태 국가, 에코토피아가 어떻게 건립될 수 있었는가? 하는 과정을 역동적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12.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기타 (1986): 작품은 여성의 삶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가부장 체제, 여성을 출산 도구로 이해하는 국가의 인구 정책, 여성 학대와 남성주의의 폭력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가는 핵전쟁과 이로 인한 인간 삶의 파멸 현상에 관해서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작품 속에 등장하는 길리어드 공화국에서는 사회적 과업의 수행에 있어서 여성들이 철저히 배제되어 있습니다. 만약 의학적, 사회적 그리고 예술적 차원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철저하게 배제되면, 어떠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하는가를 작가는 암시합니다. 나아가 본 장의 말미에는 브래드버리의 『화씨 451도』가 약술되고 있습니다.

 

13. 크리스타 볼프의 『원전 사고』(1987): 동독 출신의 작가, 크리스타 볼프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에 자극을 받고 소설을 집필하였습니다. 원전 사고는 주인공 “나”의 남동생의 뇌수술과 평행으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작품 내에서 세 가지 사항을 비판합니다. 1. 파괴 충동 비판: 인간의 뇌, 특히 좌측 뇌가 신속하게 발전된 근본적인 배경에는 같은 종족과 싸우고 열등한 인간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2. 언어 비판: 언어는 인간의 의식을 개방시켜주지만, 다른 한편 터득하고 의식한 내용을 다시금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히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3. 맹목적 자연과학자들에 대한 비판: 자연 과학자들은 본능적으로 기술의 발전과 개발을 집요하게 추구합니다.

 

14. 노이만의 유토피아,『레본나』(1986): 사회학자인 발터 G. 노이만의 유토피아 소설, 『레본나. 2020년의 사랑과 사회Revonnah. Liebe und Gesellschaft im Jahre 2020』는 114페이지에 해당하는 짤막한 작품으로서 1986년 하노버에서 간행되었습니다. 제목에서 암시되고 있듯이 노이만이 묘사하고 있는 “레본나”라는 가상적인 사회는 하노버Hannover를 거꾸로 쓴 가상적 지명으로서, 무엇보다도 사회적 차원에서 그리고 심리적 차원에서 두 가지 사항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자본주의를 극복한 사회주의의 경제적 삶을 가리키며, 다른 하나는 시민 사회의 가족제도가 파기된 새로운 사랑의 삶을 지칭합니다.

 

15. 피어시의 『그, 그미 그리고 그것』(1993): 피어시의 소설은 미래의 사이버 현실에 관한 사항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이른바 “컴퓨토피아”의 특성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왜냐면 작품 속에는 이른바 신화적 새로운 세계의 질서가 신화적 관점에서 재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품은 기계가 인간의 육체를 부분적으로 보조하거나, 인간의 육체를 대신할 수 있음을 지적하고, 사이보그와 해방된 여성이 미래 사회의 발전과 평화에 궁극적으로 이바지하리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16. 나오는 말: 생태 공동체와 대아 유토피아: 마지막 장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을 요약 정리한 것입니다.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우리의 삶과 의식을 훼손시키는 자본주의의 가시적 비가시적인 폭력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를 해결할 방안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 방안은 협동을 통한 “노동조합 Labour Union” 운동을 활성화하는 일이고, 두 번째 방안은 생태 공동체의 운동을 전개해나가는 일입니다. 이로써 인간은 “양날의 칼에 해당하는” 과학 기술에 더 이상 모든 것을 의존하지 말고, 생명체의 상생과 평화를 위한 삶의 방식 내지는 이를 선취하는 예술 활동을 병행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일방적 시각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인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현대인은 합리성을 바탕으로 자연과학과 기술을 발전시켜 왔으나, 생태계 파괴 그리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특히 코로나 19의 여파로 인하여 생태적 문제점 그리고 인간 사이의 제반 갈등이 얼마나 현대인의 육체적 정신적 건강과 결착되어 있는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평화와 상생과 결부된 사회적 삶의 틀을 마련하고, 이와 관련되는 새로운 윤리 내지는 예술적 성향을 재정립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입니다. 필자는 하나의 생태 공동체 운동을 통해서 이러한 문제의 해결 가능성을 찾으려고 합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생태 공동체가 반드시 아나키즘에 근거한, 기존의 폐쇄적 단체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질 이후의 시대에 생태 의식을 실천하려는 인간이 사회적으로 참여하는 그룹 내지는 단체라고 광의적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핵가족은 아니지만, 대가족 공동체 내지는 종교적인 신앙 공동체도 얼마든지 차제에 하나의 튼실한 생태 공동체로 발전될 수도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새로운 사고일 것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서서히 성장한 실증주의의 단선적 사고를 연속적으로 비판해 나가야 합니다. 경쟁, 무한대의 이익추구, 엘리트주의, 자연파괴 현상 그리고 기술만능주의 등은 실증주의의 가시적인 사고 속에서 자라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협동, 절제, 평등 그리고 상생 등은 생태적 사고의 토대로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되찾아야 하는 것은 인문학 그리고 문학예술의 본원적인 기능일 것입니다. 필자는 20세기 중엽 이후로 출현한 문학 유토피아를 분석함으로써 무엇보다도 협동과 호혜, 근검절약과 절제, 남녀평등 그리고 상생과 나눔 등을 실천할 수 있는 생태적 삶의 가능성을 추적하려고 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의 관심은 반-학문적인 신정론 내지는 객관적 결정론 대신에, “역사 속에 도사린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Martin Buber)로 향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면 반계몽주의의 운명론이라든가 역사적 결정론은 “역사 속에 도사린 자유로운 결정을 위한 의지의 동기” 내지 사회적 삶의 변화 가능성을 처음부터 용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유토피아에 포함된, 변화를 위한 역동적 사고 내지는 개방성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로 생태 위기에 직면하여 새로운 인간형은 어떠한 방식으로 새로이 설정되어야 할까요?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인간형이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선입견을 제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입견이란 계급, 종교, 정당, 국적, 인종, 성, 나이 등에 입각한 구분과 차별을 가리킵니다. 언젠가 로버트 오언은 이러한 토박이 속물들을 한마디로 “편견으로 가득 찬 지역적 동물the localised animal of prejudice”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Robert Owen: The Book of the new moral world 1842, August M. Kelly publishers: New York, 1970.) 자고로 인간에 대한 인간의 구분 내지는 차별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바닥나기들의 편견과 무지에서 비롯된 선입견입니다. 무지와 편견은 결국 광기를 낳고, 광기는 낯선 새로움에 대한 부정적 아집을 부추기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역사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구분 내지는 차별이 주어진 현실의 고유한 가치라고 용인해 왔습니다. 가령 개인은 “나누어지지 않은 존재In-Dividuum”로 독립성을 지닌다고 하지만, 대부분 현대인은 여전히 고립되고 차단된 개체로서 소외되어 있습니다.

 

인간 동물은 진실로 사회적 존재로서 상호 영향을 끼치면서 살아갑니다. 육체의 건강은 혼자 힘으로 버틸 수 있지만, 영혼의 건강은 그렇지 않습니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하나의 바퀴 동에 모이듯이 (三十輻共一穀)”, 영혼 역시 상호적 사랑에 의해 지탱하는 바퀴살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물심양면의 상호적 도움은 -크로포트킨도 언급한 바 있듯이- 인간의 본성에 합당한 행위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존재는 사랑과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고는 자연과학 그리고 실증주의로는 명확하게 해명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DNA 속에는 한 인간의 모든 특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불교에서 말하듯이 “작은 먼지 속에는 온 우주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一微塵中含十方)“.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우리는 특정인에 대한 가시적인 구분과 차별이 근본적으로 지배와 억압의 의도에서 비롯되었음을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로운 구성체는 계급, 종교, 정당, 국적, 성별, 인종, 나이 등으로 나누고 구별하는 일련의 행동과 제도 등을 사전에 차단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남아 있는 과제는 다음과 같은 물음일 것입니다. 공동체라는 새로운 사회적 삶의 가능성 속에서 어떻게 새로운 인간 유형으로 자유와 평등을 실천하며, 올바른 인간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이러한 질문은 생태공동체에서 추구하는 두 가지 과업과 함께 제기되어야 할 물음입니다. 다시 말해 이윤이 아닌, 필요에 의한 생산과 절제된 소비가 첫 번째 과업이라면, 바람직한 생태 사회의 삶을 예술적으로 선취하려는 노력이야말로 두 번째 과업이리라고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양해와 감사의 말씀을 남기려고 합니다.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은 동양 사상 내지는 한국의 정신사적 관점을 부분적으로 반영하려 했습니다. 지금까지 노력했지만, 여전히 과문한 필자는 이를 무람없이 서술했을 뿐, 심층적으로 그리고 체계를 갖추어서 논의할 수 없었습니다. 나중에 후학들이 이 책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주기를 바랍니다. 모르긴 해도 나의 책에서는 하자가 드러날 것이니, 독자들의 비판과 질정을 부탁드립니다. 필자는 일일이 거명하지는 않으나, 집필에 도움을 주신, 국내외의 고마운 분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오랫동안 무심한 간서치(看書痴)를 아무런 핀잔 없이 대해준 식솔들 그리고 울력의 강동호 사장님에게 큰절 한 번 올립니다.

 

장산의 끝자락에서

필자 박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