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맨 처음 에른스트 블로흐를 처음으로 접한 때는 아마 74년이었습니다. 독재와 민주화의 기운이 태동하여 서로 부딪치던 시기에 어느 친구는 나에게 얇은 책자 한 권을 건네주었습니다. 그것은 박종화 교수님이 번역한 부광석 (브라이덴슈타인)의 인간화 (人間化)였습니다. 기억하건대 외국인의 눈으로 바라본 한국 사회의 분석 내지 신학적 견해 등이 씌어진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부록에는 놀랍게도 블로흐의 삶과 철학이 간략히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블로흐 철학은 당시에도 미개척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지식은 일천하였고, 당시에는 블로흐 사상의 중요성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2.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를 처음으로 읽기 시작한 때는 그후 십 년 뒤였습니다. 뮌헨 대 독문과 위르겐 샤르프슈베르트 교수님은 “에른스트 블로흐와 동독 문학”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는데, 나는 누구보다 먼저 수강 신청을 마쳤습니다. 세미나에 자극을 받아, 붉은 색으로 간행된 "자유와 질서" 주어캄프 문고판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독서는 여간 힘들고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나의 독일어 능력이 형편없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블로흐는 문체 면에 있어서 언제나 “신비로운 압축 문장”을 선호하고 있었습니다.
3.
1986년 여름 나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빌레펠트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습니다. 빌레펠트 대학은 학제적 연구를 무척 중시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헌학 외에도 사회 과학, 특히 역사철학의 영역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도저히 수업에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좌절감과 심리적 고통은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습니다. 블로흐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사람은 독문과 교수이자 학제 연구를 위한 연구소 소장이었던 빌헬름 포스캄프 교수님이었습니다. 지금도 나는 그분의 유익한 조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이 시기에 에른스트 블로흐의 책들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4.
80년대를 독일에서 보낸 뒤 89년에 대학에서 직장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해 말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습니다. 기존 사회주의 국가가 서서히 몰락하자, 전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이 실망감과 좌절을 겪었습니다. 만약 사회주의적 이상이 실제 현실과 일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면, 그들은 그렇게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현실 사회주의자들은 “목표를 망치는 것이 가장 나쁜 것이다 (Corruptio optimi pessima)”라는 정언적 진리를 등한시하였던 것입니다. 심지어 게오르크 루카치마저도 “그래도 결함을 지닌 사회주의가 낫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목표 대신에 과도기적 체제를 수정주의적으로 용인하지 않았던가요?
5.
만약 누군가 희망의 원리에서 사회주의 이념의 당면한 대안을 찾으려고 한다면, 그는 그것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블로흐 사상은 마치 거름과 같이 간접적으로 깊은 효력을 발휘할 뿐, 단기간에 특정한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당의정 알약이 아닙니다. 그러나 거름의 효능은 일회적이 아니며, 오래 지속됩니다. 비근한 예를 들어봅시다. 사람들은 고등 수학이 실생활에서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학 공부를 불필요하다고 단정합니다. 또한 영어만 배우면 족하다는 이유로 제 2외국어를 폐기 처분해도 좋다고 단정 짓곤 합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통계에만 의존하므로, 기초 인문학이 그리고 기초 자연 과학이 얼마나 커다란 잠재적 영향을 끼치는지를 피부로 절감하지 못합니다.
6.
그래, 블로흐의 철학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 오늘날 문제를 치유할 수 있는 치료제는 못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병의 원인 그리고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 내지 바람직한 목표 설정에 대해 엄청나게 커다란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앙리 르페브르를 제외한다면, 블로흐가 유일하게 예수의 혁명 사상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의 긍정적 운동을 접목시켰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블로흐의 희망 철학과 예술론을 모르고서는 발터 벤야민, 아도르노, 허버드 마르쿠제 등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으며, 자연법 철학, 르네상스 이후의 유토피아, 근대의 혁명 신학의 흐름 등을 논할 수 없을 것입니다.
7.
상기한 내용이 희망의 원리를 번역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로 작용하였습니다. 솔 출판사에서 제 4권 자유와 질서가 1993년에, 제 1권 더 나은 삶에 관한 꿈이 1995년에 간행된 바 있었습니다. 1996년에 안식년을 맞이하여 브레멘, 빌레펠트에 1년간 머물면서 공부했습니다. 그때 나는 블로흐의 아들, 얀 로베르트 블로흐 박사와 그리고 루드비히스하펜의 블로흐 문헌실에 계시는 바이간트 박사 등과 서신을 교환했습니다. 그러나 번역서는 안타깝게도 더 이상 간행될 수 없었습니다.
8.
약 3년의 공백 기간을 거친 뒤, 1999년에 다시 번역을 착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지난 4년간 꼬박 번역에 몰두하였습니다. 방학이 되면, 나는 노트북과 함께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이 시기에 아리스토텔레스 그리고 정약용 선생이 자주 떠올랐습니다. 수백 권의 책을 쓰다가 엉덩이가 문드러져, 꼿꼿이 선 채를 붓놀림을 했다던 다산 정약용. 식음을 거의 전폐하다시피 하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던 아리스토텔레스. 그들에 비하면 나의 고통은 사치스러운 엄살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다짐하곤 하였습니다. 이 와중에서 에른스트 블로흐 선집 "토마스 뮌처, 카를 마르크스 혹은 악마의 궁둥이"가 완성되기도 했습니다.
9.
한신대 이준모 교수님은 오래 전에 희망의 원리 영어 판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영어 판에는 오역이 많았고, 외래어 표기를 위해 조금 참조되었을 뿐입니다. 또한 희망의 원리는 프랑스어 판, 일본어판으로 간행되었다고 합니다. 제라르 롤레, 브룩하르트 슈미트 교수 등이 지적하건대 프랑스어 판에는 내용상 하자가 많다고 했습니다. 불어 능력이 형편없는 나로서는 이를 감히 평가할 수 없습니다. 2002년 6월, 드디어 블로흐의 번역이 완결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말이 완결이지, 그것은 초벌구이에 불과했습니다. 다시 들여 볼 때마다 용어 및 내용상의 문제점이 속출하는 게 아닌가요? 솔직히 말해서 교정을 보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걱정이 앞섭니다.
10.
블로흐 사상의 중요성을 다시 새삼스럽게 논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사항만 첨가하도록 합시다. 블로흐가 피력하는 방대한 학문적 내용들은 상호 주제상의 관련성을 지닙니다. 블로흐는 자유의 나라에 대한 마르크스의 유토피아를 지상의 천국에 관한 기독교적 유토피아와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합니다. 이는 연구 대상 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먼, 오로지 주제 중심적인 학문 접근 방법과 관계됩니다. 비근한 예로 남한에서 어느 학자가 정치 경제학의 내용을 신학의 내용과 관련시킨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는 세인의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남한에서는 학문적 영역이 제각기 나뉘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11.
그렇기 때문에 헤겔 전공자는 소크라테스 혹은 실러에 대해서 몰라도 되고, 신학자는 마르크스의 정치 경제학 혹은 사회학을 외면해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이로써 모든 학문 영역은 폐쇄적으로 변하고, 토론의 가능성은 사라지고 맙니다. 그러나 블로흐의 철학은 이러한 폐쇄성의 바리케이드를 일거에 무너뜨립니다. 만약 블로흐의 신학적 논의에서 우리가 신학 외적 문제를 깨닫거나, 철학적 논의에서 철학 외적인 중요 사항을 간파한다면, 우리는 블로흐 사상의 고유한 독창적 상호 연계성을 충분히 납득하게 될 것입니다.
12.
누가 말했던가요, “번역은 반역이다 (Traditio est trahitio)”라고?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을 지닌 분이라면, 누구나 학생들의 눈빛을 통해서 자신의 강의가 어떠했는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무언의 미소 내지 눈빛으로 강의에 대한 만족 여부를 표명합니다. 가령 철저하고도 힘든 준비 작업 뒤에 나타나는 명쾌한 강의는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습니다. 그러나 대충 준비한 다음의 힘들고 난해한 강의는 항상 뒤가 씁쓸하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들의 고개를 절레절레 젓게 만듭니다.
13.
번역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무심결에 옮기면, 번역자는 편할지 모르지만, 독자는 무슨 말인지 몰라 몹시 당황해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번역자가 원 작품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여 이를 쉽게 풀어쓰기란, 너무나 힘듭니다. 게다가 행 사이에는 (볼프강 이저가 말한) “빈 공간 (Leerstelle)”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다시 말해 이 세상에 완벽한 이해는 있을 수 없을지 모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는 말과 글이 존재하나, 이것들은 서로 다른 사상 감정을 연결시켜주고 그것을 재확인시켜주는 매개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공통의 견해를 표방할 수 있지만, 이 경우 그것은 전적으로 일치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염화시중의 미소는 사상 감정의 완전한 일치, 완전한 이해를 꿈꾸는 몇몇 사람들의 갈망에 대한 비유란 말일까요?
14.
약 십 년 동안 나는 태평양 한 모퉁이를 관통하여 헤엄치던 볼품없는 수영 선수였습니다. 물론 그 사이에 번역만 행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금술의 장을 번역할 때 나는 세상을 기독교적 황금으로 정화하려는 경건한 연금술사였으며, 콜럼버스의 장을 번역할 때 나는 애 타는 마음으로 바다 위의 앵무새 떼를 바라보는 집요한 항해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침내 어느 섬의 해안에서 물을 털고 육지를 대할 때의 감동이란. 그렇지만 아직 지구를 한 바퀴 돈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태평양을 헤엄쳤다는 것은 과장일지 모릅니다. 겨우 해협을 거쳐 하와이에도 도착하지 못한 애송이 주제에 감히 그런 말을 하다니. 그러나 수영은 본격적으로 시작입니다. 왜냐면 사상의 보석은 십여 권의 책 속에 여전히 감추어져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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