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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4)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4권 서문

필자 (匹子) 2024. 10. 27. 10:40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4

불워 리턴으로부터 무질까지 (19세기 말 - 20세기 전반부)

서문

 

“더 나은 무엇을 갈망하지 않는 인간은 가련하다” (Freud)

“희망을 포기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언제나 회의적 세계관을 지닌 실증주의자들이었다.” (Bloch)

“더 나은 미래를 떠올리는 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부자유의 질곡에 갇혀 있는 자이다.” (필자)

 

 

희망은 그냥 막연히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수동적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끔찍하고 참혹한 개인적 사회적 정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아 바로 “터득한 희망docta spes”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새로운 무엇”을 찾으려는 갈망은 절망과 반대되는 정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차제에 누려야 하는 자유와 평등의 구체적 가능성의 탐색”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낙관하지 않는 희망” (Terry Eagleton)과 연결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의 문헌에서 피상적으로 묘사되는 어떤 찬란한, 혹은 추악한 가상적 현실상이 아니라, 이러한 상의 배후에 도사린 작가의 시대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흐름을 논할 때 유토피아 사회상 내지 사회 유토피아를 설계한 개별 작가들이 처한 시대의 난제들 그리고 주어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주어진 현실 그리고 가상적으로 설계된 현실 사이의 차이를 살피게 되면, 우리는 개별 유토피아 작가들의 시대 비판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제 4권은 19세기 말부터 1940년의 시점까지의 시기에 출현한 문학 유토피아를 천착합니다. 이 시기의 유토피아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자고로 자본가가 부를 확장시키는 데 가장 안전한 방식은 토지와 부동산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토지와 부동산은 눈앞에 가시적으로 주어져 있으니, 매번 번거롭게 주판을 두드리며 계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모든 전쟁은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에 근거한 법 규정에 의해서 정당성을 획득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후반기부터 서서히 제 3세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영토 확장의 사업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열강들은 발전된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주물선점 (無主物先占)이라는 독점적 원칙을 무지막지하게 현실에 적용하였습니다.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가담한 프로이센은 열강들과의 마찰을 빚었는데, 발칸 반도의 갈등과 위기는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고 맙니다.

 

19세기말 이후의 유토피아는 모리스, 로시 그리고 길먼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고 경고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유토피아,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국가는 개개인들의 삶의 행복을 배후에서 돕고 지지하는 등 긍정적 기관으로 존속했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악한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리바이어던은 히브리어의 어원에 의하면 “빙글빙글 돈다.”는 뜻을 지니는데, 그 자체 회오리바람의 격랑으로 세파에 휩쓸린 생명체들을 모조리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는 괴물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국가는 자본주의의 경제 시스템과 야합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고 어지럽히며, 전체주의적 압박을 가하는 기관은 언제나 국가의 몫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경제 시스템은 거대한 국가를 결성하도록 작용했고, 결국에 이르러 세계대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 또한 국가 이기주의라는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특히 1917년에 출범한 소련을 고려해 보세요. 소련은 여러 가지 유형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자극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보그다노프의 화성 유토피아, 프리오브라센스키의 산업 유토피아, 차야노프의 농업에 기반을 둔 자생적 유토피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멘셰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숙청 그리고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의 횡포는 다른 인종에 대한 극한적 살인과 만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이전에 출현한 디스토피아 문학 속에 끔찍한 선례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19세기 말 이후의 문학 유토피아가 오로지 디스토피아의 유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종교적, 인종적 그리고 성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출현했는데, 이로 인한 갈등은 작가들로 하여금 다양한 유토피아를 창안하도록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운동은 수 세기 동안 진척되어 온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그리고 여성들의 여권신장을 위한 페미니즘 등입니다.

 

1. 불워 리턴의 『미래의 사람들』 (1871): 귀족 출신의 영국 작가, 에드워드 불워 리턴은 지하 세계에 거주하는 기이한 인종에 관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미래의 에너지 문제를 거론한다는 점에서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서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미래의 사람들』은 정치적으로 수구적 보수주의의 관점에 입각해 있습니다. 작가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미래 사회의 폐해를 지적합니다. 물론 작품에서 언급되는 “브릴-야” 에너지는 핵에너지를 암시합니다. 모든 이야기는 불워-리턴의 탁월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출현한 것이지만, 전체적으로 고찰할 때 역사적 진보 내지 과학 기술에 대한 일목요연하지 못한, 때로는 부정적 시각 때문에 과학 기술과 진보에 관한 혼란스러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2. 버틀러의 『에레혼』 (1872): 제목『에레혼Erewhon』은 “없는 곳 nowhere”의 음절을 인위적으로 뒤바꾸어 표현한 것입니다. 버틀러는 기계 그리고 기계적 질서에 의해 영위되는 사회를 강렬한 어조로 비난합니다. 작품 속에서 에레혼은 가상적인 세상이지만, 마치 남태평양의 뉴질랜드의 섬을 방불케 합니다. 버틀러의 작품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서 일찍이 출현한 디스토피아의 선구적 위치를 점하는 문헌으로서, 과학 기술 및 기계의 사용을 원천적으로 차단시키고 있습니다. 아울러 작가는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문제로서, 불필요하고 비능률적인 교육 제도 내지 부패한 교회 체제 등을 신랄하게 비아냥거렸습니다.

 

3. 벨러미의 『뒤를 돌아보면서』 (1888): 벨러미의 작품은 미국 시민 사회의 중앙집권적 문학 유토피아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미래 사회의 산업 국가는 무엇보다도 사유재산과 화폐의 철폐를 기치로 삼습니다. 놀라운 것은 벨러미가 미국 사회를 마치 거대한 중앙집권적인 군대 조직으로써 부의 불평등을 해결하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벨러미는 특히 사회적 분배를 중시하면서, 누구보다도 먼저 노인 복지의 정책을 실제 삶에 도입하려고 했습니다. 본 장은 벨러미가 설계한 미래의 미국 사회, 신용 채권과 전화기의 발명, 조기 결혼을 통한 행복 추구 등을 차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4. 헤르츠카의 제 3의 유토피아 (1889): 테오도르 헤르츠카의 소설 『자유의 나라』 (1889)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제 3의 유토피아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헤르츠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의 장단점을 절충하여 국민경제학의 토대 하에서 실험 가능하다고 진단하였습니다. 헤르츠카의 『자유의 나라』는 문학 유토피아를 통해서 실현 가능한 대안 (생산력의 극대화, 생산과 소비 사이의 불균형의 극복, 토지 공개념의 도입, 분업의 극복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취약점은 파시즘을 경시한 낙관주의의 맹신, 재벌과 관료주의의 폐해, 입법 기관으로서의 국회 무시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5. 모리스의 『유토피아 뉴스』 (1890): 모리스의 작품에 묘사된 실용적 사회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상당히 많은 논란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모리스 이전에는 21세기 생태 공동체의 모델을 제시한 유토피아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리스는 중세의 단아한 수공업 내지 수공 예술을 통한 즐거운 노동을 강조하면서, 미래 런던에서의 행복한 사회적 삶을 설계하였습니다. 이러한 설계의 배후에는 환경을 더럽히는 거대한 자본주의 체제의 산업 구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모리스의 유토피아는 중세 시골의 사회주의 이상으로 다루어져 있지만, 유형적으로는 비-국가주의의 모델을 표방합니다. 왜냐하면 국가의 거대한 산업 시스템은 개개인의 노동을 소외시키고 자연을 황폐화시키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6. 로시의 실증적 아나키즘 공동체 (1894): 로시의 유토피아는 “비국가주의 유토피아”의 전형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이전에 프랑스에서 활동한 조셉 데자크의 위마니스페르 공동체와 비슷하나, 현실적 실현 가능성과 실용적 변용 가능성을 처음부터 강조합니다. 로시의 코뮌은 샤를 푸리에의 경우처럼 어떤 사변적으로 숙고한 추상적 상이 아니라, 이탈리아 그리고 브라질 등의 실제 현실에서 실험적으로 도출해낸 유토피아라는 점에서 아나키즘 공동체의 실천 가능성 그리고 구체적이고 당면한 문제점 등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이러한 사항들은 21세기에 나타난 생태 공동체 운동 속에서의 갈등과 문제점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7. 헤르츨의 시오니즘의 유토피아 (1900): 헤르츨은 무엇보다도 시오니즘을 실천하기 위하여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정책을 집요하게 추구하였습니다. 『오래된 새로운 나라Altneuland』는 문학 유토피아에 국한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실현 가능한 정책을 무엇보다도 중시합니다. 작품에는 유대주의의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헤르츨은 라틴아메리카에서의 유대인 공동체의 설립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근거한 유대 상인 내지 법률가의 이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헤르츨은 『유대 국가』에서 시오니즘의 실천 가능성을 문학적으로 선취하는데, 이는 나중에 이스라엘의 키부츠 운동의 출발점으로 활용되었습니다.

 

8. 웰스의 소설,『모던 유토피아』 (1905): 웰스는 20세기 초반의 세기말의 절망적 분위기 내지 전쟁 위기 등을 감지하고 이를 문학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웰스의 일련의 작품들이 국가 이기주의 내지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극복하면서, 하나의 가상적 세계 국가를 선취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본 장은 그의 작품 가운데『모던 유토피아』를 분석하면서, 세계 국가의 장점 (중앙집권적 행정 체제, 생산력 증대, 공정한 분배와 과학 기술의 극대화 정책) 그리고 단점 (무소불위의 권력 국가, 젊은 사무라이 집단으로 지칭되는 엘리트 관료주의) 등을 역사적 비판적 시각에서 고찰하였습니다.

9. 웰스의 타임 머신 기타 (1905): 웰스는 수많은 작품 속에서 가상적인 미래 사회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다양하게 설계하였습니다. 본 장은 앞의 장 “웰스의 소설,『모던 유토피아』“를 보완하기 위해서 추가로 덧붙인 것입니다. 작가는 미래 국가의 특성을 기발한 상상력을 동원하여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 장은 주로 웰스의 「타임머신」, 「잠자는 자가 깨어난다면」등의 작품을 해설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필자는 국가의 권한과 법적 영향력의 제한 가능성 그리고 20세기 유럽의 문학에서 드러나는 특징과 취약점 등을 차례로 구명해 보았습니다.

 

10. 보그다노프의 화성 유토피아 (1907/1912):「붉은 혹성」 그리고 「기술자 메니」 등의 작품은 소련 혁명이 발발하기 전에 간행된 것입니다. 작가는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화성에서 건립되는 이상 사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보그다노프는 공동체의 문화로서 개인의 자기 권리, 자기 결정권이 국가에 의해서 파기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무엇보다도 사회에 대한 개인의 자발적 기여와, 개인에 대한 사회적 이득의 환원을 강조하였습니다. 필자는 보그다노프의 화성 유토피아의 사회적 체제의 특성 등을 구명하고, 이와 결부된 러시아 사회의 당면한 문제점을 부수적으로 구명하려 하였습니다.

 

11. 길먼의 여성주의 유토피아 (1915): 여성주의 유토피아는 19세기 말 이전에는 드물게 출현하였습니다. 길먼의 작품 『여자들만의 나라Herland』는 아마존 여성 공동체가 추구하던 전투, 경쟁 등을 지양하고, 여성들의 평화, 협동 그리고 공존을 추구하는, 낙관적인 여성 사회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로써 길먼은 20세기 이후에 출현하는, 생태주의에 근거하는 여성 평화 운동의 유토피아의 교두보를 마련한 셈입니다. 작품은 여성다움에 관한 편견에 관하여 자세히 언급합니다. “여성다움”은 길먼에 의하면 여성으로 하여금 숙명적인 생활 방식을 이어가게 만든다고 합니다. 본 장은 여성 차별, 여성 억압 교육 등을 추적하면서 여자의 나라에 관한 시스템을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12. 프리오브라센스키의 산업 유토피아, 차야노프의 농업 유토피아 (1921): 프리오브라센스키는 전체적으로는 산업의 발전을 추구하는 소련의 정책에 동의하지만, 특히 전쟁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 위주의 정책 추구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소련 사회는 전쟁 산업을 포기하는 대신에, 경공업과 같은 러시아 인민을 위하여 다양한 산업 경제의 도입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한편 차야노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소련의 경제적 토대가 농업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이에 상응하는 자생적 농촌 경제의 발전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사실 러시아의 농업 중심의 사회 구조는 마르크스주의 경제 분석만으로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소련의 대부분의 지역이 자생적 농업 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13. (요약)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대아 유토피아: 이 장은 지금까지의 사회 유토피아의 특성과 한계를 요약하고, 유토피아 개념 그리고 주어진 현실적 정황을 전제로 하는 유토피아의 기능적 문제 등에 관하여 논의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디스토피아 문학이 20세기 이후에 활발하게 출현한 배경과 이유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드러나는 “개인 In-Dividuum”의 기능의 취약점 내지 하자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고 있습니다. 본고는 국가의 폭력, 21세기 생태계 문제 그리고 인구증가 현상 등을 고려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서로 아우르며 협동하는 대아 (大我) 유토피아의 의미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14. 자먀찐의 디스토피아 『우리들』(1921): 『우리들』은 디스토피아 문학의 서구적 위치를 점하는 작품입니다. 자먀찐의 『우리들』은 개개인의 행복을 억압하는 “유일 국가”의 정치경제적 시스템을 설계하였습니다. 유일 국가에서는 개인의 존재 가치는 말살되고, 개개인은 자신의 고유한 이름조차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두 개의 대립되는 요소 사이의 상관관계를 추적합니다. 그 하나는 엔트로피로 요약되는 강요된 행복을 요구하는 시스템과 관련되며, 다른 하나는 새로운 동력으로 이해되는 사회적 변화를 도모하는 에너지와 관련됩니다. 이로써 엔트로피 그리고 에너지의 영원한 충돌은 변증법적 차원에서 이해되는데, 레오 트로츠키Leo Trotzki의 영구 혁명론을 연상시킵니다.

 

15.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1932): 헉슬리의 작품은 독재자 그리고 과학 기술이 동시에 저지르는 끔찍한 만행을 여지없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기술의 발전에 근거한 물질문명은 사람들로 하여금 인간성, 행복과 사랑 등을 향유할 수 없도록 기능하고 있습니다. 본 장은 미래의 전체주의의 국가 체제 그리고 인간 삶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과학 기술 등을 통해서 헉슬리가 개진한 인류 문화의 비극적 특징과 부정적 영향력 등을 밝히고 있습니다. 뒤이어 대작 『특성 없는 남자』에 나타난 유토피아의 특성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로베르트 무질은 어떠한 외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는 자율적 인간의 갈망 속에 도사린 가능성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19세기부터 유럽인들은 더 나은 삶에 관해서 더 이상 열광적으로 갈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강하게 작용한 것은 경제력의 상승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어쩌면 망각의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찬란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체제안주적인 태도를 취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간에- 항상 실증주의자들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참되다고 믿는 자들은 처음부터 어떤 비가시적인 사항을 무시합니다. 이들에게는 눈앞의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며,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변화과정은 하나의 허상으로 이해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증주의자들은 비가시적이고 통시대적인 변증법 그리고 이와 결부된 학문적 형이상학을 처음부터 폄하하고, 오로지 인성과 자율적 삶에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합니다. (Ernst Bloch: Das Materialismusproblem. seine Geschichte und Substanz, Frankfurt a. M. 1985, S. 467.) 이 점에 있어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표방한 논리 실증주의는 놀랍게도 디오게네스Diogenes의 학문적 회의주의와 절묘하게 결착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오늘날 대부분 자연 과학자들의 세계관과 접목되어, 인문 사회과학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요약하건대 눈앞의 현상에만 집착하는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더 나은 삶에 관한 인간의 꿈은 그야말로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처럼 허황되고 뜬금없는 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5부작 가운데 제 4권은 특히 1900년 전후에 출현한 일련의 디스토피아의 문학을 천착한다는 점에서 많은 교훈을 전해줍니다. 막강한 국가의 폭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그리고 세계대전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삶에 여전히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네 가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70년 이상 지속되는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사의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피맺힌 결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넘어서, 그 자체 사상사적으로 동서양의 이원론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냉엄한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독점 자본주의 생산 양식과 직결되는 현실적 상황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전락하여 미래의 삶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셋째로 개개인의 삶을 옥죄이는 국가 기관의 횡포의 예는 한반도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권력 기관의 핍박으로 인하여 힘없는 개인의 생존권과 인권이 끊임없이 침탈당해온 것을 고려해보세요. 넷째로 일제 강점기에서 나타난 경제적 수탈과 민족에 대한 배반 등은 역사적으로 청산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계층 사이의 불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불신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네 가지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J, “예언자는 고향에 머물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Propheta non valet in patria sua)”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면 지식인은 자신의 과업을 더욱 분명하게 인지한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예컨대 하나의 난제는 그것이 출현한 장소의 외부에서 더욱 명료하고도 객관적으로 인지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당면한 사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경우, 우리는 우회적 자세를 취하면서,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주어진 난제와 유사한 범례를 탐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4권은, 비록 간접적이겠지만, 어떤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본서가 정신사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기를 바라면서.

 

장산의 끝자락에서

필자 박설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