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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설호: (2)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2권 서문

필자 (匹子) 2024. 10. 19. 10:15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 2권. 캄파넬라에서 디드로까지 (르네상스 시기 - 프랑스 혁명 전후)

 

“여러 유형의 유토피아는 대개 시기상조의 진리이다.” (Lamartine)

“역사는 감금된 예언이다.” (Carlyle)

 

시기상조의 진리 - 힘든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애타는 갈망 속에는 마치 수정 (水晶)처럼 결정되어 있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결핍된 무엇입니다. “지금 그리고 여기hic et nunc”에 결핍된 무엇을 갈구하는 인간은 언젠가는 그것이 충족되기를 갈망합니다. 주어진 삶이 쓰라린 고통을 안겨준다면, 유토피아는 어쩌면 -시인, 페터 후헬Peter Huchel의 표현을 빌면- “얼어붙은 강이 갈대의 목을 통해서” 숨을 쉬는 생명의 연장과 같습니다. (Peter Huchel: Werke Bd. 1, Frankfurt a. M. 1984, 154). 그렇기에 시기상조의 진리는 역사적 사실의 맥락에서 파악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칼라일이 말한 대로 감금된 예언으로 가득 찬 무엇입니다. 가령 역사적 사실 속에는 어떤 교훈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습니다. 특정한 교훈은 주어진 당대에서 미처 인식되거나 실현되지 못하고, 대체로 미래로 향해서 연기되기 마련입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어떤 갈망은 “지금 그리고 여기”라는 주어진 여건 속에서 차단되고 제한되지만, 후세 사람들은 역사 속에 드러난 어떤 패배의 교훈이 미래로 이전되는 것을 예리하게 간파합니다. 피맺힌 역사를 통찰하고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자는 틀림없이 과거 사람들의 내적인 갈망의 상 그리고 도래할 미래의 삶과의 연관성 등을 도출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 2권의 배경은 르네상스 이후의 시대부터 절대주의 왕정의 시대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16세기에 이르러 신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에 대한 가치 그리고 이에 대한 의식이 태동하게 되었습니다. 현세의 삶의 중요성이 부각되자, 사람들은 권력과 종교 사이의 어떤 정치적 유착관계를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서서히 상업이 활성화되자,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이 주어진 현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때부터 중세의 라티푼디움의 경제 구도가 파기되었으며, 거대한 국가의 토대가 정착되기 시작했습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는 절대 왕정 체제의 기반이 다져졌는데, 이와 병행하여 사회의 저변에서 영향을 끼친 것은 경제적 생산양식이었습니다. 물론 절대 왕정 체제는 종교적 권력을 약화시키고, 대도시의 융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서 일시적으로 진보의 과정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르네상스 이후의 시기 유럽 내에서의 사회적 갈등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습니다, 귀족과 사제 계급은 놀고먹으면서 과거와 다름 없이 일반 서민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였던 것입니다. 권력의 가렴주구와 병행하여 대지주들은 소작농들에게 크고 작은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참담한 현상은 토머스 모어 이후에 나타난 고전적 유토피아의 배경으로 작용합니다. 캄파넬라 그리고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전적 유토피아에서는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만인의 노동으로 규범화되어 있으며, 근검절약과 절제의 삶이 하나의 미덕으로 확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만인의 4시간 내지 6시간 노동의 규칙은 특권층의 기득권 그리고 빈부 차이를 없애려는 그들의 열망과 직결됩니다. 이로써 출현하는 것은 괴팅겐 출신의 철학자, 니콜라이 하르트만Nicolai Hartmann이 지적한 바 있듯이 기독교적 이웃 사랑 대신에 “먼 곳의 사랑Fernstenliebe”, 그리고 “다른 세상에서 전해지는 미덕”이라는 가치였습니다. (Nicolai Hartmann: Ethik, De Gruyter: Berlin, 1962, 491) 시기상조로서의 진리가 시간적 차이를 전제로 한다면, 먼 곳의 사랑은 공간적 거리감을 의식하게 해줍니다. 16세기의 유토피아는 주로 지구상의 멀리 떨어진 공간을 하나의 국가 체제로 설정하고 있는데, 이는 고대의 축복의 섬에 대한 갈망과 관련됩니다. 이 시기에는 드물게 비국가주의의 유토피아 또한 출현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라블레의 「텔렘 사원」이 있습니다.

 

16세기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고결한 야생Bon-Sauvage”에 대한 기대감이 유럽 전역에 확산되었습니다. “고결한 야생”이라는 표현은 알론소 에르시아 이 수니가Alonso de Ercilla y Zúñiga의 서사시 「아로카나La Araucana」(1569)에서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미구엘 세르반테스는 언젠가 이 작품을 카스티야 언어로 집필된 세 편의 명작 가운데 한편이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바로 여기서 장소 유토피아의 모델이 다시 한 번 서술되고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러한 문화사적인 변화의 과정에서도 다양한 유토피아의 양상들이 지속적으로 출현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 왕정 시대의 유토피아가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유토피아와 완전히 구별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유토피아의 현실적 배경은 지구 반대편, 혹은 달나라와 같은 우주의 머나먼 곳으로 이전되어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찬란한 사회상은 절대 왕정의 폭력을 벗어나고 싶은 심리적 욕구를 반영한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절대주의의 서슬 푸른 권력의 칼날 앞에서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폭군 처형에 대한 의향을 감히 발설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계몽주의 지식인들은 권력에 대한 저돌적인 저항 대신에 종교적 독단 내지 편협성을 비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권력의 토대를 보좌하는 사회적 세력이 사제 계급이었고, 종교적 관용을 고취시키는 노력 자체가 보수주의의 사제 세력을 점차적으로 약화시키리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18세기에 이르면 모어 이후에 나타난 장소 유토피아는 패러다임에 있어서 시간 유토피아로 의미 변환을 이룹니다. 찬란한 사회적 삶은 멀리 떨어진 장소를 배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미래의 바로 이곳”에서 능동적으로 건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계몽에 대한 “시민 주체Citoyen”의 의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중세에 인정받던 “정태적 완전성perfectio”의 개념은 계몽의 시대에 “역동적 완전성 perfectibilité”의 개념으로 변화되었습니다.

 

1. 모어 이후의 르네상스 유토피아: 이 장에서는 토머스 모어 이후에 나타난 몇몇 유토피아 문헌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컨대 에벌린이 설계한 미지의 섬 『불파리아』, 슈티블린의 『행복 공화국』 그리고 도니의 『이성적인 세계』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에벌린과 슈티블린은 기독교에 입각한 중농주의 사회를 설계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의 아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도니의 작품은 명시적으로 사유재산제도와 결혼제도를 철폐하고 있습니다. 이 점에 있어서 『이성적인 세계』는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에 나타난 유토피아 구상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2. 라블레의 텔렘 사원의 유토피아 (1551): 텔렘 사원은 프랑스 인문주의자, 프랑스와 라블레의 대작 『가르강튀아』 제 2권에 소개되어 있습니다. 라블레가 설계한 텔렘 사원은 노예 경제에 근거하는 이상적 소규모 공동체이지만, 사원의 사람들은 모두가 풍요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들의 삶의 방식은 “네가 원하는 바대로 행하라Fay ce que vouldras”입니다. 이로써 가난, 순결 그리고 복종이라는 수사의 삶은 지양되고, 사원 사람들은 풍요로움, 자유 그리고 자유 의지를 실천하며 생활합니다. 라블레의 텔렘 사원은 노예 경제에 바탕을 둔, 르네상스의 비국가주의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안드레애의 『기독교 도시 국가』(1619): 안드레애는 자신의 책에서 왕궁, 교회 그리고 대학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단체들은 질투, 탐욕, 인색함, 나태함 등과 같은 온갖 악덕의 온상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안드레애는 법정의 횡포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문제는 마치 장발장처럼, 빵을 훔쳐 먹는 평민에게 사형이라는 극형이 처해진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비록 종교적 관용이 용납되지 않고, 남존여비의 특징이 도사리고 있지만, 안드레애의 기독교 도시 국가는 루터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이상을 얼마든지 실현 가능한 유토피아로 설계하고 있습니다.

 

4.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 완벽한 국가주의의 질서 유토피아, 『태양의 나라』에서 사람들은 하루 네 시간 일하며 생활합니다. 하루 일과는 점성술에 의해 빈틈없이 짜여 있습니다. 사유재산은 용납되지 않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고문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체주의의 의혹이 없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세 가지 악덕인 나태, 자만, 이기심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노예제도, 가족 제도가 철폐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대신에 사형제도도 존속되고 있는데, 형이 집행되는 경우는 거의 드뭅니다.

 

5. 프랜시스 베이컨의 기술 유토피아 (1627): 베이컨의 작품 『노붐 오르가논』그리고 『새로운 아틀란티스』는 국가주의 시스템에다 과학 기술의 특성을 강하게 부각시킨 문헌들입니다. 베이컨은 궁핍함, 빈부차이, 과도한 세금 그리고 사회적 방종 등을 숙고하면서, 하나의 대안으로서 과학 기술에 근거하는 유토피아 사회를 설계하고 있습니다. 베이컨의 사회는 일부일처제의 가족 제도가 존속됩니다. 특히 놀라운 것은 학문 연마의 솔로몬 연구소가 가동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베이컨은 과학 기술을 발전시킴으로써 인간의 지상의 행복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6. (요약) 계몽주의, 라이프니츠의「우토피카 섬에 관하여」(1688): 이 장은 계몽주의 사상과 유토피아 사이의 상관관계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이신론, 범신론 그리고 기계적 유물론 속에 도사린 혁명적 특성이 차례대로 서술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사상에서 사회계약론 그리고 평등 사회에 관한 갈망의 사상적 단초를 읽을 수 있습니다. 이로써 계몽주의는 시민 주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데, 이 시기의 유토피아들은 시민 주체의 역동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뒤이어 언급되는 것은 라이프니츠의 잘 알려지지 않은 문헌 「우토피카 섬에 관하여De insula Utopica」(1688)입니다. 여기서 라이프니츠는 평등사상 그리고 학문과 기술이 중시되는 사고가 다루어져 있습니다.

 

7.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1652): 윈스탠리의 『자유의 법』은 주어진 현실의 직접적인 개혁을 강하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르네상스 유토피아에서 나타나는 정태적 특성과 차별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윈스탠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 구체적으로 말해 17세기 영국 현실의 변화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여기서는 초기 자본주의 경제적 생산 양식에서 필연적으로 출현하는 빈부차이가 비판의 도마 위에 오르고 있습니다. 『자유의 법』은 소작농 보호를 위한 단위 조합 운동, 부동산의 공유화 정책, 권력의 분산 등을 중요한 관건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8. 베라스의 세바랑비 유토피아 (1675): 베라스가 설계한 유토피아는 무엇보다도 가난과 폭정의 대안으로 설계된 것입니다. 군주제와 민주제가 혼합된 국가, 세바랑비에서는 만인이 공동으로 일하고, 재화를 공동으로 분배합니다. 그들은 사유재산을 떨치고 공유제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실천되는 것은 세 가지 자연법적인 권리입니다. 그것은 자기 보존의 권리, 행복 추구의 권리 그리고 종족 보존의 권리를 가리킵니다. 베라스의 유토피아는 고전적 유토피아와 17세기 후반부의 자연법사상의 유토피아의 특성이 기묘하게 혼합되어 있습니다.

 

9. 푸아니의 양성구유의 아나키즘 유토피아 (1676): 푸아니의 『자크 사뒤르의 모험』은 새로운 거대한 대륙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남쪽 대륙이 오스트레일리아와 일치된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남녀추니들입니다. 다시 말해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개의 성을 한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남녀 차이와 남녀 구별로 인한 제약이나 고통을 느끼지 않은 채 평등하게 살아갑니다. 푸아니의 작품은 종교의 권위 그리고 국가의 체제가 얼마나 개개인의 삶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지를 지적하였습니다.

 

10. 퐁트넬의 무신론의 유토피아 (1682): 퐁트넬의 『아자오 섬 이야기』는 절대 왕정과 패륜을 비판하기 위해서 떠올린 이상적인 공화국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치열하고도 섬뜩한 주제로 인하여 작품은 오랫동안 퐁트넬의 서랍 속에 묵혀 있어야 했습니다. 아자오 섬의 인민들은 종교가 아니라, 자연의 원칙에 입각하여 이성적인 판단을 도출해내면서 살아갑니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식도, 사원도 자이하지 않습니다. 사제계급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자로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퐁트넬이 전근대적인 일부다처에 근거한 남존여비의 삶을 서술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1. 페늘롱의 유토피아, 베타케 그리고 살렌타인 (1699): 페늘롱의 소설 『텔레마크의 모험』은 왕족의 교육서로 집필되었습니다. 여기에는 놀랍게도 두 가지의 유토피아 모델이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베타케”로서 태고 시절의 원시 공산주의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면, 다른 하나는 “살렌타인”으로서 사회적 체제 내지 제도적 장치를 지닌 유토피아 모델을 가리킵니다. 전자는 아무런 법 규정이 필요 없는 무위의 아르카디아의 사회이며, 후자는 이와는 다른 체제와 법령을 갖춘 근대 사회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로써 페늘롱이 비판하려고 한 것은 당시의 절대 왕정 그리고 사유재산제도였습니다.

 

12. 라옹탕의 고결한 야생의 유토피아 (1703): 라옹탕의 여행기는 고결한 야생의 삶이 어떻게 유럽의 계층 사회와 다른가를 시사해줍니다. 라옹탕은 자신의 고유한 경험을 바탕으로 고결한 야생의 생활을 서술하였습니다. 그의 문헌은 국가의 폭력, 사유재산제도의 취약점, 권력자 그리고 사제계급의 가렴주구 등을 은근히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라옹탕의 유토피아는 비국가주의의 모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가령 인디언 휴런 부족의 삶은 국가주의 대신에 자연 법칙에 의거하여 사회생활 그리고 성 생활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13. 슈나벨의 『펠젠부르크 섬』(1731): 슈나벨은 찬란한 공동적인 삶을 꿈꾸는 계몽주의 유토피아를 묘파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를 숭상하는 선한 사람들은 펠젠부르크의 섬에서 자유와 평등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없으며, 선량한 사람들만이 이곳에서 정착할 수 있습니다. 농업 중심의 경제 체제 그리고 가부장주의의 일부일처제가 특징적입니다. 슈나벨은 유토피아 사회의 정태적인 구도를 서술할 뿐 아니라, 펠젠부르크 유토피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구체적으로 묘파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강조되는 것은 시민주체의 자유로운 삶인데, 이는 유럽 사회의 탐욕과 투쟁 그리고 살인과는 대비되는 유토피아 사회입니다.

 

14. 모렐리의 『자연 법전』(1755): 자연법전은 “사회주의 사상을 선취하는 평등한 이상국가의 상”으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모렐리는 공유물의 분배를 강조하였으며, 이윤 추구를 위한 상업을 금지하였습니다. 지배 권력의 횡포는 모렐리의 국가주의 유토피아에서는 처음부터 차단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모든 권력은 분산되어야 하며, 정치 제도 역시 처음부터 연방제로 정착되어야 한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평등 국가는 가족제도에 있어서 가부장주의를 우선적으로 간주하되, 결혼 제도는 유연하게 실행해 나가는 게 바람직하다고 모렐리는 주장합니다.

 

15. 디드로의 「부갱빌 여행기 보유」(1769): 디드로는 부갱빌 여행기를 바탕으로 타히티의 섬의 사회 체제와 유럽의 사회의 그것을 일차적으로 비교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유럽의 정복 이데올로기, 강제적 성윤리 그리고 자연에 위배되는 기독교 중심주의가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와 병행하여 타히티 섬의 자연친화적인 삶, 자유로운 성 생활 그리고 평등한 사회 구도가 언급됩니다. 디드로의 문헌은 유럽인과 타히티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을 어떤 이상적 인간형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부갱빌 여행기 보유」는 자본주의 이전에 출현한, 강대국의 식민지 쟁탈이라는 횡포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프란츠 파농의 반식민주의 저항의식을 선취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말씀 전합니다. 도서의 출판은 나에겐 두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첫째로 필자는 한편으로는 저역서 발간을 통해서 고마운 분들에게 보은(報恩)하고 싶습니다. 빌헬름 포스캄프 교수님Prof. Dr. Wilhelm Vosskamp 그리고 고(故) 헬무트 푀르스 박사님Dr. Helmut Förs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그밖에 많은 분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군요. 그분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둘째로 필자는 저역서의 발간으로 미지의 독자들에게 봉사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지식 전수를 의도하지는 않습니다.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듯이, 독자들이 책의 잘못된 부분을 발견하고 그 내용을 더욱 발전시키기를 바랄 뿐입니다. 

 

안산의 우거에서

필자 박설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