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나의 시

박설호의 시, '아린 아리랑'

필자 (匹子) 2024. 9. 4. 10:43

 

아린 아리랑

박설호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한평생 쓰라리가 났네 *

 

왕년엔 고명딸 꽃보다 예쁜

봉긋한 젖가슴 나의 벗님들

아린 아리랑 쓰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열여섯 쓰라리가 났네

 

고샅길 봄 향기 흠뼉 젖었지

상일꾼 엄마 품에 안기곤 했지

앓은 아리랑 시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큰아기 쓰라리가 났네

 

마을 잔치 누리고 귀가하다가

붙잡혀 만주까지 떠나야 했나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스무 살 쓰라리가 났네

 

단발머리 흰 얼굴 나의 누부야

은장도 챙기고 거기 눕지 마

아린 아리랑 쓰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꽃님이 쓰라리가 났네

 

여관서 슬그머니 잠이 드는데

마츠모도 다가와 옷을 벗겼네

앓은 아리랑 시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멀리서 쓰라리가 났네

 

첫눈이 내린 날 실키고 만 꽃

아픈 몸 찢긴 맘 어찌 달랠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서른에 쓰라리가 났네

 

구겨진 치마끈 고운 내 순정

붉은 피 흥건할 줄 짐작했을까 **

아린 아리랑 쓰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마흔에 쓰라리가 났네

 

서럽게 아리랑을 흥얼거리고

돌담 벽에 내 이름 새겨놓았지

앓은 아리랑 시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오십에 쓰라리가 났네

 

미안함 부끄러움 어찌 삭일까

죽고 싶다 내 꽃신 어디 감출까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육십에 쓰라리가 났네

 

가슴팍 푸른 멍이 아리고 아려

비 오면 뼈마디도 욱신거리네

아린 아리랑 쓰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늙으막 쓰라리가 났네

 

나눔의 집 냉한 문간방에서

잠시만 졸다가 떠나가겠지

앓은 아리랑 시린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팔십에 쓰라리가 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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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은 인류 역사의 가장 끔찍한 비극이다.

** 문창길의 시 「조선 처녀 옥주뎐 1, 2」 에서 인용함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