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팔레트 속의 광주
박설호
TV 속에서 기어 나왔지요
정신 나간 화가가 임산부의 배에 그려놓은
붉은 색깔의 아기가
점아 점아 콩점아 *
떡 사줄게 나온나
부끄러워 얼굴 가렸어요
아 배 밖으로 튀어나온 아기 얼굴 팔레트
바깥으로 금남로가 보였지요
점아 점아 콩점아
밥 사줄게 나온나
황혼이 나에게 빵 한 덩어리
건넸지요 성탄절 달력에는 나의 빵 위에
뿌려진 하얀 눈가루가
점아 점아 콩점아
꽃 사줄게 나온나
백육십팔 시간이 기름에 녹아
화폭에 슬픈 경악 남겼을까요 그림 속으로
자맥질해 생명 구하고 싶었어요
..................
* 김명곤의 「점아점아 콩점아」에 등장하는 한 구절은 이달희 시인의 시, 「점치는 아이」에서 인용된 것이다.
1980년대 초 뮌헨에서 광주의 살육 현장을 TV를 통해서 접한 적이 있다. 정신 나간 계엄군 한 명은 지나가던 임산부의 배를 칼로 찌른 다음, 뱃속의 태아를 끄집어내고 있었다. 아녀자, 힘없는 생명체에게 (성)폭력을 자행하는 자는 잔악하고 추악하며 저주스러운 악마가 아닌가? 그래, 계엄 군인은 악마의 탈을 쓰고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너무나 끔찍한 동영상이었으므로 며칠 동안 잠을 설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부끄러워, 차마 독일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따졌다. 왜 독일 방송은 세상의 가장 끔찍한 학살극을 그대로 방영하는지요? 선생님은 말했다. 진실은 있는 그대로 보도되어야 한다고, 경종을 울려야 앞으로 타국에서 그러한 일이 나타나지 않으리라고.
사진 속의 여인은 그때 끔찍하게 살해당하던 바로 그 임산부일까? 아직도 알지 못한다. 무슨 기이한 운명이기에 한 영혼이 이승의 마지막을 그런 식으로 처참하게 하직한단 말인가? 아, 사랑하는 오월의 누이여, 찬란한 꽃으로 끝까지 살지 못하고 무참히 꺾여나가야 했던 불쌍한 누이여, 편안히 가소서... 518 광주의 살육 현장, 오랜 눈물, 고통과 잔악함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시쓰기는 기억을 보존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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