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여 너와 헤어진 나는 유로파와
박설호
살았지 한데
갇혔지 부탁이니
흙탕물 속 누런 돼지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다오
이젠 데리고 놀지 마
숨어서 사랑하는
나의 칼립소 *
실린 곳: 박설호 시집 "반도여 안녕 유로파", 울력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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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립소Calypso는 그리스어에 의하면 은폐 감춤 등을 의미합니다. 신학에서 흔히 계시라는 말은 Apokalypsis 라고 표기되는데, "은폐된 무엇이 드러난다"는 의미로 (apo + calypsis) 사용된 것입니다.
칼립소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에 출현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여신입니다. 그미는 오기기아 섬의 여신이었는데, 표류하는 오디세우스를 발견하고 자신의 동굴에서 그를 정성스럽게 고수련합니다. 이때 그미는 영웅에게 연정을 느끼고 자신의 영원한 동반자로 삼기로 결심합니다.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연인이 되어달라고 제안합니다. Calypso offert amatorem suum Ulixem." 이때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여신의 제안에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두 가지 이유에서 그미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첫째로 그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아름다운 여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여신을 노엽게 하면 그에게 화가 들이닥치게 될 것 같았습니다.
언젠가 요정 키르케는 자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영웅을 돼지로 변신하게 한 다음, 그를 욕정의 대상으로 삼은 적이 있었습니다. 오디세우스는 과거의 실수를 반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칼립소가 베푸는 화려한 만찬과 유흥을 만끽하고, 그미가 원하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겼습니다. 그리하여 의도하지 않게 안온한 삶을 잠시 즐길 수 있었습니다. Ita sine consilio ad tempus quiete frui potui.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마음속에는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의지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신들에게 도와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리스 신들은 오디세우스의 애타는 기도를 듣고 마침내 그의 부탁을 들어주게 됩니다. 헤르메스는 칼립소에게 찾아가서 그를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령한 것이었습니다.
이별의 고통 속에서 칼립소는 오디세우스에게 뗏목과 음식을 제공합니다. 영원히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에 칼립소의 억장은 순식간에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만약 칼립소가 불사의 존재가 아니었더라면, 비련의 여인 디도Dido처럼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지 모릅니다. 디도는 카르타고를 지배하는 여인이었는데, 망명객 아이네이스를 맞이하게 됩니다. 디도는 그를 사랑하게 되어, 죽을 때까지 함께 살자고 애원하지만, 아이네이스는 끝내 이탈리아로 향하려는 마음을 굽히지 않습니다. 아이네이스가 카르타고의 항구를 벗어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 디도는 절망에 사로잡혀 단도로 자결하고 맙니디. Dido, ut audivit Aeneidem a portu Carthaginiensi egressum, sic desperatus est ut pugione mortem sibi conscivisset. 사랑은 죽음마저 결심하게 할 정도로 격렬하고 막강한 힘을 발휘하지만, 사랑의 불꽃을 꺼지게 하는 것은 바로 무심한 시간의 흐름이지요. ㅠㅠ
지금까지 동서고금의 시인들은 낯선 지역을 한 명의 여인으로 비유하곤 했습니다. 나 역시 뮌헨을 여인으로 비유하여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흙탕물"을 벗어났지만, 자청해서 유럽의 품에 안겼습니다. 유럽은 젊은 나에게 칼립소가 사는 은폐된 동굴과 같았습니다. 아니, 유럽은 키르케가 여러 동물들을 데리고 노는 공간이었습니다. Imo Europa locus erat ubi Circe variis animalibus ludebat. 과연 오디세우스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키르케의 농간으로 변신한 "누런 돼지" 한마리 가 바로 나였습니다. 그러나 그 공간은 간간이 사랑을 만끽하게 해주었습니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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