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동독문학

서로박: 울리히 샤흐트와 황장엽

필자 (匹子) 2024. 8. 14. 10:23

1.

대부분 사람은 고유한 체험에 입각하여, 자신의 견해를 설정하곤 합니다. 이러한 견해들은 나름대로의 이유를 지니며, 아울러 주어진 현실적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한 인간의 체험은 그의 세계관을 수립하는 데 얼마든지 악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에 관한 예를 당신에게 들려드릴까 합니다.

 

오늘은 구동독 출신의 작가, 울리히 샤흐트에 관해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그는 1951년 호에네크에 있는 여성 형무소에서 태어났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어머니가 그곳에 수감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22세가 되었을 때 샤흐트는 구동독에 대한 반체제적 선동 혐의로 재차 감옥에 갇혔습니다. 젊은 작가에게 주어진 형량은 7년이었습니다. 3년 동안 감옥 생활을 보낸 그는 1976년 구서독에 “팔렸습니다.”

 

구서독은 1980년부터 체제 비판적인 작가 그리고 지식인을 동독에서 “수입 (?)”하는 대신에 일정의 금액을 지불하곤 하였지요. 울리히 샤흐트는 1976년 이후에 서독으로 건너온 다음에 창작 활동을 본격적으로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하며, 시집 "파편의 흔적 (Scherbenspur)" (1983)을 간행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산문집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Deutsche Verlagsanstalt), 에세이 모음집 "양심은 힘이다" (Piper) 등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

문제는 샤흐트의 가족사입니다. 그것은 분단의 비극과도 관계됩니다. 1950년에 샤흐트의 어머니는 예기치 않게 임신하게 됩니다. 그미는 소련 장교를 사랑했던 것입니다. 그미는 연인과 함께 서독으로 도주하려고 계획을 세웁니다. 이때 누군가 두 사람을 밀고합니다. 소련 군정은 샤흐트의 어머니를 10년의 구금 형을 선고했고, 소련 장교는 이른바 “외국 여자와 놀아났다”는 이유로 본국으로 이송됩니다.

 

샤흐트의 어머니는 10개월 후에 작센에 있는 여자 교도소에서 아들을 낳습니다. 바로 그 아이가 울리히 샤흐트였습니다. 샤흐트는 감옥에서 유년기를 보냅니다. 과연 샤흐트의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비밀 정보부의 서류에는 모든 게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누가 배반자일 수 있는가? 모든 의혹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사장되고 맙니다.

 

1999년 4월에 샤흐트는 48세의 나이에 난생 처음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만나려고 모스크바로 향합니다. 샤흐트는 1990년부터 아버지의 생사를 탐문해 왔는데, 자신의 아버지는 모스크바 근교에 현재 살아있으며, 블라디미르 예고로비치 페도토프 (W. J. Fedotow)이라고 밝혀졌습니다. 페도토프는 1950년 소련 장교로서 독일 메클렌부르크의 “비스마르”라는 지역에 주둔해 있었습니다. 이때 그는 어느 독일 여인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이 독일 여인이 바로 샤흐트의 어머니였습니다.

 

4.

1999년 4월 4일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소련인 아버지와 독일인 아들은 48년 만에 극적으로 재회하게 되었습니다. 네덜란드 방송국의 기자이자 문학 비평가인 존 알베르트 얀센은 울리히 샤흐트와 함께 모든 것을 생생하게 취재하였습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적 가족사에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20세기 전체주의 사회의 혼란이 낳은 끔찍한 비극에 관한 이야기이며, 오늘날에도 영향력을 끼치는 이야기가 아닌가요?

 

샤흐트는 자신의 책, "배반. 세계가 빙빙 돌았다 (Verrat. Die Welt hat sich gedreht)"에서 주어진 규범에서 일탈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비참한 상황을 생생하고도 밀도 있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겪었던 상처는 비단 끔찍한 과거의 기억에서 비롯되는 것 뿐 아니라, 망각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친아버지인데도 난생 처음 바라보아야 하는 허망함을 유추해 보세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 수척한 소련 노인만이 냉담하게 비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울리히 샤흐트 (1951 - 2018)

 

5.

분명히 샤흐트는 불행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지만 과거의 불행한 개인사로 인하여 현재 자신의 세계관이 정당성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샤흐트는 급진적 태도로 90년대 말 독일의 풍토를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샤흐트에 의하면 현재 독일의 정치가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현재 통일된 독일은 기본법 (das Grundgesetz)을 준수하는 공화국이 아니라고 합니다. 따라서 그는 더 이상 독일에서 살아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여, 스웨덴으로 이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유감스럽게도 샤흐트는 스웨덴이 얼마나 사회주의 체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는지 감지하지 못합니다. 만약 샤흐트가 미국으로 이주한 뒤 그렇게 말했다면, 그의 말은 행동과 일치되었을 것입니다.

 

가령 샤흐트는 외무부 장관, 요스카 피셔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즉 피셔는 “입에 거품을 품으면서 급진적인 자본주의에 대항한 자”라는 것입니다. 피셔 역시 이른바 68세대에 속하는데, 지금까지 샤흐트 자신이 만나본 68세대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동독의 스타지와 똑같은 유형의 족속들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샤흐트는 귄터 그라스 (G. Grass)를 “소심한 성격을 지닌 작가”로서 “지적으로 저공비행을 일삼는 비행사”라고 경멸하였습니다. 1996년에 간행된 독일 극우파 사전에는 울리히 샤흐트는 “젊은 자유”의 작가로 소개되어 있습니다.

 

6.

과문한 나는 다음의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세계관 정립에 가장 중요한 것은 삶의 생생한 체험이라고 말입니다. 그래, 자기 인식이야말로 사람을 변화시키게 하는 교육의 특효약 아닙니까?

 

그렇지만 구체적 삶의 행적은 공교롭게도 자신의 올바른 판단을 방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컨대 어떤 체험이 전시대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가치를 지닌 게 아니라, 어느 특정한 상황 속에 국한된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몇몇 사람들은 어떤 오류를 범합니다. 즉 지엽적인 문제에 혈안이 되었다가, 보다 거대한 시대정신을 곡해하는 오류 말입니다. 우리는 샤흐트의 개인적 비극에 대해서는 동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삶 그리고 관점을 동일선 상으로 파악하여 전투적 반공주의로 급선회하는 그의 태도는 분명히 잘못입니다. 이러한 아전인수격의 오류는 반드시 지양되어야 합니다.

 

7.

2010년 신문에는 황장엽 교수의 미국 방문이 좌절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의 북한 체험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에게 좋은 자료로 활동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장엽의 입장표명은 지금까지 엄청난 오해와 시행착오를 불러일으켰습니다. 특히 그의 직선적 발언은 남한의 통일 운동에 이득을 가져다준 게 아니라, 오히려 해악을 끼쳤습니다.

 

예컨대 황 교수는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를 공작원 “김철수”라고 발언함으로써 베를린 대학 교수로 일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습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그는 좌파 지식인의 탄압에 대한 계기를 부여했습니다. 이로써 본의 아니게 남한의 수구 보수 세력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할 빌미를 스스로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8.

세상사의 성패는 -바둑과는 달리- 서로 다투는 두 사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둑 두는 자들의 주위에는 수많은 관심을 지닌 사람들이 다양한 태도로 경기를 관전하고 있습니다. 남북 관계도 그러하지요. 바로 이 사실이야말로 진리가 어느 특정한 상황에서 진리로 수용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세상에 독일이라는 나라 하나만 존재했더라면, 마르크스의 "자본"은 오랫동안 진리로 남았을 것입니다.

 

당신도 잘 아시겠지만, 많은 사람이 솔직하게 모든 것을 진리라고 말하다가 큰코다치곤 하였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진리라고 생각하고 곧이곧대로 말하더라도, 거짓으로 매도되거나, 반대자에 의해 이용당하곤 했으니까요. 똑 같은 말이라 하더라도, 언제 어디서 행하는가에 따라서 달리 수용되는 법 아닙니까? 바로 이 때문에 나는 비련의 독일 시인 한 사람을 생각하며, 아집과 불행으로 점철된 그의 오류를 안타깝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