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12. 상기한 사항을 고려할 때 흙이란 물과 마찬가지로 가장 낮은 도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기본적 존재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에피소드를 첨부하려고 합니다. 언젠가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은 도에 관하여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도(道)란 타자와 자연을 깔보지 않고 섬기고 마치 주인처럼 모시는 자세와 관계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아래에 처하는 도리는 무엇이며, 어떻게 이를 깨달을 수 있을까요?”
이때 공자는 좋은 질문이라고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우리는 남의 아래에 처하는 도리를 흙에서 발견해야 하네. 흙이란 파고 들어가면, 좋은 샘을 얻을 수 있고, 여기에 오곡을 심을 수 있네, 흙은 초목을 자라게 하고, 온갖 동물에 해당하는 조수어별(鳥獣魚鼈)을 기르게 해주네. 그러니 흙은 살아있는 것을 바로 세워주고, 죽은 것을 아무 말 없이 받아주는 존재야. 흙에게는 공이 많지만, 말이 없으며 두고두고 세인의 칭송을 받게 되지.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남의 아래가 되려는 자는 오직 이러한 흙처럼 처신해야 하네. (夫土者, 掘之得甘泉焉. 樹之得五穀焉. 草木植焉. 鳥獸魚鼈遂焉. 生則立焉, 死則入焉. 多功不言, 賞世不絶. 故曰: 能爲下者, 其惟土乎!)” (한영: 韓詩外伝, 3권, 임동석 역, 동서문화사 2012, 796쪽).
13. 흙은 공자에 의하면 초목을 자라게 하고 동물에게 모든 자양을 제공합니다. 흙은 생명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이며, 죽은 생명을 다시 썩어 사라지게 해줍니다. 그렇기에 아무런 대가나 찬양을 받지 않고, 생명에게 모든 자양을 베풀다가, 시간이 흐르면 죽은 생명체를 다시 거두어 사라지게 하는 존재가 바로 흙이라고 합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토본주의(土本主義)의 핵심 사항이 오래전의 동양 사상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흙은 명실 공히 토양을 가리키지만, 지구 그리고 세계를 포괄합니다. 선조들은 세계를 “土”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예컨대 조광조가 남긴 절명시(絶命詩)에도 “흙(土)”은 세상 전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안삼환: 한 서양 학도의 늦깎이 귀향 메모, 김재은 외: 부드러움의 미덕, 푸른 사상 2022, 62쪽.)
인간 존재 역시 흙에 포함됩니다. 왜냐면 인간이 죽으면 흙 내지는 재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 부식질humus”에 해당하는 흙은 동식물을 지탱하게 하고, 사라지게 하는 권리 또한 지니고 있습니다. 이로써 대지는 출산의 장소이며, 사멸의 토대입니다. 흙은 생명을 잉태하고, 이를 가꾸어 나가게 하며, 겨울, 즉 사멸로 이끌어 나갑니다. 흙의 권리는 성주괴공(成住壊空)이라는 우주의 질서를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14. 그렇다면 흙이란 오늘날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요? 오늘날 흙의 권리를 강조하는 것은 에코 페미니즘이 지향하는 사고입니다. 왜냐면 흙과 대지의 권리를 고수하려는 시도는 환경 보존, 평화 공존을 추구하는 여성 운동과 같은 목표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고려한다면 “부식질”의 의미는 미국 작가, 알도 레오폴드의 “대지 공동체”의 의미를 포괄합니다. 인류세를 맞이하여 모든 가치는 인간중심이 아니라, 인간과 동식물 그리고 대지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Aldo Leopold: A Sand County Almanac: And Sketches Here and There. Oxford 1949, P. 109). 왜냐면 이미 언급했듯이, “인간 humanus”의 권리보다 더 포괄적인 것이 “흙의 권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흙의 권리는 여성의 권리이며, 자연과의 평화 공존을 도모하는 출발로서의 생태주의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나아가 흙의 권리는 인간중심주의의 허상을 지적하는 수단이 되며, 상부 지향적 구도를 타파할 수 있는 생활방식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오늘날 핍박당하는 노동자의 권리를 요구하고 실현하는 과업은 여전히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류세는 인간의 권리만 따질 수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의 재앙의 징후가 80억 사람들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습니다.
본서가 일견 다양한 내용으로 인해 소재상의 산만함을 드러낼지 모르지만, 독자들은 필자의 관점만큼은 분명하다는 점을 감지하게 될 것입니다. 부디 이 문헌이 여러 가지 유형의 환경, 평화 그리고 여성 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드리며 필자 박설호 OTL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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