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잡글

박설호: (2) 흙의 권리. 오르플리트 서한집, 서문

필자 (匹子) 2024. 6. 13. 11:10

(앞에서 계속됩니다.)

 

5. 두 번째는 유교적 남성주의의 폭력이라는 비합리성입니다. 조선 시대에 나타난 양반과 상놈 사이의 수직 구도는 오늘날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개별적 인간은 여전히 등급으로 차별화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 존재 자체가 자본주의의 경제적 조건에 의해 수직적 계층으로 분할되어 있습니다. 인간 가치는 돈에 의해 등급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남성 중심주의의 여러 유형의 폭력은 특히 여성과 아이들에 대한 핍박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세대를 넘어서 폐쇄적 가족 구도 속에서 대물림되어 나타나기도 합니다.

 

가족, 학교, 교회, 회사, 여러 단체는 폐쇄적인 수직 구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고인 물이 썩듯이, 외부로부터 차단된 사회적 공간에서는 폐쇄적인 섹트주의 내지는 당동벌이라는 의식이 창궐하게 됩니다. 이를테면 강제적 성윤리는 개개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해 왔습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여성의 권리는 온갖 폭력에 의해서 처절할 정도로 짓밟히는 실정이 아닌가요? 사회 내의 많은 종류의 차별과 억압을 떨치고 민주적인 평등 사회로 나아가려면, 폭력과 성폭력이 반드시 세상에서 사라져야 하며, 이와 아울러 여성을 우대하고 모시는 생활관습은 하루빨리 정착되어야 할 것입니다.

 

6. 세 번째는 권위주의적인 국가가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비합리성입니다. 개인의 인권은 국가의 폭력에 의해서 속수무책으로 피해당하곤 했습니다. 이에 관한 범례는 너무도 많으므로 여기서 세부적으로 언급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국가의 횡포로 인하여 개인의 고유한 권리는 무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는 자생, 자활 그리고 자치를 준수하는 아나키즘 생태공동체는 찬란한 꽃으로 피어날 수 없는 실정입니다. 개인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의 많은 권한을 내주었는데, 국가가 개개인의 자유와 인권을 위해 전력투구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존재는 무슨 가치가 있겠습니까?

 

오늘날에도 아나키즘 운동이 끝없이 속출하는 것은 그만큼 국가가 범하는 죄악이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개인은 국가의 폭력에 대해 저항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령 독일 사람들은 파시즘의 전쟁을 치른 다음에 다음과 같은 사항을 기본법에 명시하게 했습니다. “모든 개인은 기본권에 합당한 질서를 파괴하는 모든 것에 대해 저항할 권리를 가진다.” (독일 기본법 제 20조 4항). 만약 우리가 인간의 고유한 권리를 국가보다 우위에 설정한다면, 마지막 보루로서의 인간의 인권은 지켜질 수 있을 것입니다.

 

7. 오르플리트 서한집은 상기한 세 가지 폭력에 저항하려는 내적 모티프에 의해서 하나하나씩 집필된 것입니다. 분단과 불신의 폭력은 차제에는 함께 평화롭게 아우르는 공존으로 변해야 하고, 유교적 남성주의의 전횡은 언젠가는 성 평등이라는 토대에서 언어폭력, 물리적 폭력 그리고 성폭력이 없는 사회로 거듭나야 하며, 권위적 국가의 횡포는 법적인 저항을 통해서 개인 앞에서 기필코 무릎을 꿇어야 할 것입니다. 이는 에코 페미니즘의 의향에 해당하는 흙의 권리를 되찾는 일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물론 전쟁을 배격하는 평화 공존의 운동, 약자의 인권을 되찾는 여성 운동 그리고 생태 자치, 자활 그리고 자생을 도모하는 공동체 운동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점진적 극복이라는 대의(大義)와 함께 각자의 영역에서 각개전투의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할 것입니다. 필자는 이러한 내적 의향을 견지하면서 서한집의 내용을 다음과 같은 일곱 가지 장으로 나누어보았습니다. 1. 오르플리트 생명, 2. 오르플리트 체험, 3. 오르플리트 사회, 4. 오르플리트 정치, 5. 오르플리트 예술, 6. 오르플리트 마음, 7. 오르플리트 갈망, 8. 오르플리트 젠더, 9. 오르플리트 세계, 10. 오르플리트 사물

 

8. 상기한 사항이 바로 오르플리트 서한집의 집필 계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필자의 편지에는 크고 작은 오류가 자리할지 모릅니다. 왜냐면 거기에는 필자의 주관적 판단 내지는 삶에 대한 구체적인 체험이 첨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비판과 저항은 –역설적이지만- 어쩌면 부끄러운 체험에 대한 솔직한 고백을 통해서 더욱더 커다란 동력을 확보하지 않을까요? 중요한 것은 일방적 비판 대신에 자기비판의 성찰을 견지하는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독심술은 주어진 사항을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방식으로 고찰하려는 유연한 탐색의 자세이며, “다름을 인정하지만, 미워하지 않는” 화이부동(和而不同)의 태도일 것입니다. 비록 내가 이러이러한 사항을 추적하지만, 나는 그 사실에 대해 비판적 거리감을 유지하겠다는 냉정한 마음가짐을 생각해 보세요.

 

바로 이러한 태도를 인정해야만, 우리는 내가 탐색하는 무엇 그리고 나 자신의 세계관 사이에는 얼마든지 거리감이 자리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힐 수 있습니다. 자기비판이 동반되지 않은 비판은 일방적 폐쇄성에 차단되어 더 이상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법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다름“ 그리고 ”가능함“을 거부하는 폐쇄적인 차단이라든가 우리의 의식을 가로막으며 소통을 방해하는 모든 유형의 고립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오르플리트 서한집은 이러한 길을 걸어가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입니다. 비판하되 다름을 외면하지 말고, 추적하되 연구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말기 – 이러한 자세를 취해야만 우리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해당하는 아집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3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