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a 나의 산문

서로박: (1) 배를 짊어지고 높은 산을 넘으면서

필자 (匹子) 2024. 7. 13. 10:07


“희망의 특징은 불가능성의 가능성으로 요약된다.” (에른스트 블로흐)

 

친애하는 M, “배를 짊어지고 높은 산을 넘으면서 고향을 찾는다. 繋舟山頂覓郷人”. 이 구절은 노촌 이구영 선생의 한시 한 구절입니다. (심지연: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소나무 2001). 이구영 선생님은 남북의 평화 통일의 과업을 “무거운 선박을 끌고 산을 오르는 힘든 여정”으로 표현하면서, 이를 자신의 고향 찾는 일로 비유했습니다. 이구영 선생님에 비하면 나의 청년 시절은 그저 작은 고난의 엄살로 여겨집니다. 그럼에도 그것을 감히 글로 남기는 까닭은 절망에 사로잡힌 당신이 “삶의 의미는 버티는 데 있다.”라는 사실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다음 이야기의 배경에 해당하는 시간과 장소는 임의로 바뀌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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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원서를 제출해? 마산 교육청의 L 장학사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그건 불가능해. 자네 검정고시 합격은 취소 처리되었어. 청천벽력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나는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네는 1981년 8월 10일에 검정고시 시험을 쳤지? 뒷조사를 해보니 그해 9월 25일 자로 마산 N고등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더군. 그러니 재학생 신분으로 검정고시를 치른 셈이야. 자네는 법 규정을 위반했어.

 

당시 우리 가족은 몹시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습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밀린 돈을 갚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붕장어를 일본으로 수출했는데, 처음부터 거래 조건이 문제였습니다. 시모노세키의 일본인들은 죽은 붕장어를 감량으로 제외한 다음에 오로지 활어만을 골라 가격을 책정했던 것입니다. 붕장어는 갇혀 있는 생명체라서 그런지는 몰라도 배의 협소한 통 속에서 오래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습니다. 일본인들은 죽은 물고기를 모조리 살처분한 다음에, 활어만을 계산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부족한 수입을 메꾸려고 선원들은 몇몇 일본 제품을 밀수한 게 화근이었습니다. 그만 세관의 단속에 걸렸던 것입니다.

 

집은 빚으로 압류당하고, 아버지는 10개월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내서동 통나무집으로 이주했습니다. 이모부가 길바닥에 나앉은 우리에게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었던 것입니다. 우리 다섯 식구는 소음과 톱밥 가득한 통나무집 두 칸 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서 시장에서 바느질을 시작했으며, 형은 고등학교를 그만두고 공장에 취직했습니다. 생활비를 벌어야 했던 것입니다. 먹는 것도 시원찮았습니다. 매일 깍두기 반찬 하나에 수제비로 허기를 채워야 했으니까요.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수제비를 절대로 입에 대지 않습니다. 형은 세상을 한탄하면서 저녁마다 술만 들이켰습니다. 몰락한 가정에서 가장 크게 피해당하는 자는 큰 자식이라고 하더니, 형이 그 피해를 고스란히 감당했습니다.

 

어느 날 형은 정신을 차리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형이 고졸 학력 검정고시를 치를 때, N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나도 덩달아 검정고시 시험에 응했습니다. 다행히 전 과목 합격하여 그해 9월에 학교에 자퇴서를 제출했습니다. 한 달 후에 (오늘날 수능에 해당하는) 예비고사에 응시하여 어찌어찌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교육청은 수험생들에게 예비고사 합격증을 발급해주었지만, 검정고시 출신자들에게는 검정고시 합격증을 즉시 발부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의아하게 여겼으나,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학 입시 준비에 몰두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본고사를 치르려고 서울에 있는 S 대학교와 K 대학교의 원서를 구매하여 교육청의 장학사를 찾아갔던 것입니다.

 

합격 취소의 통보는 나를 허탈하게 했습니다. 장학사의 난로 위 주전자에서는 하얀 수증기가 뿜어나오고 있었습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10월에 통보해주지 않고, 왜 예비고사까지 치르도록 했습니까? 더듬거리면서 물었으나, 나의 질문은 매우 완강하게 울려 퍼졌습니다. 그야 수험생을 모조리 조사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야.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물었습니다. 그러면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장학사는 나를 멀거니 쳐다보더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2년 후에 검정고시를 다시 치를 수 있을 거야. 잘못을 저질렀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내게 가해진 벌칙이란 2년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절망감을 느꼈습니다. 성급히 자퇴서를 제출한 게 후회막급이었습니다. 사실 마산 N 고등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했지만, 장학금을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은 운동장에 전교생들을 집결시켜놓고, 월말고사의 성적 우수자 3명에게 만 원이 든 봉투를 전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지금 돈 가치로 환산하면 아마 20만 원 정도 될 것입니다.

 

문제는 N 고등학교의 면학 분위기가 형편없었다는 데 있었습니다. 대부분 학생은 수업 시간에 여드름이나 찍찍 짜고, 공부에 별반 관심이 없었으니까요. 나로서는 제2외국어를 끝까지 배울 수 없는 게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당시에는 SKY 대학에 진학하려면, 제2외국어를 열심히 해야 했는데, 혼자서 공부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밖에 교련 수업이 나를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총검술과 사격은 말하자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정당화하는 교육으로 다가왔습니다. 교련 선생님은 교사들 가운데 병역미필자를 색출하여 학교에서 쫓아내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음악 선생님이 자신의 물품을 챙기고 학교를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니 벌컥 눈물이 솟았습니다. 갑자기 학교가 지옥과 같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어쨌든 검정고시에 응시한 이유는 첫째로 힘들게 일하는 어머니를 어떻게 해서든 편하게 해드리고 싶었고, 둘째로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검정고시에 합격한 다음에 거리낌 없이 자퇴서를 제출했던 것입니다.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