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독일 영화

서로박: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필자 (匹子) 2024. 1. 8. 18:41

 

불의와 금기에 완강하게 저항하는 영화감독, 그는 다혈질에다, 공격적이며, 자기 파괴적인 인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극단을 추구하는 그는 타협을 멀리하고, 놀라운 예술작품을 탄생하게 하였으며, 그의 삶에 있어서도 열광과 분노를 추적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영화가 억압 그리고 절망을 주제로 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Rainer Werner Fassbinder, 1945 - 1982). 마흔도 되지 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한 독일의 영화감독은 한국의 가수 GOD의 김태우를 많이 닮았습니다. ㅎㅎㅎ

 

 

 

그는 의사인 아버지와 번역가로 활동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나이 6세가 되었을 때 부모는 이혼하였으므로, 1951년부터 어머니에 의해 양육 받았습니다. 이혼한 부모의 자녀는 대체로 정서적으로 불안하게 살아갑니다. 그는 아욱스부르크에서 김나지움을 다니다가, 중도에 그만 두었습니다. 16세의 나이에 파스빈더는 아버지가 살고 있는 쾰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파스빈더는 극작품, 시, 단편 등을 집필하였습니다. 천성적으로 "독학도 Autodidakt"인 그는 스스로 많은 책을 읽었고, 혼자서 철학, 사회 문제 그리고 심리 분석에 관하여 수준 높은 경지에 오르게 됩니다. 젊은 나이에 영화 제작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영화 제작을 위한 대학에서 공부하려는 그의 갈망은 꺾이고 맙니다. 뮌헨, 베를린 등지에서 영화를 위한 학교의 입학 시험에 차례로 낙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배우 귄터 카우프만,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그리고 여배우 브리기테 미라. 이들은 독일 영화를 풍요로운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는 혼자서 모든 것을 배워나가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Er war ein Autodidakt.1966년에 그의 파트너인 크리스토프 로저와 함께 "도시의 배회자Der Stadtstreicher" 그리고 "작은 혼돈Das kleine Chaos"과 같은 단편 영화를 만듭니다. 그는 여러 동료들과 행위 연극과 같은 실험적 활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의 연극 활동은 많은 비용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1969년에서 1971년 사이에 많은 연극작품 뿐 아니라, 새로운 연극이 탄생했으나, 재정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는 당시의 돈으로 20만 마르크의 빚을 갚지 못해서, 그의 어머니가 부분적으로 그를 도와주어야 했습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한 장면. 영화는 문화권이 다른 두 사람의 공공의 삶은 어떠한 희열과 고통을 안겨주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게다가 작품에서 문제 되는 것은 주위 사람들이 국적이 다른 두 사람의 결혼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을 경멸한다는 사실이다. 다음을 클릭하면 연극 작품으로 만들어진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aTXKMKit-w

 

 

1971년에서 1973년까지 영화와 연극에 있어서 대단한 유명세를 누리게 됩니다. 그의 영화는 상투적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서, 어떤 금기 내지는 편견으로 방향을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외국인에 대한 증오심, 유대인에 대한 부정걱 시각, 동성애자에 대한 왜곡된 악감정 등을 가리킵니다. 예컨대 영화 "페트라 폰 칸트의 쓰라린 눈물Die bitteren Traenen der Petra von Kant" (1972)는 외국인 노동자의 독일 내에서의 삶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비난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Angst essen Seele auf" (1973)는 인종이 다른 두 남녀는 서로의 이질적 견해 그리고 외부의 이상한 시선 때문에 갈등을 겪습니다. "자유의 무법적인 폭력 Faustrecht der Freiheit" (1974) 은 영미권에서 "여우와 그의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는데, 동성애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역겨움을 노골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작가이자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의 제자 게어하르트 츠베렌츠 (1925 - 2015)를 가리키고 있다. 파스빈더의 작품 "쓰레기, 도시 그리고 죽음"은 게어하르트 츠베렌츠의 작품 "지구는 달처럼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라는 작품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다.

 

 

 

 

사진은 양성애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로고입니다. 파스빈더는 양성애자로 살았습니다. Er war ein Bio-Sexueller. 쉽게 말하자면 이성과 동성에 연정을 느끼는 인간이었습니다. 파스빈더는 커밍아웃하여, 스스로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천명하였습니다.

 

미하엘 브뤼멜의 그림

 

파스빈더의 예술은 세 단계로 구분됩니다. 첫 번째 단계는 1962년부터 1971년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파스빈더는 주로 범죄 드라마를 다루었습니다. 이때 연극 상연도 그의 부분적 일감이었기 때문에 영화 속에는 극적인 특성이 많이 가미되어 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1971년부터 1970년 후반까지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에 파스빈더는 수준 높은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에는 소시민, 이민자, 동성애자 등 사회적 약자가 많이 등장합니다. 이로써 파스빈더는 독일 내에서 외국인 차별, 성 문제 그리고 일상 속에 자리하고 있는 파시즘을 부각시켰습니다. 

 

 

파스빈더는 1974년 그리고 1975년에 프랑크푸르트의 극단 "탑"의 공동 운영자로 발탁되어 활동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쓰레기, 도시 그리고 죽음 Der Müll, die Stadt und der Tod" (1974)이라는 극작품을 집필하여 공연하게 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독일인들의 은폐된 반유대주의를 노골화시켜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파스빈더의 작품 속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관한 독일인들의 악감정이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독일에서는 이 작품은 독일 관객들의 항의 때문에 더 이상 공연될 수 없었는데, 1999년 이스라엘에서 공연되었을 때, 이스라엘 사람들 어느 누구도 작품을 비난하지 않았습니다.  

 

 

한나 시굴라와 함께 찍은 사진 1980.

 

 

파스빈더의 세 번째 예술 단계 1970년대 말부터 1982년까지의 시기를 가리킵니다. 이 시기에 파스빈더는 전후 독일의 영화 역사에서 중요한 여성 배우를 발굴하였습니다. 그는 폰타네의 "에피 브리스트Effi Briest" (1974),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ie Ehe der Eva Braun " (1973), "릴리 마를렌Lili Marleen" (1981) 등의 영화에서 한나 시굴라, 바르바라 수코바를 여주인공으로 부각시켰던 것입니다. 이들의 훌륭항 연기는 파스빈더의 명성과 독립적인 영화 제작을 가능하게 해주었습니다. 파스빈더는 1980년에는 TV 드라마 작품으로서 되블린의 소설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을 탄생시켰습니다.  

 

 

파스빈더는 "가미가제 1989" (1982)에서 주인공 배우로 연기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82년 6월 10일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사망 원인은 심정 정지라고 하는데, 과로, 코카인, 술 그리고 수면제 복용이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파스빈더의 어머니는 파스빈더의 마지막 애인인 율리안네 로렌츠와 함께 아들의 작품을 정리하여 문헌으로 간행하였습니다. 이는 전남편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짧고 굵은 삶 - 그것은 살아남은 친구들로 하여금 슬픔에 사로잡히게 하지만, 그 속에는 나름대로의 멋과 기개가 넘쳐 흐르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