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독일 영화

서로박: 크라카우어의 '대중의 장신구'

필자 (匹子) 2023. 10. 31. 16:32

독일의 건축가, 영화 평론가 그리고 사회학자로 알려진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대중의 장신구Das Ornament der Masse』에 실린 에세이 작품들은 1912년에서 1931년 사이에 부분적으로 발표되었습니다. 책으로 간행된 시점은 1962년이었습니다. “역사의 과정에 속하는 한 시기는 하나의 장소로 집약되는데, 자신의 시기 자체보다는 겉으로 드러난 거짓 없는 외부적 현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분명하게 측정될 수 있다. 그것은 시대적 경향성의 표현으로서 한 시대의 특징을 전제적으로 묶어서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느 특정한 시대는 무의식적으로 드러난다. 그렇기에 우리는 눈앞에 주어진 기본적 내용을 고찰함으로써 한 시대를 증언할 수 있다.” 크라카우어는 스포츠 경기 등과 같은 대중이 참여하는 일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세상에 대한 작가의 접근 방식입니다. 크라카우어는 자신의 시대를 성급하게 추상적 이론으로 속단하지 않고, 신중한 자세로 모든 구체적 현상 들을 아무런 선입견 없이 냉정하게 관찰하려고 합니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1920년대 독일의 사회, 예술, 향락 산업 그리고 철학 등의 영역에서 드러난 현상들입니다. 크라카우어가 다루는 소재는 새롭게 등장한 사진예술에서 “베스트셀러”까지 이어지고, 도시 계획, 심지어는 영화 예술까지 다양합니다. 말하자면 대중 예술의 산업에 해당하는 모든 것이 작가가 서술하는 대상입니다.

 

크라카우어가 다루는 1920년대 독일 사회는 그 자체 몰락하는 시민 계급의 문화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대중들은 빌헬름 황제의 권력이라든가 프로이센의 주도적인 사고에 편승하지 않은 채 폭력 그리고 이성 사이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대부분 여전히 무산 계급으로 머물고 있지만, 왕의 권력을 완전히 찬탈할 생각은 저버린 채 사회주의를 위해서 과감하게 행동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크라카우어는 이 시대를 다음과 같이 기술합니다. “오늘날의 (1920년대의) 중산층에게는 상징적 의미에서 자신의 거처가 없다.”

 

한마디로 1920년대 독일의 중산층은 어떤 현혹에 빠져 있기 때문에 사회 변혁을 위한 내적 욕망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습니다. 크라카우어는 우파Ufa 영화사를 찾는 대중들의 취향을 분석합니다. 베를린 사람들은 기껏해야 이른바 지배 이데올로기로 가득 채워진 영화를 보면서 안온한 “낮꿈Tagtraum”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게다가 당시에 많이 팔린 책들은 “침묵의 심연 속에” 가라앉은 채 사회적으로 중요한 질문과는 거리가 먼 지엽적인 내용들만 다루고 있을 뿐입니다.

 

가령 당시 독일인들은 한스 체러Hans Zehrer가 발행하는 잡지 『행동Die Tat』을 즐겨 읽으면서 수구 보수주의의 세계관에 은밀하게 동조합니다. 국가의 존재는 잡지 편집자에 의하면 국민을 위해서 처음부터 어쩔 수 없이 전체적인 면모를 표방할 수밖에 없다면서, 대중을 배후에서 조종합니다. 민족, 공간, 신화 그리고 지도자 등과 같은 단어는 비일비재하게 사용됩니다. 이러한 단어들은 교묘하게 독자들의 내적 갈망을 부추겨서, 비합리적이고 위험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크라카우어는 이러한 신문 방송의 이데올로기가 어떠한 방식으로 대중들을 공공연하게 파시즘의 질병으로 몰아가는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는 집필 당시에는 깊이 파고들지 못했습니다. 「여행과 춤」의 장에서 크라카우어는 당시 대중들이 대대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성향을 다루고 있습니다. 어쩌면 대중들은 다른 나라를 여행함으로써 스스로 얼마나 정신적 공허 상태에 빠져 있는가를 간파하게 될지 모릅니다. 그들은 여행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어떠한 맹목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깨닫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대중들은 거의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즐거워합니다. 크라카우어는 춤에 대한 대중의 열광에서 아무런 의미를 발견하지 못합니다. 과거에 춤은 신을 경배하고, 개인의 에로스를 표현하는 순진무구한 행위였는데, 현대인들은 이와는 무관하게 미친 듯이 춤을 추면서 넋을 잃고 있습니다.

 

그 밖에 작가는 자신이 인간적으로 애호하는 철학자, 막스 셸러Max Scheller 그리고 사회학자, 게오르크 짐멜Georg Simmel 등의 철학 사상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철학은 기독교 신앙에 파묻혀서 서서히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독일 관념론의 마지막 주자인 막스 셸러는 자신이 수호하는 성배(聖杯)를 매우 위태롭게 간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게오르크 짐멜은 크라카우어에 의하면 사회의 구체적 사항을 바탕으로 해부하지만, 그게 사회적으로 과연 어떠한 상징적 의미를 부여하는지 전혀 대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는 셀러의 “자연 신학”에 관한 구상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합니다. 셸러의 신학적 관념론은 사회의 바람직한 변혁을 고려할 때 심리학적 차원에서 공허하게 울려 퍼질 뿐입니다.

 

저자는 당시에 횡행하는 문학과 철학의 경향을 접하는 대중들에 관해서 거리감을 취하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일단 사람들은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문학을 논하고, 막스 베버Max Weber의 사회학 이론 그리고 자유주의 철학자,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의 문헌을 접하는데, 이들의 예술적 철학적 방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고 저자는 일침을 가합니다. 이러한 비판적 성향은 유대주의 사상가,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그리고 프란츠 로젠츠바이크Franz Rosenzweig를 대하는 독자들에게도 해당됩니다. 크라카우어는 마르틴 부버의 성서 번역의 언어학적 문제를 지적하며, 로젠츠바이크의 고대 사회에 대한 로젠츠바이크의 신낭만주의의 동경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로젠츠바이크가 내세우는 유대주의의 전언은 오늘날 더 이상 유효하게 전해질 수 없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것은 주어진 현실의 토대인 경제적인 요소와 사회적인 요소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크라카우어는 주어진 사회를 현상학적 차원에서 냉철하게 서술하지만, -작가가 자인하고 있듯이- 주어진 시대 정신의 본질적 측면을 투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는 사회학적 지식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경험을 포착하려고 할 뿐, 의식의 차원에서 존재론적인 실존주의의 방식으로 모든 것을 천착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크라카우어가 신앙과 무관하게 처신하고 모든 것을 회의적인 시각으로 고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관찰 방식은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에 근친하게 사고하면서도 모든 것을 기다리는 지식인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지만 크라카우어는 어떠한 권력 이데올로기에도 굴복하지 않으며, 주어진 사회 역시 언젠가는 사라지고 말 일회적 특징을 표방한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고려할 때 크라카우어의 정치관은 프랑크푸르트 학파와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프로이셍 사회의 우편향적 이데올로기를 비판하지만, 정작 자산은 당시의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사상으로부터 거리감을 취했습니다. 모든 것에 관여하지만, 정작 자신은 사대의 변화에 직접적으로 동참하지 않고 한발 물러서 있는 방관주의는 한마디로 아도르노의 그것과 매우 근친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