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문학 이론

서로박: 바타이유의 '문학과 죄악'

필자 (匹子) 2023. 12. 11. 05:59

 

죠르주 바타이유 (G. Bataille, 1897 - 1962)의 『문학과 죄악 (La Littérature et le mal)』은 1957년 파리에서 처음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문학과 죄악에서 다루어지는 작가는 E. 브론테, 보들레르, 미셸레, W. 블레이크, 사드, 프루스트, 카프카, 쟝 주네 등입니다. 바따이유는 유럽과 미국 문학을 조망하면서,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율적 미학의 구도를 설계하지는 않습니다. 문학에 관한 바따이유의 성찰은 이전에 출간된 「주권 (La souveraineté)」의 일부 내용에 해당할 뿐입니다. 여기서 주권이란 주체의 권한으로서 배척당하는 무엇, 금지된 무엇 등을 지칭합니다. 주권은 지금까지 이질적인 것, 순수하지 못한 것, 낯선 것 등, 말하자면 차단되어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었습니다. 이로써 합목적성과 “이익의 고려” 등에 근거한 사회가 존속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주권 속에는 어떤 감염 요소, 다시 말해 폭력과 같은 파괴적인 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힘은 지금까지 이어진 (역사의) 운행을 순식간에 중단시킵니다. 모든 것을 벌컥 뒤집는, 이러한 파괴적 힘은 고대인들에게는 성찬식을 필요로 하는 무엇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왜냐면 “금지는 비밀스러운 입구를 가로막는 일을 신으로 격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장애물일 뿐 아니라, 하나의 초대”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모더니즘은 오로지 합리성과 기능성에 의하여 규정되었고, 어떤 “절대적 유용성”이라는 역설을 창출해내었습니다. 이러한 조건 하에서 법을 변형시킬 수 있는 기능을 지니는 것은 오로지 문학밖에 없습니다.

 

 

바타이유는 “미”의 전통적 개념을 악의 개념으로 대치시킵니다. 악의 개념은 하나의 날카로운 그리고 완전한 형태로서, 선에 대항하는 폭력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법” 그리고 보편적 일치성으로 간주됩니다. 악속에는 모든 비극의 근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법이 신성불가침의 의식 속에서 변형되는 곳에서는 법의 특성 변화는 가장 급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 현대 문학에 스며든 “악”은 윤리의 결핍과 결부되는 게 아니라, “하나의 과잉 모랄”을 요구합니다. 그러니까 악은 역설적으로 말하면 “선에 관한 꿈”입니다. 이는 분명히 말해서 분에 넘치는 모랄입니다. 분에 넘치는 모랄은 과잉 도덕입니다. 이것은 “윤리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되거나, 통상 “위선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바타이유는 과잉 도덕의 포괄적인 모순성을 처음부터 인정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야비하고 저열한 죄악으로부터 자신의 개념을 보호할 수 있었습니다. 저열한 죄악은 과잉 원칙을 파기시키고, 물질적 이익 탈취만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까?

 

바타이유는 혁명을 넘어서는 폭력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항상 행동을 수반하며, 새로운 법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현재 유효한 법을 부정합니다. 그러나 법은 변형 과정속에서 철폐되지 않고, 자신을 위해서 존재하는 무엇과 마주칩니다. 따라서 초월이란 법의 가장 높은 긍정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법이 없다면 법의 인간적인 의미 역시 사라질 게 분명하니까 말입니다.

 

바타이유는 문학 그리고 그렇게 규정되는 악 사이의 (기초적인 지양 불가능한) 관계에서 출발합니다. [악의 요소는 현대 문학 뿐 아니라, 과거의 모든 문학에서 발견됩니다. 문학 속에는 -현실에서 창조되어야 할 질서와는 무관하게- 변형 과정이 진척됩니다.] 악은 엉켜있는 상태에서 행위로 이어지고, 이로써 주권을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거리낌 없이 미적 인식으로 화합니다. (...) 문학은 합리적 행위를 뇌리에서 씻어버리려 하는 무질서, 균열, 저열함 등을 보여줍니다. 이로써 문학은 강렬한 (혹은 제식적인)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이는 저주받는 무엇, 배척당한 무엇 그리고 전달될 수 없는 무엇에 관한 의사소통인데, (현재 온존하는) 합리적 시스템이 파괴되어야만 비로소 형성될 수 있는 것입니다.

 

악의 부호 속에 담긴 문학은 이상주의 미학을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습니다. 사르트르가 비판한 바 있듯이, 바따이유의 시도는 유물론적 미학의 입장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합니다. 바타이유는 “참여 문학 (Littérature engagée)”을 거부하며, 이데올로기 비판적인 해석학적 방법론 역시 부정하고 있습니다. 문학은 주어진 질서를 전복시킬 수는 있으나, 그것을 다른 무엇으로 대치시킬 수는 없다고 합니다. 문학의 과제는 바타이유에 의하면 전체적 필연성을 규범화하는 일이 아니라고 합니다. 바타이유는 당시 주도적이었던 실존주의를 거부하며, 하나의 독자적인 입장을 개진한 셈입니다. 이로써 그는 당시 학자들에게 결실 없는 독단적 논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