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근대독문헌

서로박: 클라이스트의 '인형극에 관하여'

필자 (匹子) 2023. 11. 2. 11:25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H. v. Kleist, 1777 - 1811)인형극에 관하여 (Über das Ma- rionettentheater)1810년 네 번에 걸쳐 베를린 석간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이 논문은 예술 이론에 관한 극작가, 클라이스트의 아주 상세한 작업이다. 클라이스트는 고아함 (Grazie)의 이론을 개진한다. 여기서 고아함이란 당대의 개념과는 아주 벗어난 뜻을 지니고 있다. [당시 사람들은 우아함을 자연과 자유 그리고 감각성과 이성 사이의 화해로 이해하고 있었다] 클라이스트는 전통적 역사철학적 구상 내지는 어떤 구원사적인 약속 등의 의미에서 고아함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인형극에 관하여는 세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 번째 부분은 고아함의 상태 [비구분 (非区分)이라는 역사 이전의 상태]가 인형극의 예로써 정의내리고 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가시 뽑는 자라는 고대 석상과 비교될 수 있는] 어느 젊은이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로써 고아함이 어떠한 정황에서 상실되고 말았는가? 하는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고아함의 상실은 천국으로부터 추방되어 역사의 시간으로 향하게 된 결과를 지칭한다. 여기서 역사의 시간이란 구분과 대립 그리고 소외 등의 원칙으로서의 의식을 가리키고 있다. 세 번째 부분에서는 곰과의 결투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로써 클라이스트는 [세계사의 마지막 장으로서 어떤 끝없는 의식을 개방시키는 시기를 지칭하는] 고아함의 상태에 다시 되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깊이 성찰한다.

 

기계적으로 팔다리를 짜맞춘 사람이 오히려 인간적 육체를 지닌 자보다도 더 우아함을 지닐 수 있으리라는 명제는 무엇을 말해주는가? 고아함이란 -클라이스트에 의하면- 더 이상 육체와 정신을 일치시키는 무엇이 아니라, 정신없는 육체로 비참하게 축소화되었다고 한다. 클라이스트의 시각에 비치는 것은 인형 자체가 아니라, 인형을 바로 세우고 움직이도록 조종하는 배후의 기술자이다. 그러니까 바로 도구사가 인형의 영혼으로 화한다. 허나 기술자는 얼마든지 어떤 기계의 핸들로 대치될 수 있다. 고아함을 새롭게 생각하는 동안 영혼을 다루는 일과 영혼 없는 기계적 동력 작업은 얼마든지 교환될 수 있고, 마구 뒤섞일 수도 있다.

 

두 번째 부분은 의식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고아함을 파괴시키고 있다는 가설을 증명해주는 듯하다. 그러나 [의식화에 대한 은유나 다름이 없는] “거울 속을 들여다보는 시각이 이를 반증해주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는 거울 속을 들여다본다. 거울은 젊은이로 하여금 자신이 다른 사람의 호의 (gratia)”속에 있다는 것만 확인시켜줄 뿐이다. 이때 젊은이는 자신 그리고 자신과는 다른 거울속의 타자를 깨닫게 된다. 젊은이가 이를 확인하는 순간은 이른바 구분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의식이 도입되는 상징적 순간이다.

 

세 번째 부분의 이야기는 다음의 가설을 증명해내려 한다. 인식이 어떤 끝없는 무엇에 도달한다면”, 고아함은 다시금 재발견될 수 있을지 모른다는 가설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지만 세 번째 부분은 [어디에서도 고아함을 획득할 수 없는] 곰 한 마리에 관해서만 기술하고 있다. 고아함은 (상기한) 구분의 원칙이 도입됨으로써 깡그리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구분의 원칙은 대리로 나타난 부호의 질서, 진지한 충격 대신에 간계 내지 술책을 가능케 해주는 게 아닌가? 바로 이러한 부호의 질서속에서의 움직임의 기술은 곰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곰은 이러한 움직임의 기술을 따르는 게 아니라, 마냥 허공에서 무의미하게 방황할 뿐이다.

 

고아함은 구분의 원칙과는 거리가 먼 저편에 머물고 있다. 그것은 부호의 질서를 반드시 초월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는 다시금 부호의 장에서 발생하게 될 터이기 때문에, 다만 파괴된 부분, 위치 바꾸기 그리고 잘못된 논거들에 의해 지적될 뿐이다. 클라이스트의 인형극에 관하여는 바로 이러한 파괴를 상연하고 있다. 그렇기에 어떠한 (유토피아적) 논의를 처음부터 차단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