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서로박: 세 가지 망각, 너무나 치명적인 신드롬

필자 (匹子) 2023. 9. 15. 11:45

 

널 위해서 일한다고 하는 그들의 권력, 신뢰하지 마! 너희의 마음, 텅 비워 있지 않도록 깨어있어라! 행여나 빈 마음, 이용당할지 모르니. 불필요한 일, 행하라! 너희의 입에서 기대하지 않았던 노래 불러라!

(귄터 아이히: )

 

1. 모르는 게 약인가? L'ignorance est-elle bonne ?

 

망각 - 그것은 미덕이자, 불행이기도 합니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일상사 내지 가십거리는 뇌리에 떠올리지 않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합니다. 건망증은 때로는 도움을 주기도 합니다.

정치가들은 마치 어리석은 자들을 달래 주려는 듯이 유권자 님, 모르는 게 약입니다. 그러니 모든 걸 안심하고 내게 맡겨주세요하고 공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이득을 은밀히 챙긴 다음, 마음속으로 약 오르지, 바보야?“ 하고 말하면서, 쾌재를 부릅니다.

그러나 하찮은 사실 속에 깊은 의미가 감추어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크고 작은 이슈에 관여하지 않고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를 소시민으로 처신하게 합니다. 어떤 시대정신이 은밀히 용해되어 있는 정보를 은연중에 망각한다는 것은 그 자체 얼마나 커다란 비극인가요?

 

2. 불행을 기억하기란 어렵지 않은가? Nous avons du mal à nous souvenir de l'accident

 

인간 동물은 무의식적으로 과거의 불행을 뇌리에서 지우려는 경향을 지닙니다. 이에 반해서 학창 시절에 어느 선생으로부터 칭찬 받은 일은 절대로 망각되는 일이 없습니다.

어쩌면 망각과 기억의 기능은 무엇보다도 주관적 심리 상태에 의해서 좌우되는지 모릅니다. 다시 말해 인간 동물은 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기억하고, 불쾌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엇을 뇌리에서 지우려는(verdrängen)“ 경향을 지닙니다.

 

3.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 l'incapacité de faire son deuil

 

독일의 심리학자, 알렉산더 미처리히 (A. Mitscherlich)60년대 독일의 시대적 상황을 "망각의 광기"로 표현하였습니다.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룬 독일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해졌으나, 정신적으로 나태해졌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파시즘의 폭력을 기억하려 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이렇듯 미처리히의 책, 반성할 줄 모르는 무능력은 과거의 불행을 외면하는 독일인들의 의식 구조를 예리하게 비판했던 것입니다.

과거와 미래를 망각하고 살아가는 인간 동물, 그 망각의 광기 - 이는 비단 독일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4. 우리는 무엇을 망각하고 있는가? qu'est-ce qu'on oublie ?

 

그렇다면 한국 경우는 어떠한가요? 한국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망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혹은 그들의 의식 구조는 북한 사람들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요? 사람들은 어떠한 일 (혹은 놀이)을 가장 중시합니까?

이에 대한 보편적 진단은 분명히 무척 힘든 일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마다 관심사 내지 수준이 다르고 주어진 구체적 현실적 상황들이 약간씩 편차를 띄고 있기 때문이지요.

 

5 세 가지 망각 증상 trois syndromes d'oubli

 

90년대 이후의 남한 사람들의 의식 구조 속에는 어떤 공통되는 망각 증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독재에 대한 망각이고, 둘째는 사회 정의에 대한 망각이며, 셋째는 지성에 대한 망각을 가리킵니다

불과 10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는 이러한 특성들을 남한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이것들은 그야말로 하나의 병적 성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신 병리학적으로 부정적 결함을 지니고 있습니다.

 

6. 민주화 운동을 기억하라 rappelez-vous la démocratisation.

 

첫째는 독재에 대한 망각입니다. 친애하는 V, 어느 순간인지는 모르나 사람들은 더 이상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민주주의 및 이에 대한 노력과 고민 등을 잊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느 누구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독재 사회 내의 고통을 생각하려 하지 않습니다.

조봉암, 장준하 등이 어떻게 타살 당했습니까? 수많은 민주화 인사들이 얼마나 뼈를 깎는 고초를 당했는가요? 몇몇 학생들은 얼마나 억울하고도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습니까? 오호 통재라, 이들에 대해서 기억하는 자들은 오늘날 그들의 가족들밖에 없습니다.

 

7. 누구를 뽑을 것인가? Pour qui aimeriez-vous voter ?

 

시간은 고통을 잊게 해주는 특효약입니다. 아무리 커다란 이별의 고통이라도 시간이 흐르면 잊혀지지요. 그러나 시간이 흐른다고 하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게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하는 교훈일 것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교훈마저 우리가 망각하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자고로 좋은 일은 힘들고 시간을 요하는 반면에, 나쁜 일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자행될 수 있습니다. 민주화는 오랜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 하나 깜짝할 사이에 독재의 구렁텅이로 빠질 수 있지요.. 히틀러도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서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습니까?

 

8. 사회 정의를 기억하라 rappelez-vous la justice sociale

 

둘째는 사회 정의에 대한 망각입니다. 소련 그리고 동구의 기존 사회주의가 몰락한지 몇 해가 흘렀습니다. 사람들은 더 이상 사회주의의 이상인 평등 사회에 대한 꿈을 지니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눈길은 자본주의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미국 사회로 향하고 있습니다. 이제 마치 돈이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이른바 황금만능주의가 도래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라는 마이신을 맞으면서 건강을 유지해 왔습니다. 유럽에서 정착된 사회 보장 제도가 바로 사회주의의 마이신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9. 남한의 황금만능주의 Mammonisme de Corée

 

남한의 황금만능주의는 도를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는 미국에 비할 바 아닙니다. 미국에는 다만 제도가 없을 뿐이지, 빌게이츠 등과 같은 재벌이 부를 사회적으로 환원하는 사례는 너무나 많습니다. 세금도 많이 내지요. 가령 십일조와 같은 기부금에 대한 의식은 대단합니다. 그러나 남한의 부자들은 대체로 기부금에 인색합니다.

남한에서는 개인적 능력과 부 ()가 정비례하지 않습니다. 가령 제조 회사를 차리는 것보다는, 부동산업을 추진하는 게 낫습니다. 조세 평형 제도도 제대로 확립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사회 정의를 논한다는 것은 현재로서는 공염불입니다. 피해 입는 계층은 언제나 세금 공제된 월급 몇 푼에 만족해야 하는 여성들과 노동자들이지요.

 

10. 학자들의 발언을 기억하라 rappelez-vous les suggestions des intellectuels

 

셋째는 지성에 대한 망각입니다. 이것은 학자에 대한 외면과 관련됩니다. 오늘날 지식인의 발언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마치 평화기에 군인들이 일견 쓸모없는 자들처럼 보이듯이, 오늘날 지식인의 바른 말, 그들의 타당한 주장 등은 먹혀들지 않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들의 발언 가운데 긍정적으로 수용되는 때는 당장 이득을 챙길 수 있는 경우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지식인 내지 지성인이 지니는 중요한 기능은 비판의 기능입니다. 위정자든 일반 사람이든 간에 사람들은 듣기 싫은 소리를 본능적으로 싫어합니다. 그래서 언젠가 터키의 어느 술탄은 주위의 지식인들을 모조리 칼로 쳐 죽였습니다. 한마디로 지성에 대한 망각은 조만간 거대한 사회적 몰락을 초래할지 모릅니다.

 

11. 김지하의 어느 광대의 춤 Danse d'une couronne

 

가령 김지하의 작품들 가운데 훌륭한 시들도 많지만, 나는 산문집 에 실린 다음과 같은 광대 이야기를 가장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어느 초봄 벙어리 (?) 광대는 아내와 함께 시골 장터를 찾아 떠납니다. 살얼음이 언 호숫가를 지나다가 그만 아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립니다. 벙어리 광대는 혼자 아내를 구출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호수 가에서 혼절할 듯 춤을 춥니다. 그것은 아내의 위험 그리고 구조를 요청하는 처절한 춤이었습니다. 그러나 모여 있던 사람들은 광대의 진의를 모르고, 박수만 치고 있었습니다.

지식인의 발언은 공허한 메아리조차 남기지 않아야 하는가요? 그렇다면 그것은 예언녀 카산드라 (Kassandra)의 눈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카산드라는 전쟁의 위험을 예견하는데, 주위 사람들은 그미의 말을 마치 늑대 소년의 외침으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12. 살찐 돼지로 계속 살아갈 것인가? Vivez-vous comme un gros cochon ?

 

사회 정의는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구질서의 권위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각자의 존재가 모든 도덕과 윤리를 마음대로 결정하는 소시민의 세상이 도래했습니다. 교권이 무너지고 학교 폭력을 둘러싼 학부형들의 민원이 번번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진정한 삶에 대한 희망은 오로지 재화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대안은 무엇일까요? 첫째로 우리는 정치가들로 하여금 모든 칼자루를 쥐게 해어서는 안 됩니다. 개개인들의 감시 기능이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입니다. 노동자 그리고 여성 등의 권익을 옹호하는 정당 내지는 시민 단체가 활성화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바람직한 조세 제도를 정착시키고, 사회 보장 제도를 서서히 체계화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인이 거대한 밥솥을 서로 나누어 먹는다는 사회의식을 쌓아나가야 합니다. 셋째로 학자, 지식인 그리고 예술가들의 비판적 발언은 수용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육, 학문 그리고 문화 사업 등은 국가의 더 많은 재정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는 모두 키르케(Circe)의 술수에 의해 살찐 돼지가 된 오디세우스처럼 오랫동안 희미한 망각의 동굴 속에서 최면 상태에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