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서로박: (2) 미처리히의 '반성할줄 모르는 무능력'

필자 (匹子) 2023. 7. 16. 10:37

(앞에서 계속됩니다.)

 

6. 사회적 인간, 체제 순응주의: 미처리히의 책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단락은 아무래도 ?도덕의 상대화 - 우리의 사회가 용인해야 하는 모순들에 관하여?입니다. 도덕적 질서 없이는 그룹 내의 공동적 삶은 결코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싫든 좋든 간에 어떤 사회 형태의 일원입니다. 그렇기에 개개인은 제각기 배워나가야 하는 수많은 질서들을 모조리 거부할 수 없습니다. 영혼을 조절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체제로서의 자아를 생각해 보세요. 자아는 교육의 과정 속에서 충동의 포기를 견뎌낼 수 있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개인은 교육자와 동일하게 사고함으로써 내면에 초자아와 이상적 자아 등이 형성됩니다. 이로써 개개인들은 계명 그리고 금지 사항을 추종할 수 있게 됩니다.

 

문제는 이로써 인간들이 자신도 모르게 체제 순응적으로 바뀐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를테면 일본인들은 “남에게 피해주지 말라.”를 가장 빨리 가르칩니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남만 배려하면서 살게 되면, 자신의 내적 열망은 언제나 약화되고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무조건적인 체제순응적인 생활방식은 한 인간을 심리적으로 망칠 때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감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준수하며 살아가게 합니다. 이러한 체제순응주의는 자신의 심리를 병들게 할 뿐 아니라, 정의로운 사회의 방향성을 상실하도록 작용합니다.

 

7. 미처리히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가?: 미처리히의 책은 나치 과거를 망각하려는 서독인의 심리적 태도를 예리하게 구명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책은 과거를 비판적으로 분석하여 해답을 찾지 못하는 독일인 전체의 병적 성향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유대인 학살의 근원을 파헤쳐서 비극적 사건의 근본적 원인을 파헤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타 인종에 대한 증오심의 근원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밝혀내어 자신의 죄악이 무엇인지를 일차적으로 깨달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고로 가해자가 일차적으로 행해야 하는 것은 자신의 범죄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분명히 직시하는 일입니다. 어쩌면 가해자가 자신의 범행과 범행의 근본적 이유를 분명히 깨닫지 않은 상태에서 피해자 앞에서 사죄하는 일은 시기상조일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야 말로 미처리히가 우리에게 전하려는 마지막 결론과 같습니다. 적어도 개개인에게 자기 성찰을 불러일으키는 자기비판이라는 망치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범행에 대한 근본적 깨달음은 요원한 일일 것입니다.

 

8. 국화와 칼: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과거의 참상에 관해서 거의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관동 대지진 당시의 학살 사건을 잘 모르고, 정신대에 끌려간 한국 처녀들의 평생 지속되는 저주와 치욕을 잘 알지 못합니다. 젊은 일본인들은 과거사가 자신과 관련되지 않으므로 책임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전쟁에 참가한 나이든 일본인들 역시 자신의 죄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에 대한 최소한의 공공연한 반성이 출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일본 사회에서 비판적 자아보다는, 전체주의적이고 군국주의의 생활관이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이 고립된 섬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오래 전부터 대륙과는 차단된 환경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적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자신을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지지 않았던 것이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일본에서는 자결하는 행위가 미화되었는지 모릅니다. 폭력으로부터 도망칠 수단이 배제된 사람이 마지막 명예를 지킬 수 있는 방도는 하라키리, 즉 할복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도망치면서 저항하는 행동관은 일본에서는 조금도 자라나지 못했습니다.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에 묘사되고 있듯이, 대다수의 일본인들에게는 “칼”을 감추고 “국화”를 드러내는 엉큼한 복종심은 “섬나라”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생겨나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도주의 가능성이 차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특유의 복종심 내지 집단주의가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되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24. 다시 일본인 가해자들: 일본에서는 기독교의 전파가 순조롭게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 현재 일본의 기독교 신자는 0.5%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 역시 선불교와 사무라이 문화의 영향 때문일까요? 과연 선불교가 얼마만큼 탈-개인적인 군국주의와 관련되는가? 하는 문제는 차제에 학문적으로 밝혀져야 할 것입니다. 자고로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명제는 근본적으로 알량한 정어리 떼의 항변과 같습니다.

 

작은 사람 (倭人), 군국주의자들의 눈에는 상어 떼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회의 전반적인 자발적 정책으로서 보복의 정의를 실행하는 것보다는 하워드 제어Howard Zehr가 언급한대로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관철시키는 일일지 모릅니다. 후자는 한국의 두레 공동체에서 행해지던 방법이었습니다. 가해자의 잘못을 일방적으로 묻는 대신에 상처의 치유와 인간관계의 회복하는 일이 시급할지 모릅니다. 가령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이와 관계되는 모든 당사자가 진심어린 대화를 통해서 상처를 치유하고 적대감을 약화시키는 방식이 바로 “회복의 정의”를 가리킵니다. 과연 정신대에 끌려간 할머니들과 일본군들이 회복적 정의를 위해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것은 가능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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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전: 위의 원고는 다음의 문헌에서 발췌한 것이다. 박설호, 호모 아만스. 혹은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울력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