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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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로 돈은 두 가지 기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빵 가게에서 빵을 사기 위한 교환의 기능이며, 다른 하나는 증권거래소에서 취급하는 자본으로서의 축적 기능입니다. 대규모 자본으로서의 돈은 매니저에 의해서 관리되며, 최대의 이윤을 올리도록 투자합니다. 그리하여 자본은 자동으로 증가하고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합니다. 그리하여 나타나는 것은 국가와 국가 사이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입니다. 선진국의 자본은 도저히 셀 수 없을 액수로 증가하고, 세계의 5분의 4에 해당하는 나라는 더욱더 찢어진 가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미하엘 엔데는 돈의 두 가지 기능 가운데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 하고 묻습니다. 현대의 지구상의 황폐한 삶을 고려한다면 금융 시스템의 대대적인 변화는 필수적이라고 합니다. 금융 시스템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인위적으로 변모될 수 있다고 엔데는 믿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 변화라고 합니다.
벨기에 출신의 경제학자 가운데 요한 실비오 게젤 (Johann Silvio Gesell, 1862 - 1930)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돈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세월이 지나면 사라져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케인즈 역시 실비오 게젤을 인용하며, 그의 사상을 부분적으로 인정한 바 있지요. 돈 역시 노화되어야 합니다. 돈으로 산 것은 모두 소비됩니다. 감자는 먹어서 소비되고, 구두는 닳아서 없어집니다. 그러나 물품 구매에 사용된 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물건으로서의 돈과 소비 물자 사이에는 부당 경쟁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Friedrich Salzmann (Hrsg.): An die Überlebenden. Gedanken von Silvio Gesell, Heidelberg 1948, S. 10 f.) 실비오 게젤에 의하면 돈 역시 사멸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돈역시 마치 인간의 혈액처럼 순환되다가 언젠가는 반드시 사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1929년 세계 대공황 이후 오스트리아의 뵈르글이라는 도시에서 놀라운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인플레이션의 여파로 사람들은 소시지 하나 구입하는 데 두툼한 돈다발을 건네주어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자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장이었던 미하엘 운터구겐베르거 (Unterguggenberger, 1884 – 1936)는 현행 화폐 이외에 노화하는 화폐시스템을 도입하였습니다. 그것은 매월 1퍼센트씩 화폐 가치가 감소하도록 고안된 “소멸 화폐 Schwundgeld”를 가리킵니다. 시민들은 매월 1 퍼센트 지분의 스탬프를 사서 노화하는 돈에 첨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방식이었습니다. 노화하는 돈을 소유하는 사람은 경제적으로 손해입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 돈을 즉시 사용했습니다. 돈은 소지자가 바뀌면 바뀔수록 구매력이 증대합니다. 하루 두 번 소지자가 바뀌는 화폐의 구매력은 하루 한 번 소지자가 바뀌는 화폐의 그것보다 큽니다. 2년 후에는 뵈르글에서는 실업률이 현저하게 낮아졌다고 합니다. (Klaus Rohrbach: Freigeld. Michael Unterguggenberger und das „Währungswunder von Wörgl“. Möllmann, Schloß Hamborn 2001.) 돈을 빌리더라도 이자를 지출할 필요가 없으므로 모두 돈을 빌려서 일을 시작한 것입니다. 시의 부채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국가는 1933년 9월에 노화하는 돈의 사용을 금지하고 말았습니다.
문제는 돈이 교환의 수단으로 기능하는 게 아니라, 돈이 상품으로 매매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막아야 할 것은 “화폐의 기괴한 자기 증식”이라고 합니다. 미하엘 엔데는 돈에 관한 사색을 계속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종교와 권력이 사람들을 다스렸습니다. 정신세계를 관리하는 자들이 사제들이라면, 권력을 관리하는 자들은 왕 내지는 제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19세기 초 산업혁명이 이룩된 뒤부터 종교와 권력 외에도 제3의 지배 요소가 첨가되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경제적 요소입니다. 성장하는 시민계급의 경제력이 바로 그것이지요. 한마디로 말해서 19세기 이후로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세 가지 요소는 영성의 요소, 정치 권력의 요소 그리고 경제적 부의 요소를 가리킵니다. 이와 관련하여 엔데는 오스트리아의 신비주의 철학자 루돌프 슈타이너 (Rudolf Steiner, 1861 - 1925)의 “사회의 세 가지 계층이론”을 인용합니다. 슈타이너는 사회 전체를 정신, 법 그리고 경제라는 세 가지 기능으로 나누었습니다. 이를테면 인간의 정신 내지는 문화생활에는 자유가, 법적인 생활에서는 평등이 그리고 경제생활에서는 상호부조의 힘이 작용해야 한다고 합니다. (Rudolf Steiner: Aufsätze über die Dreigliederung des sozialen Organismus und zur Zeitlage 1915-1921. Dornach 1961, S. 215f) 여기서 말하는 세 가지 기능은 프랑스 혁명의 격언이었던 “자유 평등 그리고 동지애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라는 시민사회의 이상과 직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세 가지의 서로 다른 사회의 차원 속에서 살아갑니다.
인간은 재화를 생산하고 소비하며, 법을 준수하며, 예술을 사랑하며 살아갑니다. 국가의 사명은 미하엘 엔데에 의하면 세 가지 이상 전부를 한꺼번에 실현하는 기관이 아닙니다. 국가는 법률을 만들어 적용해야 하는 조직입니다. 따라서 평등의 이상, 그것도 법 앞의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요청됩니다. 국가는 정신 내지는 문화 그리고 경제의 차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존 사회주의가 실패로 돌아간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국가에 모든 것을 일임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박종현: 돈이 늙어가는 사회를 꿈꾼 슈타이너와 게젤, 박종현의 이코노미피아 970호, 한겨레 21, 2013년 7월 17일자.)
미하엘 엔데가 지금까지 언급한 사항을 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인의 삶은 물질적으로는 어느 정도 풍족하게 되었지만, 이는 자연의 파괴 그리고 제 3세계의 가난을 담보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인들은 한편으로는 영성 혹은 문화 예술적 판타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기형적으로 발전한 돈의 문제를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합니다. 돈은 엔데에 의하면 더이상 상품의 기능으로 활용되어서는 안 되며, 오로지 재화의 교환 기능으로 축소화되어야 합니다.
이를 실행하기에는 힘든 난관이 도사리고 있지만, 거대한 국제 금융의 시스템 역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을 고려한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나아가 국가 역시 개개인의 모든 삶에 개입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국가는 법의 평등과 공정한 법 적용에만 충실하면 족하고, 경제적 사항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엔데는 “가난을 두려워하는” 인간의 의식을 바꾸는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메가 시스템 속에서 돈의 노예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어쩌면 울력 공동체를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안 화폐를 사용하며 상호부조의 정신으로 서로 돕고 살아가는 생태 공동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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