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시인, 고은의 『만인보 (万人譜)』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 4월 19일이면/ 해마다/ 그들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찾아왔다// 그 무덤 저만치/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무덤 다섯/ 무연고 묘지/ 누구의 자식일지 모를/ 그 혁명의 거리에서/ 쓰러진/ 이름 없는 젊은이의 무덤 다섯// 바로 그 무덤 속의 젊은이를/ 그의 양자로 삼아/ 해마다/ 향과 초/ 떡과 소주를 가지고 와/ 제사지내는 사람이 있다// 표문태 (...)”
나: 네. 고은의 시구를 읽으면, 표문태가 어떠한 인물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민주화 운동의 영웅들을 혼자 기리는 분이 바로 작가 표문태 (1914 - 2007)였습니다, 쉰에 가까운 그에게는 20대의 다섯 청년들은 아들과 다름이 없었지요.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삶의 아픔으로 받아들인 의인이 바로 표문태였습니다. 그는 이름 없이 죽어간 다섯 젊은이들을 양자로 삼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표문태는 식민지 청산과 분단의 극복 그리고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리는 일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관건이라고 확신했지요.
너: 표문태는 1987년 『버림받은 사람들』 (중원문화)이라는 책을 간행했지요?
나: 그렇습니다. 이 책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서, 강제로 일하다가. 원자 폭탄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수기가 실려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표문태가 작품 창작만 중시한 게 아니라, 통일 운동 그리고 반핵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섰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표문태에 의하면 어떠한 경우에도 죄악과 타협하지 않는 일, 그리고 주어진 권력과 금력에 굴복하지 않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개인의 이름을 내세우고, 명리 (名利)를 추종하는 작가는 얼마나 많은가요?
너: 언젠가 선생님은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진 한국의 소설가 가운데에서 잊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있다고 하셨지요?
나: 그렇습니다. 한분은 최상규이며, 다른 한 분은 표문태입니다. 최상규가 문학적으로 놀라운 상상을 독자들에게 제공했다면, 표문태는 우리에게 인간적 기개와 신념이라는 자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내가 젊은이였을 때 소설 「서러운 사람들」을 읽고 커다란 감명을 받은 적이 있지요.
너: 박태일의 시 「두 딸을 앞세우고」는 작가 표문태를 생각하면서 집필된 것입니다. 이 작품은 시집 옥비의 달에 실려 있는데, “표문태 님”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습니다.
살아 한 번도
집을 지니지 못한 일이
무슨 자랑이라는 눈빛이시지만
일찍부터 너른 마당에 고방에
그대 한 커다란 집이었느니
밀양 사람 다 알지 밀양 땅 좁아
밀양강 줄기는 다시 한 번
용두목에서 꺾였던 것을
밀양강 없이 살아온 그대
밀양이 언제 기억했던가 그래
그대마저 그대를 기억했던가
세월 흘렀다고
시절 흘렀다고
이제는 늙어 희어 고요히 입 다무시나
먼 산 돌길 단풍단풍 구르는 날
두 딸을 앞세우고
찬찬히 찬찬 걷는 그대 뒤 따르면
영남루 대바람 소리
가슴을 찬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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