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블로흐: (1) "굴종의 회개인가, 성령의 수용인가" 루터 비판

필자 (匹子) 2023. 5. 3. 09:52

아래의 글은 블로흐의 "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에 실린 것입니다. Ernst Bloch: Thomas Muenzer als Theologe der Revolution, Frankfurt a. M. 141 - 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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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개혁과 이단 종파에 대한 탄압이 이어진 다음에 사람들은 단 한 번이라도 순결한 믿음을 고수할 수 없었다. 가련한 인간 루터는 오로지 굴종을 드러내면서 자기 자신을 숨길 수 있었다, 원죄 자체는 그대로 존속될 뿐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서 단 한 번도 파기되거나, 돈으로 보상받을 수가 없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루터에 의하면 원죄로 인하여 더럽혀진 존재로 계속 지상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제아무리 좋은 일을 행한다고 해도 인간의 공과는 풍요롭고도 가치 있는 행위로 인정받지 못한다. 제후는 돈과 권력을 휘황찬란하게 자랑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인은 원죄로 인하여 단 한 번도 성스러운 존재로 인정받지 못한다. 올바른 정신을 지닌 인간의 광채는 이승에서 그리고 저세상에서 본연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성스러운 인간이 세속적 하부 질서에 의존하는 “여기”의 삶에 개입하는 경우는 드물다.

 

한 인간은 무언가를 모범적으로 깨우쳐서 잃어버린 기적을 발견해내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성자가 제아무리 영향을 끼치려고 노력하더라도, 이는 칼뱅 사상을 신봉하는 서클 사람들의 눈에는 아이러니하게 비칠 뿐이다. 가령 그들은 성자의 영향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일갈한다. 즉 신은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성자의 마음속으로 잠입하여 신의 존엄성에 관한 단순한 가상만을 일깨웠다고 말이다. 그렇게 되면 신의 특성은 끔찍하게도 다른 삶 속에 자리하는 저주로 인지되어 세인을 놀라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루터에 의하면 운명적으로 근원적인 죄악에 속하는 원죄 내지는 신에 의한 유죄 판결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한다. 정의로움은 루터의 견해에 의하면 인간의 영역 바깥에 머물고 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하여 츠빙글리는 루터의 사고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시적인 표현의 구절을 암송하였다. “오로지 신만이 운명이라는 전차를 뒤집을 수 있다.” 그렇기에 구원받으려는 자는 루터에 의하면 오로지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암탉의 날개 속에 자기 자기 자신을 숨기는 일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영혼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시킴으로써 피조물들의 죄를 사하는 권능을 얻게 되었다는 것이다.

 

원래 이전의 신학자들은 피조물의 영역 그리고 은총의 영역을 철저히 구분한 바 있었다. 그런데 루터는 피조물들이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 얼마든지 신의 은총을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어떠한 무엇도 은총의 영역에 관여하거나 인위적으로 개입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죄악은 결코 정신적으로 근절될 수 없으며, 구원 역시 피조물 특유의 방식으로 전달받아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한다. 말하자면 신 외에는 누구도 원죄의 힘을 파기할 능력을 지닐 수 없다. 이를테면 주어진 세상에서 제후만이 죄악의 출현 가능성을 아예 처음부터 없애기 위해서 이를 차단하고 금지하는 모든 권한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논리로 루터는 형이상학적인 세계에서 모든 피조물을 모조리 악마에게 혹은 유다 내지는 유다의 태도에 동조하는 사람들에게 이양시키고 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빛이라는 놀라울 정도로 변모 가능한 에너지에 대한 모든 가능성조차 차단되어 있다. 죄악은 루터에 의하면 국가든 신앙의 영역이든 간에 선(善)의 내부에 자리한다. 루터의 이러한 비밀스러운 마니교 사상은 악마라는 소름 돋는 현실적인 개념에서 다시 반복되어 드러나고 있다.

 

루터는 인간에게 오로지 완전히 밝힐 수 없는 죄악만을 부여한다. 전지전능한 신은 인간과는 달리 특정 기독교인들을 지옥에서 빼내어 천국으로 인도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게 말하자면 신의 의지라는 것이다. 루터의 이러한 이론에는 마니교의 선악의 이원론이 깃들어 있는데, 여기에는 마니교와는 달리 어떠한 투쟁적 의향도 자리하고 있지 않다. 루터에 비하면 이슬람의 전투적 전언, 기독교의 묵시록, 천년 왕국설 등은 얼마나 놀랍고도 강렬한 투쟁적 열정을 드러내고 있는가? 루터는 어떠한 전투적 의향을 용인하지 않고, 오로지 은총만을 내세움으로써 그의 전언은 정지 상태로 머물고 있다. 이로써 그는 주어진 현실의 긴장 상태를 극복하고, 가난과 고통이 없는 천국 내지는 천국의 일원성을 창조하려는 모든 인간적 요구 사항을 일거에 무시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은총을 입게 되었을 뿐, 순수한 영혼을 체득하거나, 구원받지 못한다. 인간은 오로지 신의 자비로움에 의해서 정당화될 뿐이다. 인간 존재는 은총을 내리는 하나님 내지는 인간을 보살피는 신 앞에서 영원히 저주받아야 하는 영혼을 드러내야 한다. 이러한 신앙은 한마디로 아무런 토대를 지니지 않는 믿음에 불과하다. 루터는 인간, 성스러운 사람들 그리고 이들이 겉으로 이룩해낸 공과 등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모조리 저버리고 있다. 이러한 입장은 종교적인 비-자발성을 강화하게 한다. 그렇게 되면 성찬식을 통한 세례 의식이 과거에 행해진 바 있듯이 수동적 자세로 하나의 권위적 마법으로 이해될 뿐이다. 종교적 믿음 속에 인간의 자발적인 의자가 추호도 남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죽음이 신의 은총이라는 보물창고를 창조했다는 사고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이러한 보물창고가 인간에 의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주체 초월적인 토대로부터 기독교 사상과 가시적으로 일치되는 무엇을 하나의 자양으로 획득하게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교회의 자산이며, 나아가 유일하게 현존하는 종교적 실체,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루터에 의하면 성서야말로 인간에게 주어진 원죄를 사해주는 은총에 관한 순수한 전달자의 역할을 지닌다. 기독교인은 성서를 접함으로써 기적의 힘 그리고 객관성이라는 완전한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성서의 말씀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장소에서만 신의 은총이 영향을 끼치는데, 그 장소는 바로 교회라고 한다. 신의 말씀은 성서의 내용을 순수하게 전하고 설파하는 교회에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성서의 바깥 영역에서는 신의 작용이라든가 계시는 존재할 수 없다. 말하자면 성당이라는 권위적인 체제 속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존재한다고 한다. 그렇기에 성당은 구세주를 대리하여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적 만족을 안겨주는 단체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구원을 경험하게 해주며, 구원을 생산해내는 통치자라는 것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루터의 복음 해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