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블로흐: (2) "굴종의 회개인가, 성령의 수용인가" 루터 비판

필자 (匹子) 2023. 5. 3. 09:54

(앞에서 계속됩니다.)

 

물론 루터의 이러한 구원에 대한 기대감이 실행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일반 신앙인들이 구원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거나, 자신의 영혼이 순화되며, 현실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아들이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렇지만 교회에서 성찬식을 거행하면서 성서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신자들은 신의 은총을 어느 정도 감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인간의 죄를 사해주는 복음을 통해서 신의 순수한 자비로운 마음을 소환해낼 수 있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서 성서의 내용을 접하게 되면, 어떤 은총의 실체가 자신의 몸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완전히 객관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범위에서 객관에 합당한 은총의 실체를 생각해 보라. 루터의 사상은 여기서 너무나 기이할 정도로 절반의 객관적 특성을 획득하고 있다. 말하자면 루터는 일견 성서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내면의 정신적 성찬식만을 강조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존재 자체 속의 도사리고 있는 신앙심 그리고 이로 인해 충족된다고 하는 신의 은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적인 자극이 성숙한 무엇으로 수용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루터의 경우 믿음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능동성과는 거리가 멀다. 신앙인의 마음속에는 자아의 모든 저열한 기능이 완전히 사멸되어 있다. 그뿐 아니라 믿음 속에는 인간의 영혼이라든가 구원 속으로 밀쳐 들어가려는, 측정이 가능한 막강한 힘의 면모는 처음부터 아예 근절되어 있다. 인간의 영혼은 다시금 가련하고도 처참하게 변하여, 거기에는 자신의 고유한 무엇으로 향하려는 동경은 아예 머물지 못한다. 왜냐면 동경의 마음속에는 지금까지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다시금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원래 품었던 동경의 의향을 압사시키고, 직접적으로 모든 생기 넘치는 기운을 되돌려 놓는 신적인 무엇이다. 그렇게 되면 제아무리 신앙심이 투철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자신이 숭배하는 신앙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신의 존재가 어떤 서서히 망가지는 보물을 담은 그릇이라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물론 경건한 인간이 신을 갈구하는 모습은 찬란한 희열감을 암시적으로 전해줄지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영혼은 전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할 것이다. 설령 한 인간의 영혼이 마치 구원받은 모습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한마디로 신에 의해 생성되고 연출된 오래된 거친 장면의 작품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구원받은 인간의 찬란한 상은 나중에 임의로 얼마든지 파괴될 수 있다. 왜냐면 루터가 생각하는 은총의 상태는 –칼뱅의 그것과는 달리- 얼마든지 가볍게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은총은 거칠고 황량한 원죄로 인하여, 특히 자신의 정신적 에너지에 대한 독선적인 신뢰감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사라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은총의 상태는 한마디로 숙명적으로 확정된 게 아니다. 그래서 루터는 무엇보다도 생존을 위해서 무언가를 실천하는 사랑 그리고 이와 결부된 믿음을 처음부터 거부한다. 그렇게 해야만 “오로지 믿음sola fide”이라는 가르침이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신을 바라볼 수 있는 인간은 세상에서 결코 살아남을 수 없다. 루터는 일견 지조를 강조하고, 선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자세가 루터에게 개인적으로 가까이 다가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기에는 인간이 자발적 의지로 참여할 수 있는 부분은 하나도 없다.

 

루터는 주님이 사랑하는 게 “섬세하고, 부드러우며, 유연하고도 여유 넘치는 영혼”이라고 칭송한다. 루터의 이러한 갈망의 상은 후기 고딕 시대의 조형 예술 속에 예술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가령 후기 고딕 시대의 건축물과 조각품에는 주님에 대한 깊은 경배와 경건한 마음이 구상적으로 드러난다. 그렇지만 후기 고딕 시대의 건축물에서 드러나는 순수함에는 인간적 특징과 의향이 추호도 반영되어 있지 않다. 다시 말해서 루터가 지향하는 갈망의 상 속에서 인간 존재로서의 주체는 완전히 초월해 있을 뿐이다. 인간 존재는 완전히 신앙과 신학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우리는 루터에게서 인간의 여러 가지 의향, 이를테면 개개인의 소름 돋는 열정이라든가 신을 바라보는 유유자적한 인간의 시각 등을 전혀 발견하지 못한다.

 

루터는 자신의 문헌에서 이따금 자신의 주장을 옹호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내향성이라든가, 지조, 인간의 믿음 그리고 인간적 신념 등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아가 그는 외부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성찬식과는 별도로 인간의 도덕적이고 신비적인 마력적 기능을 부수적으로 거론해야 했다. 그렇지만 루터의 이러한 발언들은 전체적 맥락을 고려할 때 그저 피상적인 지적에 불과하며, 언어적으로 모호한 표현 그 이상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한다. 루터는 성서에서 퍼져나오는 찬란한 빛을 강조하지만, 그 빛은 인간의 영혼 그리고 내면에서 활활 타오르는 게 아니다. 루터가 말하는 찬란한 빛은 신비로운 인간 심리로부터 전적으로 동떨어져 있다. 그것은 심지어 가톨릭교회의 종교적 예식이라는 객체보다도 더 먼 곳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할 정도이다. 루터의 신앙은 이런 식으로 이리저리 뒤섞이고, 규범에서 벗어나 있으며, 계율과는 무관하게 자라났다고나 할까.

 

사실 루터는 구원을 체험하려고 할 때 어떤 순수한 영혼을 바라본 바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상으로 용해된 악마의 형상이었다. 그러나 찬란한 빛이 이러한 빛을 묘하게 가리게 되었으므로, 루터는 더 이상 이를 분명하게 관찰할 수 없었다. 이때부터 그는 더 이상 무언가를 직시하는 대신에 눈을 감은 채 그리스도 내지는 신을 믿는 일에 혼신을 다하게 된다. 루터는 인간 의지의 모든 영향력을 포기하고, 이를 마치 아무런 토대가 없는, 음악과 같은 심층부라고 간주하면서, 이로부터 거리감을 취했다. 내적인 신앙이란 마르틴 루터에게는 마치 음악이라는 객체 그 자체이며, 오로지 내면으로 파고드는 음악적 감동으로 인한 영혼의 떨림만을 느끼게 하는 행위로 이해될 뿐이다. 그런데 루터 신앙의 심층부에서는 기이하고도 놀라운 “음향”이 생략되어 있다. 이러한 음향은 신비주의자들의 어떤 예견과 관련된다. 오래전에 신비주의자들은 거시 우주를 눈으로 고찰하기 위해서 “신의 축복에 대한 투시 visio beatifica Dei”를 통해서 무언가를 예견하려고 했다. 그런데 신비주의자들의 이러한 음향, 예견 그리고 투시 등은 루터의 경우 신앙과의 진정한 일치성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믿음이란 즉자존재의 내부에 직접적으로 귀를 기울이고, 어떤 가득 찬 밝음을 경청하며, 현존 그 자체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는 일이다. 가슴속 깊은 토대의 두근거림을 청취하고 이해하는 일이야말로 믿음을 통한 신실한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의 믿음은 바로 여기, 가슴속 둔탁함, 내적인 비-장소, 초자연적으로 은폐된 마음속의 비-전망성 속에 도사리고 있다. 그런데 루터는 이를 철저히 무시하고, 오로지 어떤 만족스러운 양심의 위안만을 중시할 뿐이다. 이러한 입장 속에는 인간적인 부분이 오로지 “그리스도로 이해되는 확고한 일치firmus assensus, quo Christus apprechenditur”로 머물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오로지 신만이 “믿음으로 인도하는 신앙fides, qua creditur”으로 작용할 뿐이다.

 

오로지 전지전능한 주님만이 인간에게 신앙을 느끼게 해주며, “믿음으로 인도하는 신앙”은 인간의 죄를 사하는 식의 은총을 안겨준다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수동적으로 믿음을 받아들이는 일밖에 없다. 여기에는 어떠한 인간의 능동적 포착 행위도 자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든 도덕적 순화 행위와는 무관한, 믿음을 그냥 수동적으로 수용하면 족하다. 이로써 루터는 일견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강조한 정서적 신앙 행위를 그대로 수용한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믿음이 오로지 모든 사변적인 발광 에너지 그리고 이를 통한 정신적 깨달음이라는 사실을 거부하고 있다.

 

(계속 이어집니다.)

 

마르틴 루터는 반유대주의자였으며, 사생활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했다. 그는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를 유혹하여 결혼했는데, 6명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 루터는 일기장에 "일주일에 두 세번 그미와 사랑을 나누면 문제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라고 기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