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림 (명저)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4 서문

필자 (匹子) 2023. 3. 5. 12:09

“더 나은 무엇을 갈망하지 않는 인간은 가련하다” (Freud)

“희망을 포기하거나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자들은 언제나 회의적 세계관을 지닌 실증주의자들이었다.” (Bloch)

“더 나은 미래를 떠올리는 자는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부자유의 질곡에 갇혀 있는 자이다.”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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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은 그냥 막연히 누워서 감 떨어지기를 바라는 수동적 자세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그리고 여기”의 끔찍하고 참혹한 개인적 사회적 정황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아 바로 “터득한 희망docta spes”입니다. 에른스트 블로흐는 “새로운 무엇”을 찾으려는 갈망은 절망과 반대되는 정서가 아니라, “개인과 사회가 차제에 누려야 하는 자유와 평등의 구체적 가능성의 탐색”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낙관하지 않는 희망” (Terry Eagleton)과 연결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에서 중요한 것은 유토피아의 문헌에서 피상적으로 묘사되는 어떤 찬란한, 혹은 추악한 가상적 현실상이 아니라, 이러한 상의 배후에 도사린 작가의 시대비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유토피아의 흐름을 논할 때 유토피아 사회상 내지 사회 유토피아를 설계한 개별 작가들이 처한 시대의 난제들 그리고 주어진 현실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주어진 현실 그리고 가상적으로 설계된 현실 사이의 차이를 살피게 되면, 우리는 개별 유토피아 작가들의 시대 비판을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제 4권은 19세기 말부터 1940년의 시점까지의 시기에 출현한 문학 유토피아를 천착합니다. 이 시기의 유토피아는 자본주의의 생산양식과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자고로 자본가가 부를 확장시키는 데 가장 안전한 방식은 토지와 부동산을 차지하는 일입니다. 토지와 부동산은 눈앞에 가시적으로 주어져 있으니, 매번 번거롭게 주판을 두드리며 계산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역사적으로 고찰하면 모든 전쟁은 땅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이는 자본주의의 생산 양식에 근거한 법 규정에 의해서 정당성을 획득했습니다. 유럽 국가들은 19세기 후반기부터 서서히 제 3세계에서 식민지를 차지하기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는데, 이는 이윤을 창출하기 위한 영토 확장의 사업에서 유래한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열강들은 발전된 과학 기술을 최대한 활용하여, 무주물선점 (無主物先占)이라는 독점적 원칙을 무지막지하게 현실에 적용하였습니다.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가담한 프로이센은 열강들과의 마찰을 빚었는데, 발칸 반도의 갈등과 위기는 결국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고 맙니다.

 

19세기말 이후의 유토피아는 모리스, 로시 그리고 길먼을 제외하면, 대체로 부정적이고 경고의 대상으로서의 사회 유토피아, 다시 말해 디스토피아의 모델을 보여줍니다. 르네상스 시대에 국가는 개개인들의 삶의 행복을 배후에서 돕고 지지하는 등 긍정적 기관으로 존속했는데, 19세기 말에 이르러 사악한 “리바이어던”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리바이어던은 히브리어의 어원에 의하면 “빙글빙글 돈다.”는 뜻을 지니는데, 그 자체 회오리바람의 격랑으로 세파에 휩쓸린 생명체들을 모조리 죽음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가는 괴물입니다. 19세기에 이르러 국가는 자본주의의 경제 시스템과 야합하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개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하고 어지럽히며, 전체주의적 압박을 가하는 기관은 언제나 국가의 몫이었습니다.

 

자본주의의 경제 시스템은 거대한 국가를 결성하도록 작용했고, 결국에 이르러 세계대전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 또한 국가 이기주의라는 의혹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특히 1917년에 출범한 소련을 고려해 보세요. 소련은 여러 가지 유형의 사회주의 유토피아를 자극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예로서 우리는 보그다노프의 화성 유토피아, 프레오브라센스키의 산업 유토피아, 차야노프의 농업에 기반을 둔 자생적 유토피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멘셰비키에 대한 볼셰비키의 숙청 그리고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의 횡포는 다른 인종에 대한 극한적 살인과 만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는 이전에 출현한 디스토피아 문학 속에 끔찍한 선례로 묘사된 바 있습니다. 그렇다고 19세기 말 이후의 문학 유토피아가 오로지 디스토피아의 유형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종교적, 인종적 그리고 성적인 차원에서 인간의 불평등은 여전히 비일비재하게 출현했는데, 이로 인한 갈등은 작가들로 하여금 다양한 유토피아를 창안하도록 자극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운동은 수 세기 동안 진척되어 온 유대인들의 시오니즘 그리고 여성들의 여권신장을 위한 페미니즘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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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부터 유럽인들은 더 나은 삶에 관해서 더 이상 열광적으로 갈구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강하게 작용한 것은 경제력의 상승 그리고 과학 기술의 발전이었습니다. 어쩌면 망각의 시대는 이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게 있습니다. 즉 더 이상 찬란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체제안주적인 태도를 취한 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간에- 항상 실증주의자들이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참되다고 믿는 자들은 처음부터 어떤 비가시적인 사항을 무시합니다. 이들에게는 눈앞의 현재만이 중요할 뿐이며, 과거와 미래 그리고 시대를 관통하는 변화과정은 하나의 허상으로 이해됩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증주의자들은 비가시적이고 통시대적인 변증법 그리고 이와 결부된 학문적 형이상학을 처음부터 폄하하고, 오로지 인성과 자율적 삶에만 커다란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철학자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표방한 논리 실증주의는 놀랍게도 디오게네스Diogenes의 학문적 회의주의와 절묘하게 결착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실증주의는 오늘날 대부분 자연 과학자들의 세계관과 접목되어, 인문 사회과학의 영향력을 상당 부분 위축시키고 말았습니다. 요약하건대 눈앞의 현상에만 집착하는 실증주의자들에게는 더 나은 삶에 관한 인간의 꿈은 그야말로 사막에 나타나는 신기루처럼 허황되고 뜬금없는 상으로 비칠 뿐입니다.

 

5부작 가운데 제 4권은 특히 1900년 전후에 출현한 일련의 디스토피아의 문학을 천착한다는 점에서 많은 교훈을 전해줍니다. 막강한 국가의 폭력, 파시즘과 스탈린주의 그리고 세계대전 그리고 이러한 결과는 우리의 삶에 여전히 지속적으로 크고 작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는 한반도에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네 가지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첫째로. 70년 이상 지속되는 한반도의 분단은 세계사의 갈등 그리고 이로 인한 피맺힌 결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갈등을 넘어서, 그 자체 사상사적으로 동서양의 이원론적 충돌을 의미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냉엄한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폐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전 지구적으로 확산된 독점 자본주의 생산 양식과 직결되는 현실적 상황입니다. 오늘날 프레카리아트 계급으로 전락하여 미래의 삶을 불안해하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입니다. 셋째로 개개인의 삶을 옥죄이는 국가 기관의 횡포의 예는 한반도에서도 지속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권력 기관의 핍박으로 인하여 힘없는 개인의 생존권과 인권이 끊임없이 침탈당해온 것을 고려해보세요. 넷째로 일제 강점기에서 나타난 경제적 수탈과 민족에 대한 배반 등은 역사적으로 청산되지 못한 채 여전히 계층 사이의 불신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갈등과 불신은 언젠가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네 가지 난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J, “예언자는 고향에 머물면 제 구실을 하지 못한다(Propheta non valet in patria sua)”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이 말은 고향으로부터 멀어지면 지식인은 자신의 과업을 더욱 분명하게 인지한다는 뜻을 함축합니다. 예컨대 하나의 난제는 그것이 출현한 장소의 외부에서 더욱 명료하고도 객관적으로 인지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당면한 사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경우, 우리는 우회적 자세를 취하면서, 다른 시대와 다른 장소에서 주어진 난제와 유사한 범례를 탐색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서양 유토피아의 흐름』 제4권은, 비록 간접적이겠지만, 어떤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위한 단초를 제공할 것입니다. 본서가 정신사의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하고 비판적으로 되돌아보게 하기를 바라면서.

 

 

장산의 끝자락에서

필자 박설호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