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소설 작가, 아서 코난 도일은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날카로운 감각으로 샤일록 홈스가 등장하는 일련의 탐정 소설을 집필하여 문학적으로 그리고 범죄심리학적으로 공헌하였다. 게다가 20세기 초반에는 인권 투쟁을 위한 고결한 용기를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가령 코난 도일은 1909에 스코틀랜드 법정에 의해서 살인죄를 선고 받고 20년 이상을 억울하게 옥살이해야 했던 독일인, 오스카 슬레이터Oscar Slater의 억울함을 해결하기 위해서 백방으로 뛰었고, 그를 무죄 석방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외쳤으며, 심지어는 모든 유형의 심령학을 동원해서라도 불의가 제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인권, 바로 그 자체의 문제였다. 오스카 슬레이터의 사건은 이전에 프랑스에서 출현한 드레퓌스 사건과 같은 정치적 관련성과는 거의 무관한 것이었다. 결국 코난 도일은 무고한 죄인을 합법적으로 감옥에서 빼내는 데 성공을 거두었으며, 슬레이터는 법정의 횡포에 의해서 억울하게 옥살이한 전형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독일 출신의 가난한 유대인은 복권되어, 상당 액수의 피해 보상금을 받았다. 이후에 오스카 슬레이터는 타인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자신의 면모를 변화시켰다. 거대한 시가를 입에 문 기업가, 오스카 슬레이터가 잡지에 실리게 된 것이었다. 사실 슬레이터는 국가로부터 수령한 피해 보상금으로 제법 건전한 사업에 투자하여 돈을 벌게 되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코난 도일은 잡지를 읽으면서 도덕적 권태감, 그게 아니라면 약간의 역겨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그토록 애쓰면서 무죄 방면시키려던 민초 한사람이 어느새 평범한 사업가로 거듭나 있었던 것이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코난 도일은 무죄 석방을 위해 지출했던 모든 비용을 합산하여, 슬레이터에게 비용을 지불하라는 청구서를 송부하였다. 그러나 결과는 자신이 갈구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왜냐하면 슬레이터는 다음과 같이 답신을 보내왔기 때문이었다. 즉 자신은 코난 도일에게 마치 변호사처럼 일해 달라고 한 번도 부탁한 바 없기 때문에, 무죄 석방을 위한 비용을 지불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코난 도일은 슬레이터의 태도에 그냥 참아 넘길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애호하던 “플로레스탄” 한 사람을 법정에 고소하게 된다. 무고하게 벌을 받았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다시 법정에 서게 되었다.
오스카 슬레이터는 돈을 갚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소당했던 것이다. 이로써 맨 처음 죄 없는 사람을 구원하려는 의향은 순식간에 거대한 노여움으로, 다시 말해 죄 지은 자를 단호하게 처벌하려는 의향으로 돌변하게 된 셈이다. 두 사람은 멋지고, 고결하며, 어떠한 오점도 남기지 않은 친구였지만, 마지막 한 순간에 서로 격렬하게 싸우는 적으로 변신하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상기한 이야기를 이전에 은폐된 사악함이 나중에 출현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쩌면 통상적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멋지고 훌륭한 발언의 치장을 벗겨내면, 마지막에 이르러 이득을 챙기려는 추악한 속내가 드러나는 경우는 비일비재하다. 처음에 접하게 되는 달콤하고 안온한 얼굴의 배후에 숨어 있던 경제적 이해관계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앞에서 분명히 드러난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이야기는 경제적 계기와 얽혀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과 이익에 대한 관심사가 아니라, 어느 이상주의자의 관심사이다. 자신이 갈구하던 의향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원래의 이상을 감지할 수 없을 정도로 비정할 정도로 현실적인 무엇으로 돌변하게 된다.
아름다운 도자기가 진열된 상점 근처에는 으레 더러운 암소 또한 서성거리고 있다. 더러운 것들은 이따금 아름다운 물건 한 복판에 있다가 서서히 자라나기 시작한다. 결국에는 더러운 것들은 아름다운 것과 뒤엉켜서 나중에는 독자적으로 외부로 뛰쳐나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멋진 나날, 우리가 갈구하는 미덕은 그야말로 하나의 상으로 비유될 수 있다. 그렇지만 상 속에 축조된 것은 너무나 고결하여, 어느 누구도 그 곁에서 오랫동안 버티고 견뎌낼 수 없다. 너무나 고결한 상이 정 반대의 무엇으로 돌변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무엇으로 변질되기 때문이다. 이는 어쩌면 (아직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내면의) 신들의 질투와 시기심 때문인지도 모른다.
갇혀 있는 존재는 아주 시적으로 느껴진다. 오스카 슬레이터는 작가에게는 하나의 고상한 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죄 없이 수감되어 있던 자로서 열정적 파토스를 부추기기에 너무나 적절할 정도로 고상한 인간형으로 각인되었다. 그를 둘러싼 모든 것은 인내하는 인간형의 전형으로 비쳤으며, 코난 도일은 마치 페르세우스와 같은 영웅처럼 행동하였다. 두 사람은 실제 현실이라는 연극 관람석에서 그야말로 노골적으로 행동한 셈이다.
구원의 오페라는 실제 삶에서 전개되었으며, 작가 코난 도일은 결국 사업가 슬레이터보다도 더 시적인 여운을 남겨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숭고한 이야기는 나중에 이르러 어떤 천박하고도 거친 법정 투쟁으로 귀결되었던 것이다. 바람직한 이상이 감추어지고, 미덕이 더 이상 구체적 현실에서 발견되지 않는 곳에서는, 어떠한 미적 포에지의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으며, 출현하는 것이라곤 기이하게도 미덕과 이상과 정반대되는 무엇이다.
마음속에서 솟구치는 어떤 불만은 결국 포에지 자체의 구체적 특성을 상실하게 되는데, 이로써 자라나는 것은 어떤 파괴력일 수 있다. 결국 코난 도일과 슬레이터는 서로 친구이면서도 더 이상 인사를 나누지 않게 되며, 이전에는 잘 모르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친구가 아니라, 서로 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자고로 부패한 사랑이 과도하게 커지면, 그것은 반드시 독으로 작용한다. 가령 이혼을 원하는 남녀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판사 앞에서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으로 거대한 증오심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전에 두 사람은 그들의 내밀하고도 사적인 애정 관계를 그토록 감추려고 노력했지만, 이혼 소송이 벌어지면, 각자 두 사람 사이의 모든 것을 공공연하게 까발리게 되고, 이로 인하여 주위 사람들이 몹시 당혹스럽게 받아들이곤 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어느 고대 작가는 하나의 기이한 문장을 남겼다. 이 문장은 신중하지만, 용기 넘치고, 진실로 애정 어린 충고를 담고 있다. 친구를 사귈 때에는 그 사람이 언젠가는 다시 그대의 적이 될 수 있음을 염두에 두라. 이러한 경고를 명심하면, 당신의 친구는 절대로 당신의 적으로 돌변하지 않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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