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유토피아 논쟁 (5)

필자 (匹子) 2021. 9. 9. 10:30

크뤼거: 블로흐씨, 다시 한 번 조금 전의 질문을 제기하고 싶습니다. “유토피아의 요소는 오늘날 동구에 횡행하는 사회주의로 인해서 급진적으로 사라지고 말았다.”는 아도르노의 견해를 용인하시는지요?

블로흐: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발언이 첨부되어야 할 것입니다. 즉 서구에서도 사라졌으며, 이와 유사한 경향은 존속되고 있어요. 시대적 일원성은 비록 거대한 대립이 존재하지만 동구와 서구 모든 지역에서 새로 정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도르노: 동의합니다.

 

블로흐: 서구와 동구는 같은 시대정신 속에 처해 있어요. 한 가지 점에서 같은 배를 타고 있다고 보아야지요. 즉 어떠한 유토피아적인 것도 용납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고유한 특성에 무언가를 덧칠하여, 그것을 파괴하는 태도는 유토피아를 경고하고 유예하는 처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최상의 노동, 다시 말해 노동의 경제성을 실천하는 임무는 마르크스에게 필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때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에 관해 많이 발언하지 말라고 주문했지요. 유토피아에 대한 마르크스의 이러한 발언은 예전에나 지금에나 간에 논쟁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마르크스는 추상적 유토피아에 대해 수미일관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추상적 유토피아를 설계한 사람들은 부자들이 양심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내놓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앉아 있는 나무 가지를 스스로 잘라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이지요. 마르크스는 인간의 지적인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데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이는 유토피아적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지식인들에게 향하는 태도입니다. 이를테면 마르크스는 구체성에 대한 헤겔의 관심을 고려하고 있었지요. 마르크스는 너무나 사변적인 사고에 대항하는 치료제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너무나 사변적인 정신에 반기를 두는 것은 거의 필연적이었습니다. 이러한 비판이 없었더라면 『자본』은 집필되지 않았을 테고, 집필하려는 마음조차 떠올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시대는 추상적 유토피아에 저항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저항이 너무나 끔찍할 정도로 완강하게 추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크스는 문학의 영역에서, 예술의 영역에서 그밖에 이러한 유형의 모든 가능한 사안에 있어서 결코 세밀하게 언급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덧칠도 하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프랑스의 소설가 발자크에 관해서 조금 언급했을 뿐이지요. 바로 이러한 사항은 나중에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몰라요. 하기야 그렇지 않았을 경우 문학과 예술의 영역에서 남아 있는 것은 공허한 영역이었을 테지요. 마르크스는 어떻게 해서든 더욱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려는 의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것을 역사적 학문적 관점에서 명확하게 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이러한 역사 학문적인 상황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는 시점, 다시 말해서 유토피아의 풍요로운 사고로 고통당하지 않는 시점에 말입니다. 요약하건대 사람들은 마르크스의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너무나 끔찍하게 비판해 왔으며, 완전히 변화된 현실적 상황 속에서 단순히 마르크스가 말한 글귀를 있는 다만 자구적으로 주저리주저리 따라 읽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를 올바르게 수용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어떤 사안을 예리하게 투시하고 파악하려는 태도입니다. 여기서 실증주의적으로 무언가를 분명히 찾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오히려 신실과 정의에 입각할 때 우리는 유토피아의 사고의 본질적 기능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술적인 것은 인간 삶의 목표를 연습한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 같아요.

크뤼거: 인간 삶의 목표라는 말이 무슨 뜻이지요?

 

블로흐: 우리는 앞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전체성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었지요? 사람들이 아침이 도래하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요? 19세기 중엽에 독일 작가, 빌헬름 라베Wilhelm Raabe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습니다.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면,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한다. 제발 나에게 환상, 일용할 환상이 주어지라고 말이다.” 라베는 자신의 환상이 필연적인 무엇으로 변하고, 삶의 중요성을 견지하게 하라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유토피아의 양심과 유토피아의 예건으로부터 완전히 벗겨져 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도르노: 그와 유사한 모티프는 보들레르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들레르에게는 세상이 온통 거짓으로 미화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요. 그렇지만 보들레르와 라베 사이의 유사성은 경미한 부분에서 나타날 뿐 내용상 하등의 일치점을 드러내지는 못하지요.

 

블로흐: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있듯이, 최소한 어떤 영웅적 환상이 없었으면, 아마 프랑스 혁명은 출현하지 않았을 공산이 큽니다. 결국 자연법적 사고를 잉태시킨 것도 바로 그러한 환상이었으니까요. 프랑스 사람들이 품고 있던 갈망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실현되지 못한 것은 부르주아를 위한 자유로운 시장 제도였지요. 그렇지만 사람들이 유토피아의 명제 하에서 꿈꾸고 생각하며, 갈구하고 희망하며 요구했던 것은 부르주아를 위한 자유 시장제도는 아니었습니다. 육안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유에서 지금까지 차단되던 세계가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실현 가능한 것으로 보이게 되면,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더 나은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야말로 놀라울 따름이라고 말입니다. 만약 굶주림과 직접적인 궁핍함이 사라진 어떤 세계가 -죽음과는 달리- 숨통을 틔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출현하게 되면, 마지막에 이르러 서구든 동구든 간에 상투적인 문구, 지리멸렬한 문장 그리고 현존재의 완전히 전망 없는 상태가 나타날지 모르지요.

 

여기서 말하는 것은 상행위를 추구하기 위한 부르주아의 자유가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자유입니다. 이는 수많은 의혹과 의심을 낳게 될 것이고, 유토피아의 사고를 방해하는 결정적 가시로 작용하게 될 테지요. 이와 관련하여 브레히트가 제기한 짤막한 문장, “무언가가 결핍되어 있다. Etwas fehlt”를 생각해 보세요. 그게 무엇인지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이 문장은 브레히트의 『마하고니의 융성과 몰락』이라는 극작품에 실려 있는데, 브레히트가 남긴 놀라운 문장 가운데 하나이지요. “무언가”는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다른 특성을 덧칠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어떤 무엇에 임의로 덧칠하게 되면, 그것은 마치 현존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지요. “무언가”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인데,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거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눈앞의 음식이 가장 중요하며, 이 세상에서 사라져서는 안 되리라고 믿는다면, 기술적인 게 무조건적으로 중시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토피아의 거대한 영역은 그야말로 초라한 구역을 차지하게 될 테지요.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관여할 수 없는 기하학적인 상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농부의 오래된 속담도 있습니다. 식사하기 전에 춤을 추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축제는 식사가 끝낸 다음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다른 사람을 속이거나 기만하지 않은 채 다른 무엇에 관해서 진지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이야 말로 이 경우에는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지요. 모든 손님이 식탁에 앉은 다음에 비로소 구원자인 그리스도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전체적 의미의 마르크스주의를 대하면서, 만인의 평등이라는 가장 찬란한 형태 속에서 실현될 수 있는 어떤 면모를 분명하게 예견해야 할 것입니다. 마르크스주의야 말로 오로지 자유 속의 삶, 행복 속의 삶, 어떤 실현 가능한 삶, 진정한 내용을 담은 삶 등을 위한 전제 조건임에 분명합니다.

 

아도르노: 한 마디 첨가해도 될까요? 우리의 대화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신의 증명에 관한 영역에 근접하게 되었어요, 에른스트.

블로흐: 참으로 놀랍군요.

아도르노: 당신의 발언 속에는 다음의 사항이 은밀히 숨어 있어요. 당신은 브레히트의 문장, “무언가 결핍되어 있다.”를 인용하고 있지만, 그러한 개념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태동하게 한 어떤 계기로서의 효모라든가, 어떤 엔텔레케이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러한 개념을 어떠한 경우에도 함부로 포착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말하자면 나는 다음과 같이 믿고 있어요, 만약 존재론적 측면에서 신의 증명에 관한 진리의 어떤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개념 자체의 힘 속에 그 현실적 모티프가 함께 관여하고 있다면, 유토피아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인간의 사고 역시 당연히 존재할 리 만무하다는 것입니다.

 

크뤼거: 사실 나 역시 바로 그러한 개념에 관한 문제를 마지막으로 제기하고 싶었습니다. 아도르노 교수님, 우리는 앞에서 바로 그 문제를 암시한 바 있어요. 우리는 유토피아는 처움부터 결핍된 무엇과 관련된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제기하고 싶은 질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간은 도대체 과연 어떠한 차원에서 유토피아를 실현시키는가요? 희망은 바로 여기서 제 역할을 끝내고, 수명을 다하는지 모르지요. 따라서 무엇이 희망인지, 무엇이 희망이 아닌지 하는 물음을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블로흐: 희망에서 중요한 것은 완전성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그러한 한 그것은 존재론적 신의 증명에 관한 질문과 얼마든지 관련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중세의 철학자, 캔터베리의 안셈은 가장 완전한 존재를 말하자면 가장 현실적인 존재를 동시적으로 포함하는 무엇으로 설정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오늘날 무조건 타당성을 인정받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비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즉 누군가 불완전성, 불완전한 무엇, 감내할 수 없는 무엇이라든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엇 등을 신랄하게 비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때 그의 비판은 처음부터 어떤 가능한 완전성에 대한 동경에 관한 상상을 통해서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만약 마땅히 존재해야 하는 무엇이 어떤 과정 속에서 존재하지 않는다면, 비판적 모티브로서의 완전성이 하나의 과정 속에서 다루어지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불완전성, 불완전한 무엇, 감내할 수 없는 무엇이라든가 견딜 수 없는 무엇 등을 파기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리 만무하지요. 이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오해를 제거한다면,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사항일 것입니다. 즉 희망은 확실한 사항과는 정 반대된다고 말입니다. 희망은 단순한 낙관주의가 아니지요. 희망 속에는 위험의 카테고리가 은밀히 지속적으로 내재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망은 확신이 아닙니다.

 

크뤼거: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블로흐: 희망은 한마디로 확신이 아닙니다. 만약 그게 환멸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희망이 아니겠지요. 이러한 특성은 희망 속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희망은 다른 특성으로 덧칠된 것이 분명합니다. 만약 희망이 다른 방식으로 실망스러운 행위로 드러나게 되거나 패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희망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희망은 비판적이고 나중에 얼마든지 실망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희망은 가라앉으려는 배의 돛대에 깃발 하나를 못 박은 태도일 수 있습니다. 비록 끔찍하고 절망스러운 현실이 눈앞에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이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일 수 있어요. 희망은 확신이 아닙니다. 희망이라는 마음가짐은 수많은 위험이 주위에 널려져 있는 곳에 싹틀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위험을 감지하는 의식이며, 인간이 기대하는 바와는 정 반대되는 끔찍한 상황을 치열하게 부정하며, 이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자세입니다.

 

희망은 가능성과 관련되는 개념입니다. 가능성은 승리에 환호하는 애국심이 아닙니다. 가능성 속에는 이와는 반대되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가능성 속에는 모든 게 덧없이 사라지고 말 허전함 또한 자리하고 있습니다. 희망 속에도 성취 가능성 외에도 덧없는 사멸이 자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단순한 의미를 지닌 “과정”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습니다. 화학적, 의학적, 법학적인 과정, 또한 구원의 의미에서의 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만약 무언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 무엇이 당위성과 당연성에 위배된다면, 과정이 존재할 리가 만무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문장을 인용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간명하고 타당한 발언이지만, 기이하게도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유토피아라는 땅이 분명히 표기되지 않은 지도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들여다 볼 하등의 이유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