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bloch 대화

블로흐와 아도르노의 유토피아 논쟁 (4)

필자 (匹子) 2021. 9. 8. 10:10

(계속 이어집니다.)

 

블로흐: 바로 이러한 까닭에 유토피아의 사고는 두 가지 의향으로 발전되었습니다. 그 하나는 유토피아 사회상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법사상입니다. 전자는 더 이상 힘들게,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는 사회적 상태를 재구성하고 있다면, 후자는 자연법을 주창하는 자들의 의연한 기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사항을 『자연법과 인간의 존엄성』에서 자세히 천착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세 번째 사항이 문제로 제기되는군요.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죽음을 가리킵니다. 죽음은 흔히 신앙인들이 즐겨 다루는 “사랑스러운 아이”로 이해되곤 합니다.

 

그렇지만 죽음을 떨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기적이겠지요. 흔히 기독교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강조되곤 합니다..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 죽음 앞에서, 죽음의 턱 앞에서 나를 구원하리오.” 이것은 분명히 어떤 초월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인간 존재인 우리는 실제로 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갈망의 마음가짐으로 세례, 그리스도의 죽음 그리고 부활을 동원하는 것이지요. 유토피아적인 것은 자신의 가능한 수단을 선택함으로써 초월의 가능성을 도출해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과 갈망의 의향 또한 유토피아의 특성에 해당합니다.

 

아도르노: 네, 나도 그러한 생각에 동의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갈구하는 죽음의 철폐는 단순히 의학 내지 생물학 영역에 있어서의 학문적 진행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를테면 새로운 학문적 발견을 통해서 인간은 조직체의 생명 그리고 비-조직체의 생명 사이에 가로놓인 문지방을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자연과학의 연구 결과와 같은 사실은 우리의 토론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당신의 주장과 관련하여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요. 억압이 없고,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삶에 관한 상상 없이는 우리는 유토피아에 대한 사고 내지 유토피아의 사고를 절대로 도출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한편 당신은 죽음에 관해서 언급했는데, 나는 이를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당신의 이러한 언급 속에는 어떤 중요한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유토피아의 개념을 전체적 관점에서 고찰할 때 그 깊은 곳에는 어떤 모순된 사항이 자리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유토피아는 한편으로는 죽음의 철폐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계획될 수도, 구상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이러한 사고 자체 속에 이미 -감히 말하건대- 죽음의 무게 그리고 이와 관련되는 모든 육중한 것들이 처음부터 내재하고 있어요. 죽음의 육중함이 도사리지 않는 곳에서는, 다시 말해 죽음이라는 문지방이 즉시 그리고 더불어 생각되지 않는 곳에서는 거기에는 어떠한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감히 끔찍할 정도의 표현을 사용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즉 죽음과 결착되어 있는 유토피아의 특성은 유토피아의 인식론적 관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매우 암담한 결론을 도출해내게 할 정도이지요, 즉 인간은 유토피아를 무작정 긍정적으로 채색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 말입니다. 유토피아를 단순히 서술하거나 거기에 긍정적으로 채색하는 모든 시도를 생각해 보세요. 더 나은 사회적 삶은 이렇고 저럴 것이라는 유토피아의 설계는 죽음이라는 반대 명제를 건너뛰는 시도가 될 것입니다. 마치 죽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죽음의 철폐를 거론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이는 어쩌면 매우 심층적인 형이상학적인 이유를 지니고 있어요. 이는 가령 헤겔의 거대한 철학에서도 엿보이고 있으며, 나중에는 마르크스가 더욱더 첨예하게 이를 강조한 사항이지요.

 

블로흐: “부정적인 무엇”은 당연히 “가치의 평가 절하”와는 다른 법이지요.

아도르노: 제 말씀은 그게 아닙니다. 유토피아의 가치가 평가 절하되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는 다만 유토피아라는 존재 속에 자리하고 있는 특정한 부정성을 지적하고 싶을 뿐입니다. 유토피아의 상상 속에는 죽음 역시 유일한 형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단순히 존재하는 무엇의 폭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만, 다른 한 편에 있어서 그러한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에 나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제시하고 싶습니다. 유토피아에 다른 특성을 덧칠해서는 안 된다 라던가, 특정한 여러 가지 유토피아를 개별적 방법으로 설계해서는 안 된다라고 말입니다. 이는 헤겔과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난 바 있는데...

 

블로흐: 헤겔이라고요?

아도르노: 헤겔이 원칙적으로 세계를 더 낫게 설계하는 것을 천시했다면 점에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도 대신에 헤겔은 객관적 경향성의 사고를 더욱 중시했습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러한 입장을 직접적으로 수용했습니다. 헤겔은 절대적인 무엇을 실현시키는 과업 을 하나의 유토피아로 이해했는지 모르고, 젊은 시절에 반드시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그가 객관적 경향성을 사고하는 순간에 있어서 틀림없이 더 나은 사회적 삶에 관한 사고는 자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유토피아를 위해서 무언가를 금지시켜야 하고, 유토피아에 관한 하나의 상을 금해야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김의 의미를 담고 있는 계명을 생각해 보세요. “너는 어떠한 상을 그려서는 안 된다.” 상의 금지에 관한 전언이야 말로 어떠한 경우에도 경박하고 거짓된 유토피아를 거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며, 나아가 원래 생각하던 바가 마구잡이로 활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도에서 비롯한 것이지요.

 

블로흐: 완전히 동의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포만한 심리를 고려하면 우리는 많은 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이 바라는 바를 현재 상태 속에 즐기는 것 같습니다. 사실 오래 전에 갈구하던 바가 이제 성취되어 마치 할부금처럼 조금씩 취득하고 있다고 여기는 것이지요. 이미 성취한 것을 할부금으로 취득하는 경우에 관해서 책 한 권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점은 유토피아가 최소한 실현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일수 있어요. 이러한 특성으로 당신은 유토피아의 고유한 특성에다가 다른 특성을 덧칠하고 있듯이 말입니다. 사람들은 기만당해 있어요. 포만의 시대에 사람들은 긴장이 풀려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는 하루살이 내지 비-하루살이의 물화 현상만이 존재하고 있어요. 마치 사람들은 이전에 추구하던 경향성의 존재보다도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있으며, 기다리던 날이 마침내 도래하기라도 한 듯이 말이지요. 이러한 물화적 현상에 대해 예술가들이 저항하고 이를 예술 작품으로 남기려고 하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불만족의 상태 속에서 분명히 깨어있어야 합니다. 어째서 죽음이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체념을 강요하는가를 의식하면서 말이지요. 죽음은 오래 전에 쇼펜하우어가 말했듯이 “이제 그것은 사라져야 한다.”는 외침이 아니라, 현재의 만족 상태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습니다. 포만 상태가 너무나 크게 자리하고 있으며, 경제 기적 내지 북지 사회가 완전히 주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지요,

 

그렇지만 유토피아의 고유한 정서에서 비롯하는 그렇지 말아야 한다는 마음가짐은 사라진 게 아닙니다. 자유가 어디에 존재하며, 어떻게 완전히 실천될 수 있는지 하는 마음가짐 그리고 하나의 바람직한 질서가 자리 잡게 되기를 갈망하는 마음가짐은 온존하고 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어떤 보다 심원한 의미 내지 포괄적인 의미에 있어서 사회 유토피아가 표현하는 무엇을 발견할 수 있으며, 주어진 현실에 수직으로 정착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갈망 내지 동경은 여전히 주어져 있습니다. 죽음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물론 인간은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려움은 동물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는 약간 다릅니다. 유토피아에 덧칠한 죽음의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풍부한 경험을 통해서 지니게 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죽음은 때로는 인간 삶에서 달성해야 하는 목표를 차례로 끊어버리게 하는 느낌을 안겨주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이러한 목표 순서 없이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목적론과 무관한 세계 속에는 이러한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거든요. 기계주의의 유물론은 유토피아의 의향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 속에는 모든 게 현재일 뿐이며, 기계주의의 현재만 존속되고 있을 뿐이지요. 설령 사회적 포만감이 강조되고 죽음이 중시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마음가짐 내지 느낌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테디, 우리는 최소한 다음과 같은 점에 있어서 합의를 이룰 수 잇을 것 같아요. 유토피아가 지니는 본질적인 기능은 기존하는 무엇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 말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러한 한계를 넘어서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결코 하나의 한계 내지 차단막으로 인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도르노: 네, 유토피아는 근본적으로 특정한 사항을 부정하는 속성, 다시 말해서 주어진 현실에 단순히 존재하는 것을 거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로써 그것은 눈앞에 주어진 것을 극복한, 어떤 당위적인 상, 어떤 가식적인 상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하지요. 그러나 이러한 상은 얼마든지 거짓된 것일 수 있어요.

 

당신은 어제 서로 나눈 대화에서 스피노자의 문장을 인용하였습니다. “진리는 그 자체 그리고 거짓의 표시이다. Verum index sui et falsi.” 나는 유토피아의 특정한 부정성을 뜻하는 변증법적 원칙의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문장을 다음과 같이 바꾸어보았습니다. “거짓은 그 자체 그리고 진리의 표시이다. Falsum index sui et veri.” 다시 말해서 잘못 인지된 것은 의외로 진정한 의미를 규정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우리가 유토피아에 어떠한 덧칠도 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유토피아가 어떠한 방식으로 올바름을 획득하는지 거의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거짓으로 드러난 사항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형체가 아닐 수 없지요. 그렇지만 나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물론 이에 관해서 우리는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할 것 같아요, 에른스트. 그런데 유토피아로 드러난 구체적인 상은 때로는 왜곡되어 매우 뒤엉켜 있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유토피아의 형체는 상의 금지,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상을 함부로 그리지 말라고 경고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끔찍한 모습이 돌출할 수 있으며, 당위적으로 존재해야 하는 것들을 생각하고 추론하게 되면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더 오로지 부정적인 것들만 떠올리면서 이를 발설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생각에는 이 점이 더욱 우리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유토피아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방언하지 못하게 하는 금지 사항은 결국 유토피아의 의식 자체를 폄하하게 하며, 이러한 생각마저 발설하지 못하게 차단시키는 경향을 띄게 될지 모릅니다. 유토피아에서 중요한 것은 더 나은 현실은 어쩌면 주어진 것과는 다를 수 있다는 인간의 마음가짐인데도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동구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을 접하게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분위기는 마르크스가 19세기에 프랑스의 유토피아주의자 그리고 영국의 오언에 대한 비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의 사고가 사회주의의 구상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사라졌음을 지적한 바 있지요. 마찬가지로 동구에서는 어떤 사회주의의 사회의 수단, 방법 그리고 실행을 위한 기관이 중시되어, 모든 변화 가능한 내용이 지엽적인 것으로 치부되고 있습니다.

 

동구의 사람들은 실행 가능한 내용을 말해야 하는데도 이를 공공연하게 발설할 수 없지 않습니까? 이로 인하여 유토피아에 적대적인 사회주의 이론은 대부분의 인간을 지배하기 위한 어떤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바뀌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어요. 나는 블로흐, 당신이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접했던 갈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싶어요, 내 기억이 정확한지 잘 모르기 때문에 이를 구체적으로 인용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어쨌든 발터 울브리히트는 당신에 관해서 매우 나쁘게 발언했습니다. 사회주의 사회 내에서의 유토피아는 실현될 수 없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울브리히트의 이따위 발언은 속물의 허튼 소리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이러한 유토피아를 실현시킬 의사를 품을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한 가지 사항을 확실하게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오늘날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삶이 가능하다는 게 사실이라면, 유토피아의 이론적인 형체들 가운데 어떤 하나는 내가 학문적으로 책임 있게 다룰 사항은 아니며, -잘못 파악한지는 몰라도- 당신 또한 학문적으로 책임감을 지니면서 심도 있게 다를 사항은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로서는 인간의 경제적 생산 능력을 고려한 현재 상태에서 어떤 자유롭고 행복한 삶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이 점을 분명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에 관해서 어떠한 무엇도 미화될 수 없고, 임의적인 방식으로 부풀려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이 점을 분명히 명시하지 않고, 함부로 유토피아의 가식적 상에 관해 발설한다면, 나는 차라리 눈앞에 보이는 것만을 포착하라고 권고 드리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전체성이 도대체 사회 속에 자리하고 있는지, 어째서 국가 기관이 움직이고 작동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죄송합니다만, 만약 어떤 재판정에서 유토피아의 긍정성을 옹호하는 예기치 않은 역할을 담당한다고 하더라도, 나로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습니다. 즉 인간 삶이 자유롭지도 행복하지도 않다는 마음가짐 없이는 사람들은 결코 유토피아의 의식이라는 하나의 현상학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으리라고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