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나의 글

번역, 이중의 해석학 그리고 학문

필자 (匹子) 2021. 6. 9. 09:13

1. 재미없는 통역 청취하기

 

서울 근처의 모 대학에서 학술 대회가 있었다. 우연히 거기에 참석한 나는 독일의 모 대학 교수의 엔지오 (NGO)에 관한 강연을 듣고 있었다. 교수의 강연 자체가 문어체 (文語體) 그리고 복합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통역을 맡은 여성은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열심히 경청하는 데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로 그미는 맥락을 전해주기 보다는, 단어와 단어를 짜 맞추는 데 급급한 것 같았다. 문장들은 정확하지 않았고, 생경한 단어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통역한다고 해도, 그미보다 더 잘하지는 못할 것 같았다. 내용이 나에게 낯선 것이었으니까. (...)

 

강연 도중에 곁에 앉은 동료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데 동료는 전혀 독어를 배우지 않았는데도, 강연 내용을 훤히 꿰뚫듯이 이해하는 것 같았다. 동료는 비록 말을 못 알아듣지만, 사회 정치학을 전공하는 교수로서 내용 자체에 대해 사전 지식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2. 앵무새를 배출할 것인가?

 

이렇듯 통역에는 무엇보다도 내용 전달이 중요하지, 단어를 얼기설기 뒤바꿔 놓는 일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통역 그리고 번역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외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잘 알기 위함이 아닌가? 생각해 보라. 특정한 외국인의 사상과 감정을 이미 잘 알고 있으면, 말과 글 자체에 그다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족하다. 예컨대 20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연습한 농구 선수는 눈짓만 보아도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고 한다. 50년 동안 함께 살아온 부부는 상대방이 실제로 자신의 반쪽 몸처럼 비친다고 한다.

 

사실이 이러한데도, 학생들은 오로지 외국어 자체만 배우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외국어를 잘 하려면, 우리는 우선적으로 한국어를 잘 알아야 하고, 다른 문화를 냉정하게 비판적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단어 그리고 문장 습득에 집착할 뿐이다.

 

프랑스 문화에 관한 홍세화의 탁월한 책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가른다.』에서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발견된다. “실리콘 밸리나 빌 게이츠의 겉은 영어지만, 속은 온통 수학, 물리, 기술이다. 영어로는 다만 카피를 할 수 있을 뿐이다.” 외국에서 10년 이상 사는 사람은 그 나라의 말을 저절로 익힐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앵무새를 배출할 게 아니라, 자신의 분야에 합당한 실질적 내용을 배우고 가르쳐야 마땅하다.

 

3. 어머니와 암나사

 

80년대 말에 나는 틈틈이 통역 일을 맡곤 했다. 나의 은사는 가난한 제자를 위해서 일감을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의 일감은 한결같이 기계 조작에 관한 일에 국한되어 있었다. 독일의 상인들은 대부분 영어에 능통했고,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가령 독일의 회사는 기계를 판매했는데, 독일의 기술자를 파견하곤 하였다.

80년대 말 어느 여름 누군가가 통역을 맡아 달라고 나에게 의뢰했다. 자동차 부속을 생산하는 회사였다. 자동차에 쓰이는 대부분의 나사들은 고열 속에 달구어진 채 찍혀 나온다. 독일의 모 회사는 고열에 달구지 않고도 암나사를 찍어내는 기계를 발명하여, 이를 한국의 자동차 회사에 팔았던 것이다.

나는 전문 용어를 사용하여 기계 부속을 설명하는 데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기계 앞에서 열심히 설명할 때 독일 기사는 “어머니 (Mutter)”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다. 기계 설명에 뚱딴지처럼 어머니가 왜 들어가는가? 하고 의아해 했다. 내가 정확히 통역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감지한 독일 기사는 황망하게 “무터, 무터”를 소리쳐 외쳤다. 그러니까 “무터 (Mutter)”는 “어머니” 외에도 “암나사”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당시에 나는 이를 모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곁에 있던 한국의 엔지니어들은 나의 어설픈 설명에도 불구하고, 느긋하게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었다 (...).

 

4. 대통령의 외국어 보좌관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즉 통역하는 사람은 직접 말하는 사람보다도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예컨대 번역에 관한 한 번역자의 수준은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원 저자의 수준을 능가해야 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번역자는 -실제에 있어서- 원 저자의 그것을 넘어서지 못한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번역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물론 이는 역설적인 내용을 지니고 있다. 만일 우리가 원 저자의 수준보다 더 깊은 지식과 정보를 지니고 있다면, 과연 번역하고 싶은 필연적 욕망을 계속 지닐 수 있겠는가?

 

독일의 슈뢰더 수상에게는 약 스무 명의 외국어 보좌관이 있다. 영어 보좌관, 프랑스어 보좌관, 스페인어 보좌관, 덴마크어 보좌관, 터키어 보좌관 등등. 사실 이러한 보좌관들만큼 짧은 시간 일하고 엄청난 수당을 받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수상 앞에서 통역하는 경우는 한 달에 고작 한두 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평소에 그냥 놀고 지내는가? 아니다, 언제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자들에 보좌관들이다. 매일 하루 8시간 씩 이 세상에서 간행되는 거의 모든 신문을 빠짐없이 독파해야 하니까 말이다. 예컨대 이들이 읽는 신문 가운데에는 코리아 타임스와 코리아 헤럴드도 있다고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한 달에 불과 한 두 번의 통역 일은 매끄럽게 수행될 수 없다고 한다.

 

5. “번역 나부랭이나 하고...”

 

어쩌면 통역 내지 번역 작업이 말하기와 글쓰기보다 더 중요하고, 절실한 과업일지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말하는 사람보다 통역하는 사람을 저자보다 번역하는 사람을 더 우대해야 한다. 그렇지만 현실은 어떠한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번역 작업을 천시한다. 게다가 번역 작업은 아예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되지도 않는다. 이에 비하면 일본 사람들은 저서 한 권 쓰는 것보다 번역서 한 권 간행하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한다.

 

오늘날 번역 작업은 배우며 수련하는 학생의 일감으로 전락해 있다. 동료가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일부 교수들은 “번역 나부랭이 할 시간이 어디 있나?” 하고 비아냥거리곤 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좋은 번역서 한 권 간행하는 일은 저서 한 권 간행하는 일보다 훨씬 힘들다. 나아가 훌륭한 번역과 그렇지 못한 번역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왜냐하면 참된 번역이 있는가 하면, 거짓된 번역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수많은 번역 이론가들이 번역 행위에 관하여 제각기 한 마디씩 남겼다. 그럼에도 필자는 앞에서 언급한 내용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번역은 다른 나라 언어로 씌어진 글을 모국어로 옮기는 작업, 혹은 모국어로 씌어진 글을 다른 나라 언어로 옮기는 작업에 국한되지 않는다고 말이다. 오히려 필자는 번역을 의미, 문화, 사상 감정 등을 전달하는 이중적인 해석학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실제로 번역 행위 속에는 이중적인 소통의 과정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가?

 

6. 학문의 길은 번역으로

 

조동일 교수는 "우리 학문의 길"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우리나라의 학문이 낙후성을 면치 못한 것은 학자들에게 독창적인 이론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따라서 학자들은 각 분야에서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자신의 고유한 이론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제안에 대해 전적으로 동의할 수 없다. 왜냐하면 탁월한 이론은 깊고도 탄탄한 학문적 토대 위에서, 다시 말해서 오랫동안 성숙된 학문적 기반 위에서 서서히 발효되기 때문이다. 필자의 견해에 의하면 독창적인 이론을 담은 수준 높은 학술 서적을 집필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먼저 제반 분야에서 훌륭한 명저들을 번역하고 출간하는 일이 급선무일 것이다. 생각해 보라. 물론 학자 한 사람이 유명하게 되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책이 (비록 그 속에 깊은 학문적 내용이 담겨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미래의 학문 연구를 위한 밑거름이 되는 것은 더욱 중요할 것이다.

 

7. 몇 가지 제안

 

따라서 필자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싶다. 첫째로 번역 작업 역시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경우는 학문적 업적이 양서 번역에 국한되어야 하고, 또한 번역 내용 역시 냉정하게 평가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둘째로 교육부 그리고 학술 진흥 재단 측은 이른바 “논문” 그리고 “학회 행사” 중심으로 학문을 지원할 게 아니라, 기초과학에서 꼭 필요한 번역 작업에 대해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첨단 과학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말고, 기초 학문 번역 작업, 예컨대 덴마크어 사전, 사회심리학 사전 등 제반 분야의 사전 편찬 작업, 초중고 교과서 집필 그리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재 집필 등을 병행하여 후원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