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하이너 뮐러의 문학

필자 (匹子) 2021. 9. 24. 10:56

하이너 뮐러의 문학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책을 참고하세요.

한국 브레히트 학회 편: 하이너 뮐러의 연극세계, 연극과 인간 2006필자: 하재철, 박설호, 이정린,서요성,손양근,장혜순,송희영,김명찬,이준서,임미오,이상복,김맹하,윤시향,왕치현,장은수,정민영,

 

 

 

위의 사진은 오동식 교수님의 박사학위 논문집 "하이너 뮐러에게 나타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의 모티프에 관하여"입니다. 실제로 유년의 경험은 평생 기억됩니다. 하이너 뮐러의 아버지는 시청 공무원이었는데, 1933년 사민당을 지지하여 일시적으로 감옥에 수감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나치의 돌격대원 두 사람은 사민당을 지지한다는 이유로 뮐러의 아버지를 구타한 다음에 어디론가 끌고 갑니다. 어린 뮐러는 이러한 장면을 열쇠 구멍으로 바라보면서 경악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진은 구동독의 뮈리츠 호수 근처의 바렌 Waren 이라는 휴양 도시입니다. 사진은 2011년의 것이므로, 옛날에는 별로 좋지 못했습니다. 하이너 뮐러의 아버지는 오랜 구직끝에 1937년 이곳 지역의 의료보험 회계 검사원으로 취직됩니다. 그의 가족들은 이곳으로 이사와서 살았습니다. 뮐러는 좋은 성적을 거두어 김나지움에 다녔습니다. 대신에 나치 청년단 Hitlerjugend 에 가담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에 하이너 뮐러의 아버지는 일시적으로 구동독의 사회주의 통일당의 당원이 되었으나, 스스로 사민당의 지조를 저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51년에 하이너 뮐러만 남겨두고 아내와 둘째 아들을 데리고 서독으로 이주해버립니다. 이때 하이너 뮐러는 23세였습니다. 그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그리고 배신의 감정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이너 뮐러의 첫 번째 부인인 시인 잉게 뮐러 (1925 - 1966) 그미의 양친은 제 2차 세계대전에 폭격에 의해서 사망했습니다. 어린 나이의 잉게는 건물 더미의 잔해 속에서 압사당하던 부모의 모습을 똑똑히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눈 앞에서 벌어진 부모의 익사 장면 - 그것은 오랫동안 한 영혼의 기억 속에 하나의 잊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각인되었습니다. 이때의 경험은 오랜 상흔으로 작용하여. 60년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결국 잉게 뮐러는 자살로써 고통스러운 삶을 마감합니.

 

 

 

 

1989년 11월 알렉산더 광장에서 연설하는 하이너 뮐러. 그는 결코 구동독에서 세인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극작가는 아니었습니다. 당국은 그를 음으로 양으로 탄압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본격 문학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구동독을 떠나지 않은 까닭은 두 가지로 요약됩니다. 그 하나는 구동독이 파시즘에 대한 비판을 전제로 태어난 나라라는 확신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친구들과 이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유하혜 (柳下惠)의 독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살다 보면 감옥도 들락거릴 수 있는 법, 굳이 부모를 떠나 다른 나라로 떠날 필요가 있는가?" 그렇지만 너무 곧게 살다보면 신변의 위험을 맞이하기도 합니다.1989년 하이너 뮐러는 운집한 군중들 앞에서 구동독의 민주화를 애타게 열망하였습니다. 동서독의 통일 (개방으로서의 글라스노스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개혁으로서의 페레스트로이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고, 통일을 위해서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립니다"우리는 주권을 지닌 민족이다 Wir sind das Volk!" 라는 슬로건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이다 Wir sind ein Volk." 라는 슬로건으로 돌변하였던 것입니다.

 

 

 

 

60년대부터 뮐러는 신화를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습니다. 극작품 피록테트의 한 장면. 피록테트는  처음에는 이아손을 따라 황금양피를 찾던 군인이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헤라클레스의 활을 들고 렘모스 섬에서 칩거하면서 살고 있었는데, 아킬레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와 오디세우스가 그를 찾아갑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를 설득하여, 피록테트와 헤라클레스의 활과 함께 돌아와서 트로이 전쟁에 참여시키려는 게 오디세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뮐러는 극작품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그를 설득할 수 없었던 오디세이는 피록테트를 죽이고, 그가 지니던 헤라클레스의 활을 강탈한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작품집 피록테트.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뮐러의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정교하고 훌륭하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작품에는 피록테트, 오디세우스 그리고 네오프톨레모스가 등장합니다. 오디세우스는 피록테트를 데리고 가서 그리스군인의 사기를 높이려고 하였으나, 피록테트는 이를 거절합니다. 작품을 통해서 극작가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의 술수, 의리와 지조 그리고 배반 등을 심층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뮐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문제의 제시 내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모든 유형의 갈등관계를 부각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극작가에게는 극장이야 말로 가장 애타게 갈구하는 대상입니다. 왜냐하면 극작가는 극장을 통해서 자신의 작품을 공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를린에 있는 독일 극장입니다. 이곳에서 뮐러는 자신의 작품의 공연을 지켜 보곤하였습니다. 그밖에도 베를린에서는 수많은 극장이 있는데, 우리는 베를린 앙상블을 예로 들 수 있습니다. 

 

 

작품 과업 Der Auftrag의 한 장면입니다. 원래 "과업"은 안나 제거스의 소설 "교수대 위의 빛"에서 모티프를 얻은 것입니다. 작품에는 흑인 사스포르타가 등장하는데, 그는 프랑스 혁명 시기에 혁명의 밀사로서 영국의 식민지인 카리브 해안의 자마이카에서 노예해방을 획책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나폴레옹 시대에 프랑스 혁명의 정신이 와해됨으로 인하여 좌절되고 맙니다.

 

 

 

뮐러의 작품은 대체로 끔찍하고, 섬뜩합니다. 그 이유는 드라마가 극적 구도와 긴장을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dramatisieren 이 단어의 뜻은 무엇인가요? 하이너 뮐러는 작품 임무에서 제3세계에 대한 제 1세계 사람들의 착취 구도, 두 개의 이질적 문화 그리고 경제적 종속관계를 신랄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극작품 햄릿 기계의 한 장면. 뮐러는 유럽의 역사를 "여성에 대한 잔악한 폭력의 과정"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유럽 Europa"은 신화에 의하면 페니키아 왕의 딸로서 아름다운 처녀였습니다. 제우스는 그미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황소의 모습으로 변장하여 그미와 짝짓기를 끝냅니다. 유럽은 미노스를 출산하는데, 그는 크레타의 왕이 됩니다. 한마디로 유럽의 역사는 상징적 의미에서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역사로 요약될 수 있다고 합니다.  햄릿 기계는 다섯 개의 장면으로 이루어진 짤막한 작품입니다. 원래 이 작품은 90 페이지의 방대한 작품이었는데, 뮐러는 이 작품을 불과 8페이지로 축소시켰다고 합니다.

 

 

 

작품 햄릿 기계에서 오필리아는 남성적 폭력에 의해서 피해당하는 여성 상으로 등장합니다. 그미는 셰익스피어의 극작품에서는 아버지, 폴로니우스의 죽음으로 갈팡질팡하다가 정신을 잃어, 자신도 모르게 강물에 빠져 익사하는 수동적 여성입니다. 오필리어는 서양 문학에서 남성 사회에서 핍박당하는 여성의 전형으로 묘사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하이너 뮐러의 햄릿 기계에서는 이와는 반대로 복수하는 엘렉트라의 모습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사진은 1981년 어느 낭독회에서의 사진입니다. 뮐러의 곁의 여성은 그의 세 번째 부인 긴카 촐라코바입니다. 그미는 불가리아 출신의 배우 내지 연출가로서 뮐러와 함께 "과업"을 공동 연출하였습니다. 뮐러는 이 시기에 무척 가난하게 살았지만, 쿠바산 여송연만은 포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브레히트 이후의 최대의 극작가 하이너 뮐러의 전집. 극작품, 시집 그리고 산문, 대화록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두터운 책 3권은 그와의 인터뷰 모음집입니다. 뮐러는 그만큼 즉흥적으로 여송연을 피우면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를 즐겼으며, 해박한 지식을 전해주곤 하였습니다.

 

 

 

 

왼쪽부터 뮐러의 네 번째 부인과 그의 딸. 하이너 뮐러 (1929 - 1996). 뮐러는 자신보다 36세 나이 어린 사진예술가, 브리기테 마리아 마이어 (1965- )와 결혼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결혼이 아무리 개인과 개인의 만남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좀 심한 것 같습니다. 자신의 딸과 같은 여성과 결혼식을 올린 것은 한국인의 정서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뮐러는 달리 주장합니다. 사랑에 무슨 나이 차이가 중요한가? 오히려 남의 이목이 두려워 모든 것을 비밀로 하는 소인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안나 뮐러는 1993년에 딸 안나 뮐러를 출산하였습니다. 뮐러는 64세의 나이에 손녀가 아니라, 딸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이너 뮐러는 구동독에서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자고로 극작가는 소설가 시인들과는 달리 갈등 내지 문제점을 명시적으로 드러내어야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하이너 뮐러의 문학 작품은 당국으로부터 언제나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사진은 하이너 뮐러 서고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하이너 뮐러의 작품 초고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도로테엔슈타트 공동 묘지에 영면하고 있는 하이너 뮐러. 그는 죽어서도 후세 사람들의 영혼 속에 인간적으로 문학적으로 하나의 표본으로 살아있습니다. 독일 통일 이후에 하이너 뮐러는 세인들로부터 비판을 당했습니다. 뮐러가 구동독에서 특권을 누렸다는 점 (이것은 사실과는 전혀 다르다그리고 슈타지의 비공식 요원으로 활약했다는 점 (이것은 오래 전의 이야기이다.) 등으로 인하여 뮐러는 구설수에 올랐습니다. 이때 하이너 뮐러는 절필을 염두에 두면서 장시 "몸젠의 블록" 그리고 "이를테면 아이아스" 등을 집필 발표하였습니다.

 

 

 

 

선글라스 그리고 쿠바산 여송연은 그의 전매 특허이기도 합니다. 뮐러는 자신을 스스로 경악의 기록자라고 소개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이너 뮐러의 부인인 브리기테 마이어는 그의 작품 해부 티투스를 소재로 극작품을 공연하였습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동영상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5분 12초)

https://www.youtube.com/watch?v=n6yWCtStB_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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