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loch 저술

서로박: 블로흐와 아도르노

필자 (匹子) 2021. 3. 23. 10:32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가 부분적으로 용인했던 유토피아의 이데올로기 비판이라는 기능마저 부인한다. 아직 존재하지 않은 미래를 선취하는 태도는 아도르노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을 아직 확정되지 않은 전체로 매도하는 자세와 다를 바 없다. 어떤 다른 현실은 미래의 선취하는 의식에서 파생되는 게 아니라, 과거에 이미 주어졌던 현실에서 자연스럽게 재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현실의 모순은 그 과정에 있어서 언제나 계획이나 진단에 의해서 전개될 뿐, 일반 사람들이 갈구하는 바는 결코 현실로 나타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현실의 모순은 변증법적으로 발전되거나, 사회적 진보를 추동하는 게 아니라, 영원히 모순 상태로 남아 있을 뿐이다. (Hermand: 109). 그것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주어진 현실에서 해결되거나, 극복될 수가 없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이 미래를 기대하고 이를 신뢰하는 태도는 아도르노에 의하면 그 자체 바람직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유토피아는 그 자체 무력하고 무기력한 사고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것은 비판의 기능을 불러일으키지만, 이러한 비판의 기능은 유토피아 속에 부분적으로 내재하던 긍정적 기능마저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상기한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아도르노는 부분적으로 프로이트의 이론을 끌어들인다. 이는 마르쿠제를 연상시키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을 도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를테면 마르쿠제가 프로이트의 쾌락원칙, 판타지, 억압 그리고 승화의 개념에서 어떤 잠재적 유토피아를 찾으려한 반면, 아도르노는 개인의 주관적 요소 (내적 본능 내지 동물의 특성으로서의 이드 Id)를 인류 역사로 나타난 초자아라는 객관성 속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자유에 대한 능력은 아도르노에 의하면 -주관성으로 떠올린 것이라는 전제 하에서- 기껏해야 상황을 조절하기 위한 사고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삶을 꾸려가는 내적 조건으로서의 현실 그리고 삶을 꾸려나가는 외부적 조건으로서의 현실 사이에 주어지는 것은 어떤 한계 내지 제한밖에 없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조절의 영역에서 유토피아가 차지할 공간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아도르노는 유토피아의 무능력에 대한 구체적인 예를 인간의 “행복”에서 발견하려고 한다. 행복은 인간의 기대감에 불과할 뿐, 처음에 갈구하던 그대로 실현되지는 않는다. 행복은 인간 삶에 언제나 어긋나게 등장하거나 시간적으로 뒤늦게 나타날 뿐이다, 항상 동일한 거짓 행복은 종국에 이르러 어떤 깊은 절망으로 변화된다고 한다.

 

만약 어떤 상상이 시대와의 관련성 때문에 파기될 수 없다 하더라도, 그것은 최소한의 경우 과거에서 현재까지만 효력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형성될 수 없다면, 미래는 결코 과거 속에서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한 아도르노는 “미래는 오로지 파괴와 파괴적인 것을 미리 담고 있다.”라는 발터 벤야민의 부정적 발언에 동의한다. 미래는 벤야민에 의하면 기껏해야 어떤 급진적 새로움을 요구하는 텅 빈 공간을 생산한다. 구원에 대한 의식이 모든 정신의 가장 내면적인 충동이라면, 희망은 벤야민에 의하면 아무런 조건 없는 포기의 충동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벤야민은 “역사의 영속성이라는 모든 이데올로기에 대한 공격”에 대한 예로서 하나의 “파괴성Destruktivität”을 제시한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수많은 단절을 담고 있는 역사 자체를 파괴성과 동일한 차원에서 파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아도르노의 경우 역사 자체는 처음부터 파괴적 특성을 전제로 하고 있다. 아도르노는 진화론적으로 미래를 마련하려는 자에 대항하기 위해서 미래 없는 영속성이 필요하다고 주창한다. 따라서 미래에 대한 “상의 금지Bilder-Verbot”는 아도르노에게 필수적이다. 찬란한 미래의 상을 제시하고, 인민을 현혹시킨 자들은 언제나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들이었다고 한다.

 

아도르노는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출현하는 절망적 상황을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다. 가령 아우슈비츠의 대학살, 야만의 역사, 폭력과 전체주의, 전체주의, 기계 중심주의 그리고 황금만능주의 등을 생각해 보라. 그렇지만 인간이 주위에서 출현하는 절망적인 상태로 인하여 바로 희망의 지조를 깡그리 저버려야 하는가? 아도르노에 의하면 “상의 금지”라는 틀 속에서 예술만이 유일하게 예외적으로 어떤 긍정적인 상을 창조할 수 있다고 한다. 예술만이 미래의 출현을 구상적으로, 다시 말해 하나의 개연적 면모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술작품은 “미적 정신”으로서의 유토피아의 흔적을 다만 순간적으로 잠깐 보여줄 뿐이다.

 

그렇지만 예술에 반영된 미래 출현의 면모는 다분히 염세적이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예술이 지닌 유토피아의 전언은 현재의 상태에서 과거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한다. 예술 속의 유토피아의 흔적은 비지속성, 비 인내성, 파괴된 약속 그리고 비 언어성만을 묵시적으로 표출한다. 그렇기에 예술에 반영된 유토피아의 요소는 부정적이고, 비판적이며,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기대할 수 없는 가능성”만을 예술의 수용자에게 전해줄 뿐이다.

 

자고로 예술작품은 그 특성과 기능에 있어서 기록물과는 엄연히 다르다. 사회 내의 야만적인 내용을 담은 르포의 집필 작업은 자유롭게 유희하는 시작품을 창작하는 작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예술은 아도르노의 주장대로 지식과 같은 사용가치와 구별됨으로써, 스스로의 자율성을 보존한다. 예술은 아도르노에 의하면 구상적인 방식으로 유토피아를 비판한다. 다시 말해서 예술 작품은 유토피아의 무기력함을 구체적으로 생산해낸다는 것이다. 예술의 객관적 동기로 작용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비판과 거절이라는 기본적 모티프라고 한다. 만약 예술이 부정과 비판의 제스처를 포기한다면, 예술은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잠식당하고 결국은 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아도르노는 호르크하이머Horkheimer와 마찬가지로 유토피아를 이른바 비판이라는 추상적 개념 내지 비판의 보편적 기능 속으로 편입시킨다. 만약 드러난 세상이 잘못된 것이라면, 예술가는 예술적 표현을 통하여 드러난 세상이 거짓된 것임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쿠제Marcuse는 “드러난 세상과는 다른 성공적인 가상을 감각적 당위성으로 밝혀내는 것”을 예술 행위라고 규정하였다.

 

마르쿠제에 의하면 예술 작품은 실제 사회 형태의 요구와 반대되는 비판적 유토피아의 상을 표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하면 아도르노는 예술의 이중적 특성, 다시 말해서 예술이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어떤 다른 무엇을 찾아내는 일련의 작업을 추호도 인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은 인간이 갈구한 희망의 역사에서 한 번도 제대로 진척되고 완결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도르노는 역사 속에 인류의 미래에 관한 상이 은폐되어 있다고 믿는 블로흐의 입장을 어리석다고 논평할 뿐이다. 만약 아도르노가 블로흐의 문헌을 읽고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충분히 이해했다면, 두 사람 사이의 첨예한 의견대립은 출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즉 블로흐의 희망의 개념 속에 헛된 망상의 요소가 배제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블로흐가 말하는 구체적 유토피아는 역사와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전제로 한 부정의 부정이라는 요소를 포괄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 두 가지 사항이다.

 

참고 문헌:

- 아도르노: 미니마 모랄리아, 김유동 역, 길 2005..

- 이하준: 부정의 유토피아, 세창 출판사 2019.

- Theodor Adorno: Negative Dialektik, Frankfurt a. M. 1966.

- Klaus L. Berghahn: Zukunft in der Vergangenheit, Bielefeld 2008.

- Jost Hermand: Orte. Irgendwo. Formen utopischen Denkens, Königstein/Ts. 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