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독일시

서로박: 하이너 뮐러의 연애시 (3)

필자 (匹子) 2020. 8. 1. 11:27

 

나: 그런데 하이너 뮐러는 자신의 연애시를 생전에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너: 글쎄요. 어쩌면 순수 극작품을 집필하는 작가로서 사적인 사랑에 관한 작품을 발표하기 꺼렸을 것입니다. 특히 미발표 작품은 포르노 그리고 연애시 사이의 한계가 모호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의 연애시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작품은 인간의 적나라한 성욕을 있는 그대로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 마지막으로 브레히트의 초기 시 「나무 오르기에 관하여 Vom Klettern in Bäumen」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너희가 저녁에 물속에서 올라오면

틀림없이 너흰 벌거벗고, 피부는 부드러울 거야.

또한 잔잔한 바람결에 너희의 커다란 나무로

올라가겠지 하늘 역시 창백해 있을 거야.

컴컴한 저녁이면 천천히 우듬지를 흔들어주는

커다란 나무들을 찾아보아라.

그리고 나뭇잎 속에서 밤을 기다려라,

그러면 이마 주위에 악몽과 박쥐가 맴돌 거야.

 

덤불의 적고 거친 잎사귀들은

가지들 사이를 통과할 때 몸을 받쳐주는

너희의 등을 할퀼 것이다. 그렇게 너희들은

약간 신음하면서 가지를 타고 더 높이 오르겠지.

나무 위에서 흔들어대는 건 정말 멋진 일이야.

허나 무릎을 이용해서 흔들면 안 되고

나무가 우듬지에게 흔들 듯이 그렇게 해야 해.

나무들은 수백 년 전부터 저녁마다 우듬지를 흔들지.

 

나: 이 시는 『가정기도서 Hauspostille』(1927)에 실린 시 작품으로서, 아마도 젊은 브레히트의 연애 체험을 바탕으로 집필된 것 같습니다.

너: 네, 시인은 분명히 아우크스부르크 교외의 한적한 곳에서 어느 처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시는 두 남녀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벌거벗은 몸으로 나무 위로 올라가는 섬진 놈 멱진 년만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나: 그런데 “악몽 Mahr”과 “박쥐 Fledermaus”라는 시어가 무척 생경하게 들리는데요?

 

너: 그건 나의 주관적인 판단이지만 아마도 시민 사회의 성도덕과 시민 사회 사람들의 사랑의 삶을 풍자하는 것 같습니다. 20세기 초의 유럽 시민 사회는 대체로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을 용인하지 않고, 인간의 모든 성행위를 결혼이라는 카테고리에 종속시키기 때문이지요, 남녀의 성행위는 오로지 결혼을 통해서 미화되고, 마치 더러운 빨래를 몰래 씻듯이 결혼을 통한 출산과는 상관없는 모든 애정행각은 그 자체 “악몽”이라는 것입니다. 게다가 시민 사회는 마치 우리나라의 배비장 裴裨将이 그러하듯이 모든 욕망을 남몰래 해결하지 않습니까?

 

나: 마치 “박쥐”가 밤에 모든 일을 해치우듯이 말씀이지요?

너: 그렇지요, 동물들은 남들이 보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암수 서로 끌어안지만, 사람들은 몰래 어두운 밤을 이용하여 성을 교합하지요, 그런데 식사할 때는 이와 다르지요. 사람들은 공공연한 장소에서 여럿이 모여서 식사하는 데 비해, 야생 동물들은 자신이 감추어둔 먹이를 혼자 몰래 꺼내 먹어치우지 않습니까? 참으로 기이하게 보이네요.

 

나: 어쨌든 브레히트의 시는 생식기에 대한 비유를 “나무”와 :바람“으로 대치시키고 있습니다. 바람이 나무의 “우듬지”를 흔들 듯이, 시적 자아는 “나무를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자연의 행위와 인간의 행위가 서로 일치된다고나 할까요?

 

너: 어쨌든 발설하기 어려운 연애시를 소개해주셔서,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사랑과 성은 “참을 수 없는 생명 존재의 가벼움”으로 비유되곤 하지만, 그 속에는 너무나 깊은 인간의 갈망과 아픔 그리고 그 상처에 대한 해원이 숨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과 성의 문제로 인하여 목숨을 끊는 경우를 고려하면 우리는 이를 잘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사랑과 성은 에른스트 블로흐도 언젠가 말한 바 있듯이 모든 동물이 지니고 있는, 이별을 연습하는 격정적 트레몰로의 감정을 뜻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