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지적 야수로서의 자기 파괴적이고 성 도착적 인간 상: 20세기 중엽까지 인간은 수많은 전쟁, 인종 탄압 등을 자행하였습니다. 이로써 제기된 것은 다른 인종을 살상하는 지적 야수의 모습입니다. 인간은 한편으로는 천사의 선한 마음을 지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으며, 신뢰할 수 없는 지적 야수라고 합니다. 인간은 부분적으로 자기 파괴적이며, 성 도착적 충동을 지닌 존재라는 것입니다. 이는 갈등을 해결하려는 여러 가지 유형의 유토피아에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가령 칼렌바크의 『에코토피아』에서는 전쟁놀이가 정기적으로 치러지는데,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놀이를 통해서 사망자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볼로의 볼로』에서도 엄격한 규칙 하에 인간과 인간 사이에 결투가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결투를 “야카스yakas”라고 명명합니다. 볼로의 사람들은 이러한 결투를 통해서 자신의 우울 내지 심리적 좌절감을 떨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볼로 사람들은 다음의 사실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즉 서로 피 흘리면서 싸우는 게임을 통해서 국가의 대중적 전쟁을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분권화된 시장 경제, 화폐는 드물게 사용되고 있다: 경제 역시 인간의 변화된 본성에 맞추어 변모되었습니다. 인간은 유형적으로 소유물에 집착한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경제는 더 이상 (과거 고전적 유토피아에서 나타난 바 있는) 전적으로 이타주의의 생활 방식에 토대를 두는 것은 아닙니다. 과거에 사람들은 물품을 생산하여, 그것들을 거대한 물품 보관소에 저장해 두었습니다. 공동체 사람들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물품을 가지고 가면 족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볼로는 자신의 고유한 경제적 조합을 결성하고 있습니다. 조합원들의 수는 정해져 있으며, 서로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타주의의 태도를 취하면서 상대방을 도우며 함께 노동합니다. 이들이 이타주의의 태도를 취하는 까닭은 이웃의 노동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 결코 이타주의를 선의 궁극적 목표로 삼기 때문은 아닙니다. 다른 볼로의 사람들은 인접해 있는 볼로에서 생산된 물품들을 물물 교환의 방식으로 구매합니다. 이 경우 모든 것은 분권화된 시장 경제의 체제 속에서 이행되고 있습니다. 이 경우 화폐는 사용되지 않으며, 공동체 사람들의 모든 재화의 수입과 지출은 물품 거래소에서 제각기 기록됩니다.
17. 이윤 추구의 무역 금지, 혹은 캐비아: 모든 볼로 공동체에서는 이윤 추구를 위한 무역은 금지되고 있습니다. P. M.은 가령 취리히에 있는 어느 코뮌의 무역 계약서를 예로 들고 있습니다. 취리히 사람들은 러시아로부터 철갑상어의 알인 캐비아를 수입하기 위하여 볼가 강의 아스트라한 공동체와 하나의 협정을 체결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독점 계약입니다. 가령 볼가 강의 그 공동체는 얼마든지 많은 대금을 치를 수 있는 부유한 볼로와 비밀리에 계약을 체결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볼로 공동체들들은 계약에 관한 모든 사항을 상호 공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독점 자본의 횡포 내지 자본의 축적을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습니다. 철갑상어의 알은 맛있지만, 작가의 견해에 의하면 절대로 이윤을 남길 수 없는 품목으로 정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윤추구 없는 무역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과다한 수요를 요구하는 물품 판매의 경우 인간은 누구든 간에 더 많은 이윤을 남기고 싶은 욕구를 지니는데, P. M.은 이에 대한 명확한 경제적 규약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8. 농업에 종사해야 하는 의무: 모든 볼로는 농업을 통한 식자재를 자급자족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습니다. 공동체가 식료품의 자급자족을 공동체의 독립의 기본적 조건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것은 어쩌면 기이하게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농산품의 자급자족은 20세기 후반에 출현한 포스트 물질주의 유토피아의 특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농업 생산품의 자급자족은 르네상스의 시기에 생필품 결핍을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으로 채택된 것입니다. 볼로 공동체에서는 밭을 직접 가꾸어 곡식과 과일 그리고 채소를 생산하는 행위는 하나의 의무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강제 규정은 고전적 유토피아에서 언급되는 농업 종사의 의무와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이해됩니다. 과거에는 농업 생산을 위한 자연과학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힘든 육체노동을 행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P. M.은 공동체 사람들로 하여금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자연 과학 기술을 활용하지 못하게 조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동을 직접 행하게 함으로써, 고도의 기술을 사전에 차단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는 차제에 산업에 대한 욕구 내지 산업 발전에 대한 필요성을 약화시키도록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육체노동은 공동체 사람들이 육체적 건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19. 재화의 분배 방법: 볼로 사람들은 모든 생필품을 물품 보관소에서 얻을 수 있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혹은 이웃이 생산한 물건을 필요한 만큼 가져갈 수 있습니다. 이는 작가의 견해에 의하면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의 생활방식이라고 합니다. 가령 수도 내지 전기는 공동으로 사용되고, 소금 설탕 등은 공짜로 분배됩니다. 특수한 물품의 경우 사람들은 세 가지 방식으로 물품들을 다른 볼로와 교환합니다. 첫째는 물물 교환의 방식입니다. 가령 향신료, 올리브유, 호두, 대추, 치즈 그리고 소시지 등의 직접 생산이 불가능할 경우 다른 물품과 교환하는 방식으로 다른 볼로를 통해서 공급받습니다. 둘째는 기술 교환입니다. 인접한 볼로들은 상호 연구 교환 협정을 맺어서 인접한 이웃 볼로와 상호부조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컨대 어느 불로가 다른 볼로들의 창문을 수리해주면, 이번에는 다른 볼로가 이웃 볼로의 화장실을 고쳐줍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술 교환을 “페노feno”라고 명명합니다. 셋째는 기계의 공동 사용을 가리킵니다. 모든 볼로는 건축 기계, 가령 포클레인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볼로와 볼로 사이에는 중앙집권적으로 운영되는 기계 저장소가 위치합니다. 사람들은 필요할 경우 그곳으로 가서 일정 기간 동안 사용할 기계들을 빌려올 수 있습니다.
20. 화폐의 사용과 시장과 바자회: 화폐의 경우 교환의 매개물로서 일부 용인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생필품의 경우 사람들은 화폐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특별한 물품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시장과 바자회에서 방랑 상인들에게 화폐를 지불하고 물품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귀중품, 기이한 옷, CD, 예술 작품, 화장품 등은 화폐로 구매가 가능합니다. 여기서 지방 화폐가 사용되는가, 미국 달러가 공용으로 사용되는가? 하는 물음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아가 볼로 공동체는 가급적이면 생태계에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는 자연과학과 기술을 도입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해서 『볼로의 볼로』에서 고도의 기술이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전기 제품, 자동차 연료 등과 같은 특정 상품은 예외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21. 볼로의 축소된 자동차 산업: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거의 자가용을 타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의 볼로 공동체마다 약 20대의 공용 자동차가 비치되어 있어서, 필요한 경우 얼마든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모든 볼로에는 자동차 산업이 거의 축소화되어 있습니다. 은행 역시 더 이상 자동차 산업을 지원하지 않습니다. 석유 산업과 같은 중공업은 아예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가전제품 또한 생산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볼로의 볼로는 생태계를 교란하는 산업을 더 이상 육성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동차 생산이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닙니다. 모든 필요한 공업 용품은 특정 볼로에서 부품으로 생산되고 있습니다. 자동차 한 대를 필로 하는 어떤 볼로는 다른 볼로로부터 부품들을 공급받아서, 공장에서 직접 조립해서 사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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