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철학 이론

박설호: "인간은 막힘없이 피어나는 우주의 꽃이다." 윤노빈의 '신생 철학'

필자 (匹子) 2023. 3. 7. 08:09

1. 신생 철학은 현세에서 고통당하며 목숨을 이어가는 분들의 피와 땀과 관계되는 문헌입니다. 그것은 식자들을 위한 현학 서적도 아니고, 부유층 자제를 위한 교재도 아니며, 배부른 자세로 주문을 외는 사제들을 위한 교리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억압과 강제 노동에 시달리며, 무거운 짐을 진 채 살아가는 인간을 위한 지침서와 같습니다. 윤노빈의 신생 철학은 세상에서 가장 핍박당하는 민족, 그것도 배달의 민족을 위한 충직한 조언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책은 모든 인위적(人僞的)인 억압, 강제 노동, 감금, 고통, 죽임 등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여기서 벗어나, 새로운 해방 (Exodus)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윤노빈이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사상, 페르시아에서 유래하는 전투적 이원론, 유불선, 노장사상, 동학사상 등에서 자신의 사상에 대한 본질적 모티프를 발견하려 하는 것도 그러한 실천적 가능성을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2. 윤노빈은 세계를 대하는 서양의 관찰 방법을 통렬하게 비판합니다. 서양인들은 무엇보다도 눈을 통해서 모든 사물과 세계를 요소론(要素論)”적으로 규정합니다. (윤노빈: 신생철학, 학민사 2001, 67.) 이러한 특성은 사물은 물론이며, 생동하는 모든 생명체를 오로지 사물로, 유물론적 시각으로바라보면서, 이것들을 명사적으로 구분하고 차단한다는 것입니다. 관념론 역시 이러한 특성에서 결코 제외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눈 ()쪼개는 칼로서 모든 것을 내려다보고 깔봅니다. 모든 사물과 생명체들을 분할하고, 물화시키며, 수직구조로 파악하려는 배후에는 그것들을 소유하고 정복하려는 남성들의 야심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는 나누어라 그리고 지배하라Divide et impera)라는 정복자의 소유욕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정복자의 권력 및 금력을 지향하는 욕구는 서구의 실용주의와 접목되어, 역사적으로 다른 인종, 생각을 달리하는 분들을 수없이 탄압하고 구속하게 하였습니다.

 

3. 인민의 자연스러운 살림을 방해하는 존재는 악마로 규정됩니다. 악마는 교활하게 사물을 강탈하고, 땅을 차단하며, 무고한 사람들을 감금하는 자입니다. 그는 힘없는 사람들에게 복종을 강요하고, 인위적으로 거짓말을 퍼뜨립니다. 이로써 악마는 2의 피에 해당하는 언어의 본질을 왜곡하고, 인민에게 엄청난 고통과 부자유를 안겨줍니다. (윤노빈: 앞의 책, 171). 가령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의 분석 언어철학은 거짓과 흑색선전이 난무하는 현실의 상황을 무시한 것으로서, 윤노빈의 견해에 의하면 의미 없는 이론에 불과합니다. 어찌 언어를 논하는 데에서 고결한 분을 참혹한 죽임 내지 끔찍한 분신자살로 몰아가는 극한 상황을 무시할 수 있단 말인가요? 가장 처절한 극한 상황은 분단 상태입니다. 윤노빈은 차단과 감금의 전형인 형태를 보호구역에 갇힌 인디언들의 경계선, 갇힌 분들의 혈흔이 묻은 게토Guetto의 담장 그리고 무엇보다도 피맺힌 삼팔선 내지는 휴전선에서 찾습니다.

 

4. 남북의 분단 상태는 윤노빈에 의하면 두 개의 분단국가 사이에 그어진 단순한 국경선,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한반도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허리가 두 동강 난 채 신음하는 병든 아담 카드몬 Adam Kadmon”과 다를 바 없으며, 갈등 그리고 모순 등으로 얽혀 있는 서양의 세계관 속의 투쟁적인 전투적 지배논리를 그대로 보여주는 상징적 범례입니다. 남북의 분단은 인류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이어져온 차단, 감금, 억압, 굴종, 부자유 그리고 거짓된 삶의 전형적인 표본입니다. 그것은 가해자의 범죄에 대한 응징으로서 형성된 독일 분단의 경우와는 전적으로 다릅니다. 그렇기에 분단의 극복은 악마들에 의해서 수없이 자행된 피해의 고리를 끊고 마침내 새로운 삶을 찾는다는 점에서 정치적 통일 뿐 아니라, 메시아사상에서 말하는 해방의 최종적 의미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방은 인위적으로 형성된 막힘, 침묵, 차단 그리고 모든 유형의 부자유 등에 대한 투쟁 내지는 극복으로 이해됩니다.

 

5. 그렇다면 이는 어떻게 극복되어야 할까요? 윤노빈은 사람이 하늘이다 (人乃天)”라는 거룩한 명제에서 어떤 해답의 단서를 발견합니다. 여기서 사람이란 서양의 이른바 나누어지지 않는 아톰”, “개인 (Individuum)” 등의 개념이 아니라, 동양의 이른바 대아 (大我, Atma)의 개념과 결부되고 있습니다. 나아가 윤노빈의 인간 개념은 개별적 사람들, 추상적 종()으로서의 인간 그리고 너와 나 사이의 고리등을 모두 포괄합니다. 따라서 그것은 부버Buber, 레비나스Levinas 등이 그토록 찾으려 하던 더 큰 나를 임신한 나와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전언은 궁극적으로 왜 신은 인간인가?Cur Deus homo?”라는 포이어바흐의 인간학적 질문에 대한 근본적인 해답과 같습니다. 가령 거역하고 저항하는 야훼의 특성은 은폐된 인간homo absconditus”으로서의 신의 개념으로 이전될 수 있습니다. (에른스트 블로흐: 희망의 원리, 5, 열린책들 2004, 2852.) 간계, 불신, 투쟁 그리고 분리는 윤노빈에 의하면 인간을 천한 존재 ()” 내지는 지렁이 존재 ()”로 만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한 극복을 통해서 인내천(人乃賤) 내지 인내천(人乃蚕)은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인내천(人乃天)으로 바뀔수 있다고 합니다.

 

6. 그렇다면 하늘은 어떻게 파악될 수 있을까요? 하늘은 이른바 서양의 수직구조로 설정된 상부내지 저세상의 영역이 아닙니다. 서양의 하늘은 우라노스, 크로노스 그리고 주피터 등이 막강한 권능을 행사하는, 수직구조에 바탕을 둔 공간이며, 상부로서의 천국으로 처음부터 설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윤노빈은 하늘을 어떤 비어있는 공간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유불선에서 이해되는 무우주론(無宇宙論)의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서, 이승과 저승이 일도 양단되지 않는 노장사상의 관점 또한 연계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하늘은 모든 권능을 상징하는 상부 내지는 저세상으로서의 높은 공간이 아니라, 인간의 영역으로서의 하늘입니다. 하늘의 공간이 비어있는 까닭은 인간에게 속하는 지상과 지하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신정론(神正論)의 체계는 완전히 파괴되고,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행동하는 임으로서의 하는님내지 전체(全体)로서의 한울(한울타리)”의 안녕을 도모하는 임의 존재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7. 그렇습니다. “인간 신은 윤노빈 사상의 핵심적 사항입니다. 윤노빈은 인간의 본질을 막힘없이(無窮) 피어나는 우주의 꽃이다.라고 규정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발언 속에는 협동과 해방에 토대를 둔, 서로 아우르는 인간의 관계론 내지는 상호성의 유토피아가 내재하고 있습니다. 이는 서구의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일방적인 주체 내지는 개인으로 차단된 휴머니즘의 범주를 벗어날 뿐 아니라, 나아가 스피노자Spinoza의 범신론의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고 있습니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인간은 신의 섭리에 따라 유동하다가 사라지는 티끌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행위는 우주 전체의 관점으로 투시할 때에는 자그마한 점의 휴지(休止)에 불과합니다. 그렇지만 윤노빈에 의하면 소우주로서의 인간은 대우주에 해당하는, 자연 속의 불카누스를 포괄하는 가장 고귀한 생명체입니다. 가령 한인들을 생각해 보세요. 고통, 감금 그리고 분단이라는 질곡을 뛰어넘으면, 배달민족은 막힘없이 피어나는 우주의 꽃인 신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8. 인간은 본질적으로 우주의 꽃이지만, 주어진 현실에서는 억압당하며 살아갑니다. 인간의 존재와 본질 사이의 거대한 위화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윤노빈은 무엇보다도 동학의 정신에서 하나의 해답을 찾으려 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착취와 정복의 욕망을 감춘 채 극동으로 파고든 서양의 학문은 동학을 창조하게 하였습니다. 이 점을 고려할 때 동학은 처음부터 저항과 거역의 자세로 무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항과 거역의 정신은 구체적으로 말해 하늘을 모시고(侍天), 하늘을 키우며(養天), 하늘을 실천하는(体天)의 사상으로 발전되었습니다. 윤노빈은 세 가지 중요한 사항들 가운데 해월 최시형의 양천(養天)”을 특히 강조하였습니다. 하늘을 키우는 과업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까닭은 거기에 어떤 깨달음 내지는 진리의 전달과 가르침이라는 방법론적 과정 그리고 변화 가능성이 도사리기 때문입니다. “초월, 해방 그리고 통일이라는 목표는 가능성 내지는 과정으로서의 하늘을 키우는 작업을 수단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9. “인간신에 관한 윤노빈의 사상은 이른바 자연에 대한 이기적 태도를 취하는 서구의 휴머니즘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왜냐면 그것은 차제에 인간과 자연 사이의 교감에 근거한, 이른바 접화군생(接化群生)”의 입장을 태동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신생의 철학은 모든 인위적(人僞的) 죽임을 간파하고, 하늘의 생존을 위해 투쟁하는 실천 행위를 가리키지만, 생명 사상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윤노빈의 책은 인간에게 거짓을 일삼고, 폭력을 가하며, 이간질을 하고 서로 싸우게 하는 모든 유형의 죄악에 맞서는 책입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차제에 생명 살림에 근거한 생태적인 코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신생 철학이 직접적으로 생명 사상을 전하지는 않습니다만, 동학의 내유신령(內有神靈)”에서 생명 사상의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자들이 찾아내야 할 몫일 것입니다. (다음의 논문과 비교하라. 박준건: 김지하의 생명사상과 율려사상에 대한 하나의 고찰, 대동철학회 2003, 23 50).

 

10. 막힘없이 피어나는 우주의 꽃은 동학사상을 통해서 생명 평화 운동으로 발전되고 실천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궁극적으로 피타고라스 이후로 인류가 상실한, 질적 특성으로서의 자연을 되찾는 과업과 직결됩니다. 나아가 스스로를 단련시키면서 공동체의 안녕을 기원하던 단군 사상 그리고 이러한 모티프를 그대로 수용한 동학사상과 일맥상통합니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수련하면서 가족과 이웃의 안녕을 귀하게 여기는 생활 방식입니다. 이러한 한국인의 정신은 차제에 계승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과업은 유토피아의 상실의 시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개방되어 있으며, 여전히 시도 단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만약 누군가 신생 철학을 탐독하면, 그는 아마 두 가지 사항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큰 기쁨을 위해서 자청해서 고통을 각오하려는 인간 유형그리고 저항과 거역의 정신을 지닌 협동적인 인간신에 대한 믿음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