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내 단상

(단상. 456)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필자 (匹子) 2020. 10. 1. 10:33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 상처입은 분에게 이처럼 아름다운 격려의 문장이 어디 있을까? 마사 누스바움의 3부작의 책, "감정의 격동 Upheavals of Thought: The Intelligence of Emotions" (새물결, 2015)을 읽다가 역자 조형준 선생님의 인용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그대로 인용하려고 한다. 이 사건은 2010년 김귀옥 부장판사의 판결과 관련된 것이다.

 

.................

 

피고인 A양 (16세)은 친구들과 함께 오토바이 등을 훔쳐 달아난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되었다. A양은 작년 가을부터 14건의 절도, 폭행을 저질러 이미 한 차례 청소년 법정에 선 전력이 있었다. 법대로 한다면 무거운 보호처분을 받을 수 있는 죄인이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이날 A양에게 아무  처분도 내리지 않는 '불처분 결정'을 내렸다. 그가 내린 처분은 '법정에서 일어나 외치기' 뿐이었다.

 

김 판사가 다정한 목소리로 "피고는 일어나 봐"하고 말하자,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던 A양이 쭈볏쭈볏 일어났다. 그러나 김판사가 말했다. "자, 날 따라 힘차게 외쳐 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멋지게 생겼다'". 예상치 못한 재판장의 요구에 잠시 머뭇거리던 A양이 나직하게 "나는 세상에서..."라며 입을 뗐다. "자 내 말을 크게 따라해 봐.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에 두려울 게 없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 "이 세상은 나 혼자가 ....." 큰 소리로 따라하던 A양은 '이 세상은 나 혼자가 아니다'라고 외칠 때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김 판사가 이런 결정을 내린 건 A양이 범행에 빠져든 아픈 사정을 감안했기 때문이다.

 

A양은 본래 반에서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간호사를 꿈꾸던 발랄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작년 초, 남학생 여러 명에게 끌려가 집단 폭행을 당하면서 그녀의 삶은 급속하게 바뀌었다. A양은 사건의 후유증으로 병원 치료를 받았고,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신체 일부가 마비되기까지 했다. 심리적 고통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A양은 이후 학교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비행 청소년과 어울려 범행을 저지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 판사는 울고 있는 A양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아이는 가해자로 재판에 왔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삶이 망가진 것을 알면 누가 가해자라고 쉽사리 말하겠습니까? 아이 잘못이 있다면 자존감을 잃어버린 겁니다. 그러니 스스로 자존감을 찾게 하는 처분을 내려야지요." (...) 법정에 선 16세 소녀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보호 감호라는 법적 처분보다 자존감을 살리는 자신을 향한 외침이었던 것이다. "일어나서 힘차게 외쳐라!" (조형준: 1328 페이지 이하)

 

...........................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여러 가지 사항을 생각한다. 1. 죄에 대해 판결을 내릴 때 재판관은 겉으로 드러난 범행 뿐 아니라, 범행의 이유와 배경까지 고려해야 한다. 2. 여성에 대한 폭력은 피해자의 삶을 완전히 망가지게 만들므로, 철저하게 밝혀져야 한다. 3. 성폭력 상처에 대한 치유는 가해자의 진정어린 사죄 그리고 피해자의 자존감의 회복으로 시작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