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사회심리론

호모 아만스. 치유를 위한 문학 사회심리학 서문 (2)

필자 (匹子) 2022. 5. 30. 10:31

(앞에서 이어집니다.)

 

3. 본서의 집필 의도: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본서의 집필 의도는 세 가지 사항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로 본서는 문학과 사회 심리학 사이에 도사린 벽을 허물면서, 호모 아만스의 사랑과 성과 관련된 심리 이론 및 실제 삶에 있어서의 사회 심리학적 문제점 등을 천착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프로이트 이후의 제반 (사회) 심리학의 이론 속에 도사린 특성과 하자 등을 요약 정리하는 게 급선무입니다. 특히 이 문제가 무엇보다도 학제적 차원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까닭은 인간의 사랑의 성에 관한 제반 문제점들이 하나의 폐쇄적 학문 영역 속에서 다루어질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본서는 사랑의 결핍 내지는 왜곡 현상이 여러 가지 다양한 왜곡된 행동 양상을 낳고 심리적 갈등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을 명확히 하려고 합니다. 이에 관한 예는 실제 현실에서 그리고 문학 치료의 과정에서 수없이 드러난 바 있습니다. 셋째로 본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러운 사랑의 삶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일부의 특정한 사회적 편견, 강제적 성윤리 내지 이데올로기 등의 본질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필자가 시민 사회의 강제적 성 윤리를 아무런 조건 없이 배격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와 관련하여 “모든 화간 (和姦)은 사랑을 전제로 할 경우 죄악으로 규정될 수 없다.”라는 게일 루빈Gayle Rubin의 입장이라든가, “보수주의자들은 섹스를 오로지 사랑의 수단으로만 이해한다.”는 러셀 바노이Russell Vannoy 등의 비판에 아무런 조건 없이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회 전체의 규범이 존재하는 까닭은 호모 아만스의 사랑과 성의 실천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크고 작은 심리적이고 사회적으로 어떤 피해를 가하거나 상처 입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본서가 사랑과 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우직하게 “자유이냐? 질서이냐?”라는 물음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깊이 숙고해야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입니다. 첫째로 인간은 원하던 원치 않던 간에 주어진 사회적 관습의 영향을 받고 살아갑니다. 둘째로 어떤 특정한 관습이 처음부터 인간 동물의 자유를 완강하게 가로막는 편견으로 판명된다면, 그리하여 주어진 여건 속에서 수정이 불가능할 경우에 우리는 이러한 편견을 거부하고, 차단시켜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인간 동물은 언제나 주어진 특정한 사회의 관습, 도덕 그리고 법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살아왔습니다. 문제는 지금까지의 주어진 관습, 도덕 그리고 법 가운데에 부분적으로 하자들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회 윤리의 역사를 고찰할 때, 인간은 금기와 타부를 조금씩 축소시키며, 지상의 행복을 누리기 위한 자유의 영역을 서서히 넓혀 왔습니다.

 

역사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을 무조건 추종하다가, 심리적 질병에 시달리는 자들이 속출하였고, 사회적으로는 권위에 맹종하는 수많은 비민주적 인간형이 양산되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문제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랑과 성에 관한 한 하나의 척도만을 용인하고, 이에 어긋나는 모든 사랑의 패턴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식의 일도양단하는 태도는 그 자체 엄청난 편견과 부작용을 낳게 됩니다.

 

사랑의 삶에 있어서의 남녀의 역할을 구분하는 보수적 가부장주의 그리고 혼인을 전제로 하지 않는 성을 무조건 금기로 규정하는 강제적 성도덕 등은 -적어도 21세기의 유럽 사회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인종, 나이, 성별 그리고 신앙 등을 이유로 개별 인간의 모든 자기 결정권을 제한하고 차단하는 것은 전근대적인 처사로 밝혀졌습니다.

 

나아가 동성애와 트랜스젠더들에 대한 부정적 반응 내지 선입견을 고려할 때, 우리는 얼마나 주어진 질서에 근거한 편견 내지 우상에 사로잡혀 살아가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요약하건대 본서는 문학 치료와 결부된 사회 심리학의 제반 문제점 등을 지적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21세기 한국 사회에 퍼져 있는 관습, 도덕 그리고 법 등에 도사린 부분적 하자를 유추하도록 의도할 뿐입니다.

 

4. 사랑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려는 것은 아니다.: 상기한 사항과 관련하여 “호모 아만스”라는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구적 의미로 “사랑하는 인간”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현실에서 인간 동물을 힘들게 하는 정서들 가운데에는 가령 분노, 미움, 비애, 공포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의 몸은 움직이는 시한폭탄으로 반응합니다.

 

분노는 급기야 광기의 폭력을 부추기고, 미움과 질투의 감정은 때로는 히스테리라는 왜곡된 행동 양상을 드러내게 합니다. 비애는 극도의 우울과 좌절을 맛보게 하고, 두려움은 우리의 신경을 극도로 자극하여 불안 심리와 강박증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작용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때로는 우리의 심리적 아픔을 치유해주고 우리의 삶을 즐거움으로 치장하게 하는 것은 사랑의 정서입니다.

 

여기서 필자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가 『사랑의 예찬L’eloge de l’amour』(2008)에서 거론한 것처럼 단순하고 구태의연하게 사랑을 찬양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만약 바디우가 주장한대로 사랑이 진리를 생산해내는 절차라면, 이는 오로지 등 따뜻하고 배부르게 살아가는 인간군에게만 해당될 뿐입니다. 필자는 사랑의 예찬 대신에 오로지 사랑의 행위가 끼치는 사회 심리적 기능을 냉정하게 지적하려고 의도할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분노, 미움, 비애 그리고 공포를 완전히 극복해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랑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는 엄청난 착각 속에 빠질 수 있습니다. 사랑이 모든 인간의 부정적 갈등을 해결해준다고 함부로 단언한다면, 우리는 급기야는 혐오나 저주마저 어처구니없게도 사랑의 왜곡된 표현이라고 잘못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5. 사랑의 개념을 둘러싼 두 개의 허구적 상: 따라서 우리는 사랑의 정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두 가지 사항을 전제조건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 하나는 애틋한 사랑의 갈망이 어쩌면 이른바 “사랑의 감정을 사랑하는” 허상이라는 가설을 가리킵니다. 러셀 바노이가 주장했듯이, 시민 사회가 성욕을 허울 좋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시켜, 자신의 성욕에 고상한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마치 찬란한 삶을 찬양하지만, 죽음으로부터 등을 돌리며 인간의 죽음에 책임지지 않는 올림포스 신들의 반쪽자리 권능처럼 반쪽짜리 진리일지 모릅니다. 차라리 “몸에 성호르몬이 가득 차 있을 때 성의 파트너는 아폴론, 혹은 비너스로 보인다.”라는 어느 동독의 마르크스주의자의 관점이 더 솔직하게 다가오기도 합니다.

 

다른 하나는 우리가 갈구하는 완전한 사랑, 영원한 사랑이라는 이상이 어쩌면 가부장적 가치 질서의 단선적 사고에서 파생된 것이라는 가설을 가리킵니다. 일부일처제의 가부장주의 속에는 이른바 부부의 영원한 사랑이 은밀하게 미덕으로 정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미덕은 지금까지 삶의 안정을 갈구하는 의식의 보수성과 접목되어 체제 옹호적으로 작동해 왔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여성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남성중심주의 사회에서 언제나 사랑받는 수동적 마네킹으로 살기를 강요당해 왔습니다.

 

일부일처제의 미덕은 급기야는 금슬 좋은 부부의 사랑을 내세우면서, 다른 유형의 사랑의 패턴을 싸잡아 매도하고 탄핵하는 수단이 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대부분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여 이를 수정하기는커녕, 오로지 자신의 사적인 사랑에 집착하는 것은 참으로 기이한 현상입니다. 이는 마치 대학입시 제도를 개선하려고 노력하기는커녕, 오로지 제 자식만 좋은 대학에 입학하기를 바라는 선량한 부모들의 소시민적 사고와 흡사합니다.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