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소네트
그댄 자주 나무랐어, 내가 ‘성기fica’, 피렌체
방언에 의하면 여자들의 수치를 일컫는 그 단어를
함부로 사용한다고. 사람들은 바로 그 때문에
위대한 단테에게 거칠게 비난을 가했지.
그가 감히 시 작품에 그 단어를 사용했으므로.
오늘 읽어보니, 단테가 모욕당한 것은 그 때문이었어.
파리스가 헬레나와의 성교 때문에 수모 당했듯이
(파리스는 전설을 통해 더 많이 알고 있었지!)
그러나 지금 그대는 감정 마른 단테도 광란의
논쟁 속으로 휘말려 들어갔음을 잘 알겠지. 평소에는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하던 그 단어 때문에
우리는 마키아벨리 등을 통해서 잘 알고 있어,
삶에서든, 책에서든 간에 응당 유명할 수밖에 없는
그 단어에 관한 논쟁이 자주 벌어지는 것을,
Das dreizehnte Sonett
Das Wort, das du mir oft schon vorgehalten
Kommt aus dem Florentinischen, all wo
Die Scham des Weibes Fica heißt. Sie schalten
Den großen Dante schon deswegen roh
Weil er das Wort verwandte im Gedichte
Er wurd beschimpft drum, wie ich heute las
Wie einst der Paris wegen Helenas
(Der aber hatte mehr von der Geschichte!)
Jedoch du siehst jetzt, selbst der düstere Dante
Verwickelte sich in den Streit, der tobt
Um dieses Ding, das man doch sonst nur lobt,
Wir wissen’s nicht nur aus dem Machiavelle:
Schon oft, im Leben wie im Buch, entbrannte
Der Streit um die mit Recht berühmte Stelle.
.........................
지금까지 소네트는 사랑하는 임을 애타게 원하는 사람에 의해서 소야곡으로 활용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꿈결 속에서 사랑하는 임을 그리는 애타는 정서는 그렇게 호소력을 지니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의 사람들은 영원한 사랑이라는 정서가 시민 사회에서 일부일처제의 결혼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가상이라는 사실을 감지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또한 사랑과 성이 옳든 그르든 간에 반드시 결혼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임과 “쿨”하게 헤어질 수 있게 된 것은 남녀평등의 사고가 낳은 결실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페트라르카Petrarca로부터 셰익스피어Shakespeare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동안 고상한 소네트는 조야한 소네트로 변화를 거듭하게 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 하에서 이해됩니다.
실제로 페터 학스Peter Hacks는 사적인 대담에서 오늘날 소네트가 패러디로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때 브레히트는 냉담한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오늘날 소네트는 포르노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이 임을 그리워하는 애타는 마음이 아니라, 인간의 몸속의 호르몬의 분비 현상일 수 있다면,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사랑의 허상이 아니라, 인간의 성적 욕구일 수 있다는 것이 브레히트의 생각이었습니다.
브레히트는 소네트가 포르노를 위해서 활용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브레히트의 소네트는 무작정 포르노 문학으로 규정될 수 있을까요?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표현에 있어서 여러 가지 비속어, 이를테면 “알 까다vögeln” 내지 “성교하다ficken” 등의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단순한 이유 하나만으로 문학 작품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브레히트의 지론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의 시민 사회는 기독교에 근거한 일부일처제의 금욕의 윤리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유부녀와의 간음 내지 유부남과의 통정을 금기시해 왔습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성에 관한 구어체는 이른바 본격적인 (고상한) 문학 작품에서는 금기시되어 왔던 것입니다.
브레히트의 소네트를 살펴보겠습니다. “fica”란 여성의 성기에 대한 구어체의 표현입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소네트에서 여러 차례 “성교하다ficken”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브레히트의 협력 작가이자 연인인 마르가레테 슈테핀은 이를 별로 바람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브레히트는 그미의 이러한 반응에 대해 대응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사실 단테 역시 자신의 문학 작품을 집필할 때 바로 “fica”라는 단어를 사용했는데, 사람들은 “위대한 단테에게 거칠게 비난을 가했”습니다.
성적 표현의 문제로 작가와 예술가에게 비난을 가한 것은 단테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호메로스는 『일리아스』에서 유부녀 헬레나를 농락한 트로이의 왕자를 심도 있게 묘사하였습니다. 이때 헬레나의 눈동자는 “발정 난 암캐의 눈빛”으로 비유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파리스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에 의해서 “헬레나와의 성교 때문에” 비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파리스 역시 그 이전부터 남녀의 사랑과 짝짓기에 관한 이야기를 “더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에서 사랑과 성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1. 바알-마르두크는 이스타르-사르파니트와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리게 되는데, 이는 괴테의 『서동시집Der westöstliche Diwan』에서 하템과 술라이카의 신비로운 합일로 이어집니다. 2. 로마 황제, 엘라가발은 해와 달이 일치되는 순간에 여사제 타니트와 합방을 치릅니다. 3. 이러한 관계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동침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사실 클레오파트라는 뱀에 의해 자결하는데, 이는 이스타르-사르파니트의 신비로운 주술과 깊은 관련성을 지닙니다.
4. 이집트의 신, 오시리스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머물 때부터 이지스를 사랑했는데, 나중에 네프티스와 간통하다가 발각됩니다. 5. 오시리스와 이지스의 운명은 그들의 자식, 헬리오스와 셀레네에게 그대로 이어집니다. 6. 영지주의자, 시몬 마구스Simon Magus는 친딸인 소피아Sophia를 홍등가에 보낸 다음에 다시 만나 성스러운 결혼식을 올립니다.
7. 이러한 만남은 괴테의 『파우스트』 제 2부 제 3막 주인공과 헬레나 사이의 동침으로 이어져 오이포리온을 잉태하게 합니다. 한마디로 “성기fica”는 “삶에서든 책에서든” 간에 “사람들이 그렇게 찬양”하는 대상이지만, “성교하다ficken”는 표현으로 인하여 사람들 사이에 엄청난 논쟁을 불러일으키곤 합니다.
소네트 12행에서 “마키아벨리”라는 표현은 자세한 설명을 요합니다. 『군주론』의 저자,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518년 초에 희극 「만드라골라Mandragola」를 집필한 적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의 작품은 유부녀와의 불륜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주인공 갈리마코는 피렌체 사람으로서 니키아와 결혼한 루크레치아를 마음에 품습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루크레치아와 사랑을 나누려고 합니다. 이때 사용되는 것은 “만드라골라”, 즉 “알라우넨Alraunen으로 명명되는 최음제였습니다. 결국 갈리마코는 최음제를 활용하여 루크레치아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어 그미를 임신시킵니다. 나중에 두 사람은 찬란하게 결혼식을 치르는데, 이는 파리스와 헬레나, 시몬 마구스와 소피아, 하템과 술라미트 등을 방불케 하는 성스러운 결혼식을 방불케 합니다.
요약하건대 사람들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음속으로는 애타게 사랑과 성을 갈구하지만, 겉으로는 사랑과 성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를 비난하고 헐뜯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브레히트에 의하면 “성기fica” 등과 같은 비속어 내지 거친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시민 사회의 겉 다르고 속 다른 도덕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회적 금기로서 작용하는 혼외정사를 무조건 부도덕하다고 매도하면서, 작가를 음란성의 도마 위에 놓아두고 마구잡이로 난자합니다.
마지막 한 말씀: 브레히트의 입장을 수긍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당연히 독자의 몫이라고 여겨집니다. 다만 어떠한 이유에서 브레히트가 자신의 소네트에서 문학적 검열, 그것도 사회적 이슈가 아니라, 성적 심리적 이슈를 은밀히 다루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이해하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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