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뮌처가 실천한 천년왕국의 혁명 (4)

필자 (匹子) 2020. 6. 26. 11:00

 

19. 혁명의 실패 원인: 독일 농민 혁명의 실패는 한마디로 혁명의 전략과 조직에 있어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뮐하우젠에서 뮌처는 재세례파 사람들과 의견을 합치시키는 논의 과정에서 사람들과 약간의 의견 대립을 맞이합니다. 이러한 의견의 불일치는 북독의 권력자들에게 체포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는 거사의 치밀한 계획을 세우지 못하도록 작용하였습니다. 뮌처는 취조의 과정에서 혁명의 실패가 이를테면 기독교 정신이 약했기 때문이 아니라, 일부 농민들의 사리사욕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온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북독의 재세례파 사람들은 남쪽 독일 지역의 농부들과 힘을 결집시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뉘른베르크로 떠난 사람이 바로 뮌처의 동지인 하인리히 파이퍼였습니다. 그러나 파이퍼는 뉘른베르크에서 뮌처의 팸플릿을 간행하려는 의지를 성사시키지 못했고, 남쪽 독일로부터 추방당하게 됩니다. 어쨌든 농민 혁명에 가담한 사람들은 각자의 이해관계로 인하여 단결된 모습으로 전략을 짜지 못했고, 이는 결국 조직적 와해로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를테면 뮌처는 뮐하우젠에서 농부들에게 귀금속과 현금에 집착하지 말고, 혁명 운동에 매진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으나, 일부 농부들은 뮌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장 굶주림과 가난을 떨치기 위해서 눈앞의 재화에 집착하였고, 이로 인하여 뮌처의 일사불란한 계획은 차질을 빚게 되었고, 일사불란한 전략은 제대로 실천되지 못했습니다.

 

20. 계시에 대한 뮌처의 믿음: 토마스 뮌처의 혁명적 자세의 배후에는 어떤 계시에 대한 믿음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뮌처는 선택받은 기독교인들의 공동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내적 언어를 신뢰하고 이를 믿음으로써 지속적으로 발전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전통적 권위를 내세우는 가톨릭 신앙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전통적 교회와 성당은 계시가 이미 오래 전에 종결되었다고 믿으면서 권력과 결탁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신의 정신은 뮌처의 견해에 의하면 오늘날 신앙인 개개인에게 직접 전달되고 있다고 합니다. 내적인 신앙의 불빛은 교회의 문헌학적인 권위에 가로막혀 마냥 은폐되고 차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신의 계시는 성서를 연구하는 학자라든가 신학자들에게가 아니라 오히려 평신도에게 더욱더 분명하게 전달될 수 있다고 합니다. “신의 말씀은 심장, 두뇌, 피부, 머리카락, , 골수, 즙액 그리고 힘과 에너지를 관통하고 있는데, 우리의 어리석은, 마치 고환주머니 같은 박사들과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잘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Müntzer: 47). 여기서 우리는 상류층 뿐 아니라, 체제옹호적인 신학자들에 대한 뮌처의 노여움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21. 사회의 죄악은 고위 수사 그리고 귀족과 제후들에 의해서 나타난 것이다.: 뮌처는 다른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가들과 마찬가지로 동시대인들이 끔찍한 죄악의 상태 속에 빠지게 된 근본적인 이유를 기존하는 사회 구조에서 찾고 있습니다. 사회의 근본적 죄악은 군주에 의해서 비롯된다고 뮌처는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군주들은 뮌처의 견해에 의하면 도둑, 강도 그리고 고리대금의 악덕주인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나아가 뮌처는 교회 사람들이 행하는 짓거리를 신랄하게 비난합니다. 교황은 뮌처에 의하면 주어진 현실에 관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부패한 체제의 총책임자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황은 로마의 요강 덩어리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수사와 주교들은 배운 것을 자랑하는 어리석은 당나귀들이라고 합니다. 뮌처는 사회의 고위 계층에 대한 비판에 있어서는 고전적 유토피아 사상가들과 입장을 같이 합니다. 고위 계층의 비리와 온갖 술수를 제거하면, 공화국과 유사한 신의 국가가 얼마든지 건립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대 비판은 요한 에벌린 폰 귄츠부르크 Johann Eberlin von Günzburg의 삐라, 볼파리아 Wolfaria에서 자세히 언급되고 있습니다. (Swoboda: 97). 에벌린은 서남부 독일의 비참한 현실 상황을 지적하고, 이를 카를 5세에게 보고하기 위해서 삐라를 작성하였습니다. 에벌린에 의하면 어떠한 인간도 수사에게서 어떤 충고를 듣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에벌린은 자신의 글로 인하여 1530년에 목숨을 내놓아야 했습니다. 에벌린의 유토피아에 관해서는 본서에서 나중에 언급될 것입니다.

 

22. 신의 의지와 토마스 뮌처 (1): 혹자는 뮌처가 바람직한 사회의 상이 구체적으로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관해서는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대답한 적은 없다고 비판합니다. (Schölderle: 64). 어쩌면 뮌처는 바람직한 사회상을 긍정적으로 설계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신은 이미 구원을 위한 어떤 계획을 마련하고 계신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세계의 거대한 파국이 도래하기 때문에 인위적인 조처를 취하지 않은 묵시록의 신봉자, 예수 그리스도의 입장을 그대로 추종한 것입니다. 뮌처는 무력 투쟁을 감행하는 순간에도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습니다. 즉 농부들의 혁명과 개혁을 위한 운동은 무엇보다도 정치적 사회적 목표를 위해서 이행되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주어진 현실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는 것은 인간의 몫이며, 이를 마련해준 분은 주님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뮌처는 새로운 변화의 시대가 이미 종말론적으로 예정되어 있으며, 차제에 신의 예정된 의지에 의해서 실현되리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23. 신의 의지와 토마스 뮌처 (2): 그렇다고 해서 뮌처가 처음부터 끝까지 신의 예정조화설을 맹신한 것은 아닙니다. 물론 거시적 차원에서 고찰할 때 시대는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어지겠지만, 뮌처는 당대에 인간 삶의 평등이 이루어질지 확신하지는 못했습니다. 게다가 뮌처는 신의 과업과 인간의 과업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사회정치적인 측면의 일밖에 없다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뮌처가 자신의 과업이 신의 뜻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고 믿지는 않았습니다. 뮌처는 신의 노예로서 신을 믿지 않는 사악한 인간과 싸우려고 했습니다. 마지막 전투에서 폭동을 일으킨 6000명의 농부들은 관군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24. 뮌처의 신앙과 천년왕국설의 실천: 뮌처가 기대했던 새로운 질서는 유토피아의 모델에 의해서 구성적으로 축조된 것이 아니라, 신앙과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토마스 뮌처는 중세의 시대에 수많은 이단 종파의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단 종파의 사람들은 상류층 사람들과 결탁하여 기득권을 누리는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가난한 자들과 정의로운 삶을 구현하려던 그리스도의 삶을 추종하였습니다. 이들의 종파는 권력자의 눈에는 체제 파괴적으로 비쳤습니다. 카타르 파, 보구빌 파, 발덴저 파 그리고 수많은 이름 없는 기독교 소수 종파의 우두머리들은 조아키노의 천년왕국설을 신봉하고 새로운 세상과 반드시 출현할 성령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습니다. 이를테면 고트프리트 아르놀트 (Gottfried Arnold, 1666 1714)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관청과 규약 그리고 교회의 제반 규정에 의해서 전해질 게 아니라, 오로지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원칙에 의해서 알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Arnold: 81). 그렇기에 뮌처는 루터보다도 더 훌륭하게 종교개혁을 이룩한 분이 아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에버트: 268). 그들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고, 자기들끼리 독자적으로 종파를 구성하여 살아가려고 했습니다. 이 자체가 로마 가톨릭 교회가 정한 규칙에 위배되는 것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토마스 뮌처는 중세의 조아키노의 천년왕국설의 사상을 실천에 옮기려고 하다가 기득권과의 마찰을 빚게 되어서 결국 몰락하게 된 셈입니다. 이후로 독일에서 약 300년에 걸쳐 사회적 혁명의 발발은커녕 자그마한 사회적 전복의 조짐조차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25. 재세례파와 토마스 뮌처의 농민 혁명에 대한 평가: 15세기 말부터 유럽의 가난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국가의 폭력 그리고 이에 간접적으로 지지하는 교회 체제에 굴복하면서 살았습니다. 이들은 뮌처를 중심으로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터전으로서의 상호부조의 사회를 건설하고 싶었습니다. 이러한 계획은 종교 혁명의 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결국은 재세례파와 뮌처의 농민 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고수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토대는 종교 개혁 및 사회 개혁의 움직임으로 발전되었던 것입니다. 이는 더 나은 삶을 구현하여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지상의 천국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발전되었습니다. 나중에 카를 카우츠키는 자신의 책에서 농민 혁명을 종교적 차원에 국한시키고 사회 혁명 운동과는 별개로 평가했습니다. 엄밀히 따지면 뮌처의 사상에서 정치성을 일탈시키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공유제의 이념을 사회주의 사상과 결합시키려고 하는 것도 문제일 것입니다. 어쨌든 독일 농민 혁명은 이데올로기로서의 토피아 Topie”를 개혁과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극제로서의 유토피아 Utopia”로 전환시킨 강력한 계기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