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신학이론

서로박: 뮌처가 실천한 천년왕국의 혁명 (3)

필자 (匹子) 2020. 6. 23. 11:50

 

13. 혁명의 신학: 뮌처는 계시록의 내용을 고찰하면서, 자신의 시대를 “신의 법정이 개최되기 시작하는 시간”으로 규정하였습니다. 인간에게 빵을 선사하는 밀은 잡초로부터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려고 이곳에 왔다” (마태오의 복음서 10장 34절)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뮌처에 의하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합니다. 뮌처는 귀족과 제후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마구간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편에 서 있다고 합니다. 화려한 외투를 걸치고 비단의 의자에 앉아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는 끔찍한 악한들이라는 것입니다. 기실 뮌처는 자신의 시대의 문제점을 분명하게 통찰하였습니다. 상기한 내용을 고려할 때 그의 사회 윤리학적인 관심사는 신비주의 신앙과의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태동한 것입니다. 뮌처는 신에 대한 외경의 마음을 고취시켰을 뿐 아니라, 신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그들을 위한 사회적 정의를 부르짖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주어진 현재에 자리하고 있는 모든 죄악을 용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14. 피의 보복자 내지 소송인으로서의 성령: 성령은 그 자체 “피의 보복자παράκλητος”로서 마지막의 날에 출현하는 분입니다. 그분은 조로아스터 교에서 말하는 “보후마노”로서 죄악을 척결하고, 세상을 선으로 가득 차에 만드는 성스러운 영혼입니다. 마르틴 루터는 -앞장에서 언급했듯이- “성령”을 “위안자 Tröster”로 번역함으로써, 원래 성령이 지니고 있는 복수 내지 보복의 의미를 완전히 희석시키고 말았습니다. 루터는 라틴어를 마치 모국어처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지만, 그리스어를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는 성서를 번역할 때, “72인의 그리스 성서Septuaginta”를 직접 원전으로 대한 게 아니라, 에라스뮈스의 그리스 성서의 주해서 그리고 당시에 전해 내려오던 “라틴어 번역서Vulgata”을 참고하였습니다. 1529년 루터는 학자들을 위하여 라틴어 성서의 수정판을 간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성령은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달래주는 존재가 아니라, 정의로움을 위하여 억울하게 고통당하고 핍박당하는 자들을 대신하여 복수를 감행하는 소송인입니다. 상기한 이유로 인하여 성령을 기다리는 마음은 가난한 사람들이 갈구하는 혁명의 기대감과 일맥상통하고 있습니다.

 

15. 프라하 선언: 상기한 내용이 맨 처음 담겨 있는 문헌은 뮌처의 「프라하선언」입니다. 이 글은 문헌학의 측면에서 고찰하면 네 개의 버전으로 나누어집니다. 첫 번째 문헌은 1512년에 집필된 것으로 가장 짧습니다. 두 번째 문헌은 11월 29일이라는 날짜가 기록되어 있으며, 사제 계급 외에도 제후 계급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습니다. 두 번째 문헌에는 “보헤미아의 과업과 결부된 저항”이라는 부제가 실려 있습니다. 세 번째 문헌은 문체상으로 가장 매끄럽게 기술된 것인데, 뮌처가 라틴어로 작성한 게 분명합니다. 그가 별도로 라틴어 문헌을 남긴 것은 무엇보다도 지식인 계층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네 번째 문헌은 체코어로 번역된 「프라하 선언」입니다. 「프라하 선언」은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에 관한 진정한 인식은 살아계시는 올바른 주님을 말씀을 듣고, 온갖 박해를 견뎌내는 자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오로지 이들만이 주님에 우리 속에 계신다는 것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 계신다는 말은 신비주의의 직관을 강조하는 자세와 관련되는데, 이는 신앙의 토대로 자리하는 주장입니다. (길희성: 47쪽 이하). 이른바 식자들은 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오로지 성서에서 훔친 단순한 문자”를 퍼뜨릴 뿐입니다.

 

16. 프라하 선언 (2): 주님은 성령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성을 열게 하였습니다. 성령이야 말로 우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장해준다고 합니다. 주님의 살아계시는 말씀을 들으려는 자는 자신이 애타게 간구하는 바를 하나님 앞에서 내밀하게 고백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그분은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전해주실 것입니다. 이에 반해 사제와 성직자들은 주님과의 직접적인 조우를 가로막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학을 통해서 우리가 성서의 속뜻을 들을 수 없도록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신은 절대로 개개인과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Franz: 7). 나아가 제후와 영주들은 이러한 사제들의 영향력은 은근히 방조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은 하나님의 진솔한 말씀을 그대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설교에는 경박한 허사만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진정한 믿음을 통해서 성령이 우리의 내면에 자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고 합니다. (Franz: 12ff.)

 

17. 루터의 변절과 그의 언어적 폭력: 루터는 기득권을 지닌 고위층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1521년 보름스 성당에서 고초를 겪은 뒤에, 성서 번역에 몰두하고, 세상사에 관여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루터가 보름스 성당에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하고, 권력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느낀 죽음에 대한 위기의식은 이후 그의 정치적 행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이후에 보여준 루터의 정치적 입장은 수구반동주의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가령 루터가 독일 농민 혁명 당시에 그냥 가만히 있지 않고, 농부들의 폭동을 천민들과 강도떼의 폭력적인 난동이라고 규정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세요. 말하자면 루터는 기득권 세력에 빌붙어서 체제 옹호적으로 처신한 셈입니다. 그의 짤막한 글, 「살인과 강도짓을 저지르는 농부들의 무리에 대항하여」를 읽으면, 우리는 그의 사고가 초기의 종교개혁의 정신으로부터 기회주의적으로 멀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약 그가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농민의 편에 섰더라면, 자신의 삶은 고달플 수 있었겠지만, 수천 명의 농부들이 그렇게 비참한 방식으로 몰살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밖에 루터는 수사로서의 계율을 깨뜨리고, 수녀인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여 자식 여섯을 낳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일기에다 “일주일에 두 번 성관계는 그미에게 그리고 나에게 나쁠 것 없다.”고 기록하였습니다. (Luther: 5). 그런데 문제는 루터가 오랫동안 반유대주의의 자세를 견지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에 대한 극렬한 증오심은 말년에 남긴 그의 문헌, 「유대인들과 그들의 거짓에 관하여 Von den Jüden und ihren Lügen 」(1543)에서 극에 달해 있습니다. 루터는 겉으로는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으나, 실제로는 교회 분파주의를 간접적으로 조장하였고, 유대인에 대한 인종 차별을 은근히 유도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사람입니다.

 

18. 농민 혁명과 실패: 이에 비하면 뮌처는 자신의 사상을 일관적으로 실천하였습니다. 1521년의 「프라하 성명서」 그리고 1524년 「제후들에 대한 설교」 등을 읽으면, 우리는 뮌처가 어떠한 상황에도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다는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특히 「프라하 성명서」에서 뮌처는 조만간 도래할 전환의 시대를 예견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처럼 격노하는 언어로써 최후의 심판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신의 사도로 생각하였습니다. 뮌처는 일단 뮐하우젠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고, 이곳에서 1523년에서 1525년까지 농민 혁명을 실천하였습니다. 특히 남부 독일의 농민들은 뮌스터의 재세례파 사람들과 합세하였습니다. 1524년 가을에 뮌처는 남부 독일을 여행하며, 「거짓된 신앙을 낱낱이 밝힘 Ausgetrückte Emplößung des falschen Glaubens」 그리고 루터의 입장에 반대하는 유명한 팸플릿 「분명한 원인을 지닌 수호의 연설」을 발표합니다. 1525년 2월부터 뮌처는 튀링겐 지역의 농민들을 집결시켜, 투쟁을 선언합니다. 1525년 5월 뮌처는 프랑켄하우젠에서 작센 공작과 필립이 이끄는 정규군과 싸우다가 체포됩니다. 고문당한 뒤에, 35세의 나이에 자신을 추종하던 친구이자, 동지인 하인리히 파이퍼 Heinrich Pfeiffer와 함께 뮌스터로 끌려가서, 장렬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집니다. 임신한 그의 아내는 겁탈당한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지속되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서 이름을 뮌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Bloch 1921: 122). 뮌처의 설교에 의하면 천국은 저세상이 아니라, 지상에 건설될 수 있다고 합니다.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지 않는 자는 스스로 자신의 삶을 시들게 할 것이며, 거대한 전복에 동참하는 자는 영원한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