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에게 건네는 말 Words to my friend
보세요, 나도 이제 처녀의 나약함, 경외하는
남자의 청혼을 받아들일 나이가 되었어요.
여행의 동반자를 아직은 선택하지 않았어요.
그 길의 모퉁이에서 당신이 나타났으므로.
붉은 언덕에서 히아신스가 피를 흘려요.
당신은 에로스와 나란히 걷는 꿈을 꾸었어요.
여자인 나, 아름다울 권리가 없는 나에게,
그들은 남자의 추醜가 되라는 선고를 내렸어요.
빛나는 순결로 자매의 사랑을 갈구한 나는
용서받지 못할 만큼 대담하고 노골적이었어요.
풀잎 하나 상하지 않게 조심스레 딛는 걸음,
저녁과 하나로 녹아드는 부드러운 목소리
그들은 내게 당신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금했어요.
당신의 머리카락은 치렁치렁하고 향기롭기에,
당신의 눈동자에는 낯선 열정이 담겨 있기에,
마치 성난 파도처럼 이리저리 일렁거려요.
그들은 노여움의 몸짓으로 내게 손가락질했어요.
내가 당신의 부드러운 눈길을 찾아 헤매었으므로...
남들이 지나치는 우리 모습 이해해주길 바라지 않아요.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오직 당신을 선택했으므로.
내가 어겨야 했던 사악한 법 규정을 생각하시고,
악과는 전혀 무관한 나의 사랑을 심판하세요.
그 남자의 연인을 나의 사랑으로 삼으려는
솔직하고 절실하며 치명적인 나의 욕망을.
.......................
르네 비비앙의 시와 산문은 스무 권 가량 되는데, 현존하는 레즈비안 문학 가운데 대부분 수작들로 손꼽힙니다. 르네 비비앙 (Renée Vivien, 1877 – 1909)은 영국 출신의 시인이지만, 이따금 프랑스어로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그미는 극단적 향락주의의 삶을 살아가다가 32세의 나이에 요절하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미가 생전에 가명으로 시를 발표했다는 사실입니다. 어쩌면 르네 비비앙은 커밍아웃의 행위를 몹시 꺼려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르네 비비앙은 부유한 아버지의 배려로 시간만 나면 파리로 여행하였으며,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 (Nathalie Clifford Barney, 1876 - 1972)를 사랑하게 됩니다. 나탈리가 다른 여성들과 애정관계를 맺었을 때 르네 비비앙은 절망에 사로잡힙니다. 나탈리에게는 구혼하는 남자들이 많았는데, 그미는 이러한 남자들과 육체적인 사랑을 즐겼던 것입니다. 나탈리는 동성연애자이며 양성연애자였습니다. 이때 르네 비비앙은 소설 『한 여인이 내게 나타났다』를 집필 발표함으로써 사랑의 갈망과 나탈리에 대한 질투 그리고 이별의 회한을 문학적으로 형상화시켰습니다.
. 나탈리 바니 역시 작가였고 시인이었으나, 작품보다는 삶의 행적이 세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회의 도덕에 개의치 않는 거침 없는 말과 행동, 강렬한 개성, 관습에 아랑곳하지 않는 도도한 태도, 명료한 생각,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 등으로 예술가들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한마디로 나탈리 바니는 시인들의 뮤즈, 레즈비언 가운데 최고 여사제, 불신자들의 전도사였습니다. 1920년대 나탈리의 집은 국제 동성애 지하단체들의 집결지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남자로서 레즈비언 문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우리는 다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과 갈망을 조금씩 접해나가는 게 일차적으로 중요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나"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려고 애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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