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외국시

서로박: 캄파넬라의 옥중 시선 (16)

필자 (匹子) 2015. 11. 11. 10:43

캄파넬라의 "시인들에게" 해설

 

캄파넬라는 어린 시절부터 종교적, 정치적 그리고 지적 현실 앞에서 현자로서 사고하고 행동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수사들, 정치가들 그리고 지식인들에게 나름대로 영향을 끼치려고 하였지, 오로지 시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위의 시에서 자신이 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신의 작품은 단테 Dante의 그것과 비견될 수는 있지만, 아리오스트 Ariost, 타소 Tasso 등의 그것과는 철저히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현대 시인들은 주어진 현실의 삶의 조건을 은폐시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권력, 지식 그리고 종교 등이 몰락한 것을 명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진선미를 왜곡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은 그들의 펜에 의해서 매끄러움, 교태, 가식적인 “치장 liscio”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더 이상 궁궐의 사치스러운 삶을 미화하는 대신에, 인민의 고통을 언어로 표현해야 하며, 모든 사물의 근원적인 부호를 사람들에게 전해주어야 합니다. 그렇기에 찬가의 특성과 비가의 특성을 일치시키는 것이야 말로 캄파넬라 시학의 핵심 사항일 것입니다. 시작품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그냥 표현하는 게 아니라, 사물의 본질까지 파고들어서 사물의 근본적 진리를 파헤쳐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캄파네라가 대학의 고차원적인 시 이론을 개진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포에지가 지향하는 바를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시인은 “악덕에/ 대항하여” 인민을 “무장”하도록 노력하는 자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그는 과거의 작가들처럼 “지식”, “기도” 그리고 “법의 설정”과 관여하는 시인이 되기를 원합니다.

 

캄파넬라가 추종하는 작가는 호메로스 내지 베르길리우스가 아니라, 모세, 엠페도클레스 그리고 루크레티우스입니다. 그는 다윗과 단테를 생각합니다. 그는 단테처럼 철학, 정치학 그리고 예언으로서의 시예술을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인위적이고 인공적인 작품보다는 차라리, “자연의 작품”을 고찰하려고 합니다. 대신에 캄파넬라는 최신 문학 작품들을 경멸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주어진 세계에 대한 감각적이고 직접적인 세계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최신 작품들에는 세기말적인 분위기 내지 필연적으로 대두되어야 하는 급진적 개혁이 조금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 작가들은 이를테면 콜럼버스와 같은 신대륙의 개척자 내지 영웅들을 칭송하는 대신에 지어낸 이야기, 즉 우화만 나열하고 있습니다.

 

라틴어권의 시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에 반대하면서 강력한 현실적 파토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어진 현실에게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가상적인 우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quando eventus mirabiles habemus, fabulis haud indigemus.” (Campanella Poetica latina c.VIII, art,I, Bolzoni P. 5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적 우화가 포에지의 본령에 해당한다고 누군가 주장한다면, 루크레티우스, 엠페도클레스, 파르메니데스는 이러한 논리에 의하면 시인들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가상적 우화는 다만 비상사태의 경우에만 정당화될 수 있습니다. 포에지는 캄파넬라에 의하면 계몽적 도덕적 과업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포에지라고 해서 단순한 도덕주의에 차단되어서는 안 되겠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쾌락에 기여하기 때문이지요, 포에지의 형식은 노래로써, 다시 말해서 운율을 지니고 있지, 말하고 설득하는 문장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작품은 우리에게 우주의 리듬과 자기의식을 마법 그리고 우주의 리듬을 들려주기 때문이지요. 포에지는 영감을 통해서 출현하지, 사고의 완성 예언의 결과로 태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기에 포에지는 미덕만을 노래하는 게 아니라, 자연을 노래하고 “놀라운 역사적 사건 eventus mirabiles”을 노래하곤 합니다. 또한 “미래에 출현할 비밀스러운 사고” 뿐 아니라, “신의 위대함”을 아울러 표현해냅니다.

 

캄파넬라는 가상적 우화를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습니다. 어떤 특별한 조건 하에서는 가상적 우화 역시 얼마든지 훌륭한 포에지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을 부분적으로 부정하면서 자신의 고유한 시학 이론을 개진합니다. 그것은 포에지의 엄격한 철학적 개념을 확립하는 일과 관련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이론은 모든 의고전주의의 철학을 낳게 했는데, 이후에는 무조건적으로 인정될 수 없다고 합니다. 새로운 시학 이론은 한편으로는 현대의 현실을 충분히 반영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텔레시오가 추구한 바 있는 자연의 빛과 색채를 도입해야 하며, 새로운 의미의 기독교의 의미를 수렴해야 한다고 합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캄파넬라는 시인 타소의 경우처럼 아름다운 어휘 생산에 이의를 제기하면서, 사물의 언어를 더욱더 집요하게 추적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인의 언어와 어휘는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마치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과도 같은 무엇입니다. 시인은 새로운 어휘에 매달릴 게 아니라, 캄파넬라에 의하면 사물의 본질을 담은 사고에 충실해야 합니다. 시인은 다른 철학을 탐구해야 하며, 윤리학과 역사를 더욱더 심도 있게 탐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진정한 시인은 독자의 귀를 위해서 가장 위대하고 예언적인 사물에 관하여 발언해야 하며, 이를 형상화해야 한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