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음악 이야기

볼프 비어만 u. 카를 미켈

필자 (匹子) 2019. 5. 24. 10:13

 

 

 

 

 

 

동독 문학에서 가장 저항적인 시인을 꼽으라면 나는 폴커 브라운 (Volker Braun) 외에도 비어만을 꼽고 싶습니다. 그는 시대의 풍운아처럼 살아왔습니다. 비어만이야 말로 "자청해서 고통을 감내하는 Heiterkeit ins Leiden" (횔덜린) 시인의 전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치 하인리히 하이네가 1831년을 기점으로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아갔듯이, 그 역시 분단의 동서독에서 통일이 될 때까지 동독 그리고 서독에서 살았습니다. 사진은 1977년 쾰른 금속 노조의 초청시에 찍은 사진으로서, 가장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항구도시 함부르크의 정경입니다. 부산도 이와 비슷합니다. 볼프 비어만은 1936년 11월에 다고베르트 비어만과 에바 비어만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그의 아버지는 유대인으로서 부두의 노동자였는데, 데모하다가, 잡혀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며, 기타와 저항 운동을 배웠습니다.

 

 

 

 

 

 

 

함부르크는 일곱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엘베강이 가운데 흐르고 있습니다. 함부르크는 매우 자유로운 도시입니다. 여기에는 공창가 (사창가의 반대말)도 있습니다. 독일에서는 매춘이 합법화되어 있으며, 누구든 상파울리 지역에서 하나의 매춘 사업을 운영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 정부의 지원을 받게 됩니다. 매춘 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은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습니다. 남창 사업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습니다. 남창 = der Call-Boy, der Kavalier

 

 

 

 

 

 

 

흔히 햄버그의 어원이 함부르크에서 유래한다고 하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타당합니다. 왜냐하면 햄버그의 어원은 두 가지 설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햄버그의 "햄"은 쇠고기 뒷다리 살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로 미국은 함부르크 쇠고기를 수입하여 부엌에서 "잘게 썰은 고기 Hackfleisch"로 햄버거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사진을 들여다보면, 야채가 많이 보이지 않습니다. ㅠㅠ

 

 

 

 

 

1955년 볼프 비어만은 서독에서 동독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의 나이 19세에 독립을 시도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구동독의 훔볼트 대학교에서 수학과 철학을 공부하였습니다. 사진은 훔볼트 대학교 정문을 보여줍니다. 훔볼트 대학교는 베를린 한 복판에 위치하고, 베를린 자유대학교는 베를린 남서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1960년 그는 음악가, 한스 아이슬러를 사귀게 됩니다.  아이슬러를 통해서 음악에 관한 많은 것을 직접 배웠습니다.

 

 

 

 

 

비어만은 노래하는 음유시인입니다. 사실 시와 음악의 뿌리는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노래하는 음유시인이었습니다. 그가 노래하면 산천초목이 감동하여 어쩔줄 모른다고 합니다. 그는 사랑하는 에우리디케를 구출하기 위해서 지하의 하데스로 향합니다. 그미를 구출하여 밖으로 나왔을 때 에우리디케는 뒤돌아보지 말라는 말을 어기고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돌로 변하고 맙니다. ㅠㅠ 참고로 비어만의 시집 가운데에는 "철조망 하프 Drahtharfe"가 있습니다. 그만큼 자신의 시와 음악은 정치적 측면을 담고 있다는 이유로 그는 그런 식으로 시집 제목을 정했습니다.

 

Bildergebnis für dutschke biermann

 

비어만은 신념을 지닌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는 동독에 있을 때나 서독에 있을 때나 불의와 억압에 대해서 그리고 관료주의의 농간에 대해 처절할 정도로 비판하였습니다. 비어만은 50년대에 구동독으로 이주하여, 체제비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1962년에 당국은 비어만에게 출연금지 처분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젊은이들 사이에 불법 카세트로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다음의 노래는 구동독에서 오랫동안 가택 연급 상태에 처해 있던 그의 친구 페터 후헬읗 위한 노래입니다. 체제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누구든 간에 교회에서 그리고 감옥에서 이 노래를 부르면서 저항의 자세를 견지하곤 하였습니다.

 

Die Ermutigung 다음을 클릭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4분 39초)

https://www.youtube.com/watch?v=lqkRZCEf6P8

 

 

 

 

 

 

 

70년대 어느 날 미국의 시인 알란 긴스버그가 동베를린을 찾았습니다. 이때 비어만은 독수리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이 바로 자신의 명시 "프로이센의 이카로스에 관한 발라드 Ballade vom preussischen Ikarus"를 집필하도록 자극했습니다. 이 시에서 비어만은 자신을 이카로스에 비유하며, 과거에 이카로스가 갇혀 있던 미로의 나라를 동독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 작품은 1977년 1월 쾰른 금속노조 초청으로 서독게 갔을 때 처음으로 노래하였습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음악을 들을 수 있습니다. (4분 38초

 

https://www.youtube.com/watch?v=lFoXuxdSGJQ

 

 

 

 

 

 

 

사진은 동베를린의 운터덴 린덴 가의 모습입니다. 비어만은 이곳에서 살아가는 구동독의 젊은이들에게 음악으로써 진리를 설파하고, 저항 정신을 부추겼습니다. 젊은이들은 비어만의 자세를 무척 존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비어만처럼 확고한 공산주의자는 구동독에 드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어만이 비판하는 SED 관료주의자들의 횡포를 몹시 싫어하고 있었습니다. 1963년 비어만은 프랑크푸르트의 볼프강 노이스가 운영하는 카바레의 초청를 받고 서독으로 건너간 적이 있었습니다. 귀국 후에 비어만은 당국으로부터 공연 금지처분을 받았습니다. 비어만은 어떠한 무대에도 오를 수 없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카세트 테이프를 녹음하여 음성적으로 그의 시와 노래를 청취하였습니다.  1977년 12월 비어만은 서독 쾰른의 IG 금속노조의 초청를 받고 서독으로 떠났습니다. 

 

 

 

 

 

 

 

동독 정부는 이번 기회를 활용하려고 하였습니다. "눈위의 가시 ein Dorn im Auge"인 체제파괴적인 음유시인을 아예 추방하여, 입국하게 하지 말자는 게 어떤가? 하고 궁리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어만은 구동독에서 추방되었습니다. 12명의 구동독의 작가들은 당국에 공개적 서한을 보내어 추방령 철회를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 1977년부터 비어만은 국적없는 사람으로 서독에 남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비어만이 서독에서 돈과 명성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왠만한 사람 같으면, 편안한 삶에 안주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비어만은 끝없이 구동독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친구들이 있고, 비록 비민주적이기는 하지만, 돈 냄새나는 서독 보다는 더 살기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이러한 비어만의 자세에서 예술가의 전형을 읽습니다. 예술가는 돈과 타협하는 인간군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위의 사진은 비어만의 공연을 소개하는 플라카드입니다.  비어만은 하노버에거 공연한다는 플라카드입니다. 사람들은 불편한 시인 비어만으로부터 음악을 청취하려고 하였습니다. 비어만은 노래만 부르며 살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글을 써서 독일 비평의 영역을 한 단계 오르도록 자극하였으며, 시학 강연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비어만은 오로지 자신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시를 쓰고 노래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시민들은 그가 돈읗 벌기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다고 지레짐작합니다. 이는 제사보다 잿밥에 더 큰 관심을 지니는 소시민들의 정형적인 악습입니다. 당신이 시인이라면, 이 말에 참담함을 금치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 시를 쓰는 시인은 세상에 거의 드물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비어만은 1977년 함부르크 축제에 아들을 데리고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1975년 여의사 크리스티네 바르크와 결혼하여 3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1980년대에 그는 크리스티네와 이혼하고 파멜라 뤼셰라는 여인과 재혼하여 세 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서독으로 건너와서 무려 여섯 명의 자식을 출산하게 하였으니, 대단한 정력가임에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동독에서의 사생활은 어떠했을까요?

 

 

 

 

빅토르 하라는 칠레의 음유시인이었습니다. 어째서 칠레의 매스컴은 빅토르 하라에게 등을 돌렸는가요? 그 이유는 피노체트 정부의 탄압 때문에 언론이 제 구실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해 서독의 매스컴은 비어만에게 우호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문제는 일부 정치인 (보수주의자들)이 그를 정치에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보라, 동독이 얼마나 살기 힘든 나라인지 하고 말입니다. 이에 비하면 서독은 살기 편하지 않는가? 서독이 살기 편한 까닭은 정치가들이 정치를 잘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Wandbild zum Gedenken an Víctor Jara im Barrio Brasil  in Santiago de Chile

 

 

칠레의 시인이자 가수인 빅토르 하라는 독재자 피노체트의 폭력에 맞섭니다. 1973년 9월 12일 군부정권은 산티아고에서 시인을 체포합니다. 빅토르 하라는 고문당합니다. 고문 담당관은 더 이상 기타를 치지 못하도록 시인의 오른손에 개머리판을 내려쳐서, 완전히 뭉개버립니다.

한 달 후에 빅토르 하라는 고문실에서 풀려납니다. 그는 붕대 감긴 오른손에다 플라스틱 피크를 끼워서 기타를 연습하였습니다. 심하게 다쳐, 트레몰로 기법으로 기타를 연주할 수는 없었지만, 음악 반주는 가능했던 것입니다. 1973년 말에 그는 빅토르 하라는 산티아고의 공설 운동장에서 “빈세레모스 (Venceremos: 우리는 승리하리라)” 노래하였습니다. 이때 “백골을 뒤집어쓴 개들 (전투경찰대원들)”은 운집한 사람들에게 매질을 가했습니다. 이 와중에서 빅토르 하라의 기타는 짓밟히고, 시인의 머리통이 깨어졌습니다. 피가 하늘 위로 솟구쳤습니다. 그때 누군가 음유시인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빅토르 하라는 총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집니다.

 

다음을 클릭하면 빅토르 하라의 노래, 카밀로 토레스를 들을 수 있습니다. (3분 12초)

https://www.youtube.com/watch?v=_rllf7Df10o

 

 

 

 

 

 

 

동독 시절에 비어만은 결혼한 바 없습니다. 그렇다고 여성과 살림을 차리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비어만은 구동독에서 총 세 명의 자식을 낳게 했습니다. 결혼은 인간과 인간의 법적인 결합과 구속이므로, 예술가 비어만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사진 속의 여성은 가수 니나 하겐의 모습입니다. 볼프 비어만은 니나 하겐의 어머니, 에바 마리아 하겐과 7년간 동거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은 없었습니다.

 

   

 

 

 

 

 

사진은 루디 두츠케 Rudi Dutschke, 1940 - 1979)와 그의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두츠케는 1968년 학생 운동 당시에 "베를린을 하나의 코뮌 도시로 만들자."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때 그는 어느 국수주의 청년의 총에 맞아 의식을 잃습니다. 한 발의 총탄은 그의 뇌를 관통하였습니다. 깨어났을 때 언어능력을 상실하여, 독일어를 처음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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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어만은 "루디 두츠케에 향한 세 발의 총알"이라는 시를 써서, 구서독의 수구보수주의자 (이를테면 한국의 일베 조직)를 비판하였습니다. 루디 두츠케는 아들의 이름을 "호세아-체"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성서의 예언자의 이름인데, "구원하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체"는 비련의 혁명가 체 게바라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두츠케는 결국 부상 후유증을 앓다가 1979년 유명을 달리하고 맙니다. 비어만은 그를 "마지막 공산주의자 이카루스"라고 명명하면서, 자신을 "아들을 잃은 슬픈 다이달로스"라고 명명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카를 미켈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미켈의 삶의 행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생전에 많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의 작품이 형편없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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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드레스덴의 폭격 사건 이후의 장면이다. 게르니카의 참상과 다를 바 없다. 파블로 피카소는 게르니카라는 그림을 통해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게 동독을 살해하는가?를 예술적으로 형상화시켰다.

 

카를 미켈은 1935812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는 단순 노동자들이었습니다. 드레스덴에서 1949년까지 학교를 다녔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그는 어머니와 함께 드레스덴의 폭격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모든 건물이 산산히 파괴되는 장면은 어린 아이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미켈은 1949년부터 1953년까지 드레스덴의 김나지움을 다녔습니다.

 

 

 

드레스덴의 프라우엔 교회. 주관적인 견해이지만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교회라고 생각된다. 정사각형으로 건축된 게 특징적이다.

 

학교를 마친 다음에 그는 베를린에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그의 전공은 경제사 그리고 국민경제였습니다. 그의 은사는 위르겐 쿠친스키였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다음부터 미켈은 주로 출판업에 종사하였습니다. 1958년에 잡지 경제의 편집을 맡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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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카를 미켈의 전집입니다. 현재 일곱 권이 간행되었습니다.

 

1959년부터 1963년까지 젊은 예술 Junge Kunst라는 잡지의 편집자로 활동했습니다. 뒤이어 베를린 대학의 경제학과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에른스트 부쉬 연극 대학에서 강의하였습니다.

 

 

 

 

카를 미켈 교수의 묘비. 서로박 샘: "시인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대부분 사람들은 당대에 행복하게 살고 죽은 뒤에 망각되기를 바란다. 이 사실이 바로 우리가 시인을 존경해야 하는 이유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