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문학 이야기

실러와 그의 시대

필자 (匹子) 2023. 1. 19. 09:56

수많은 돌들 Viele Steine

피곤한 다리 Müde Beine

전망은 없고 Aussicht keine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1824)

 

인용시구는 마치 오늘날 삼포세대의 젊은이의 삶을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19세기 중엽에 하인리히 하이네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의 등반이라는 것입니다.  참담한 시대에 시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높은 산을 오르는 고행과 같았습니다. 시인으로 살아가는 분이라면 이 구절을 충분히 이해하실 것입니다. 가난과 고독을 자청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 그들은 그야말로 "자기 집 속의 이방인"과도 같습니다.

 

 

 

 

괴테와 쌍벽을 이루는 독일의 문호, 실러 (1759 - 1805). 실러의 면모는 인상학 Physiognomie의 관점으로 고찰할 때 강한 의지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높은 코는 거룩한 이상을 보여주며, 그의 눈빛은 영특한 독수리 한 마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평생 추상적으로 자유의 이상을 추구하였습니다.

 

 

 

 

사진은 마르바흐에 위치한 실러의 생가입니다. 그다지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난하게 산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러는 괴테와는 달리 귀족이 아니라, 평민 출신이었습니다. 나중에 귀족 칭호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의 아버지, 요한 카스파르 실러는 군의관으로 일했는데, 자신의 외아들이 법학을 공부하여 출세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슬하에 딸 다섯, 아들 하나를 두었습니다.

 

 

 

 

사진은 1800년 전후의 독일의 영토를 보여줍니다. 당시 독일은 수많은 공국으로 분할되어 있었습니다.철학자, 피히테 Fichte가 "독일 국민에게 고함"이라는 연설을 통하여 조국의 통일을 주창했습니다. 이러한 사고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당시의 독일의 분할된 영토, 찢어지는 듯한 가난, 제후들의 폭정 등을 일차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실러는 카를 오이겐이 지배하는 공국에서 살았는데, 소공국의 독재자의 횡포는 그야말로 극에 달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은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솔리투드 성입니다. 이곳은 당시에 카를 오이겐 공이 직접 만든 군사학교로 활용되었습니다. 실러는 1775년에 아버지의 뜻대로 군사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곳은 엄격한 훈육과 질서를 중시하는 사관학교였는데, 실러는 무엇보다도 구속을 싫어하였습니다. 딱딱한 법학 교육은 자신의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일단 법학 대신에 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의학 역시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습니다. 영리한 그는 좋은 성적을 취득했지만, 그의 관심사는 문학, 역사 철학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숨어서 볼테르, 플루타르코스, 셰익스피어 그리고 괴테의 작품들을 탐독하였습니다.

 

 

 

 

 

 

실러는 1782년 9월 23일에 "도둑떼들 Die Räuber"을 발표한 다음에 슈투트가르트로 도주하였습니다. 그날밤에는 공교롭게도 축제가 열렸고, 어수선한 틈을 타서 국경을 넘었던 것입니다. 도주의 이유는 카를 오이겐 공이 다스리는 공국에서는 도저히 자유롭게 살아가며, 작품 집필에 몰두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뒤이어 실러를 체포하라는 수배령이 내려졌습니다.

 1783년부터 1789년까지 실러는 경제적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만하임의 전속 극장 대표는 그에게 약간의 원고료를 지불했을 뿐입니다. 1789년 예나에서 교수직을 얻었을 때 그는 비로소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해에 루이제 렝게펠트라는 여인과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실러의 작품 "군도"는 도둑떼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릅니다. 주인공 카를 모어는 고결하고 강직한 사내로서 자신의 명예를 훼손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는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 도둑이 됩니다. 임꺽정과 같은 의적이 된 것이지요. 그의 동생 프란츠는 악의 화신입니다. 카를 모어는 동생의 계략에 말려들어서 자신의 노력이 다만 강도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결국 모든 것을 제 자리로 돌려 놓기 위해서 카를 모어는 자신을 희생시키고 맙니다. 과장된 대사, 주인공의 격정 등은 작품의 하자로 지적될 수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실러의 작품을 관람하면서, 폭정의 끔찍함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실러는 괴테와 함께 질품과 노도Sturm und Drang의 대표적 작가가 됩니다.

 

Bildergebnis für Kabale und Liebe

 

사진은 실러의 연극 작품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실러는 여기서 계층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왕자 페르디난트는 음악가, 밀러의 딸인 루이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인 제후 발터는 아들을 귀족의 딸 밀포드와 결혼시키려고 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집안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질 것 같았습니다. 이로써 페르디닌트의 사랑은 권력자의 간계에 의해서 처참하게 난자당합니다.나중에 알게 되지만, 밀포드는 제후가 잠시 데리고 놀던 음탕한 여자였습니다. 제후 발터는 아들과 밀포드의 결혼을 성사시키기 위해서 간계를 꾸밉니다. 그는 루이제를 사로잡아서 궁정장인 칼프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도록 강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미의 부모를 죽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권력에 철저히 이용당한 그미는 나중에 고통 속에서 번민하다가 독약을 마십니다. 페르디난트 역시 루이제의 죽음 앞에서 목숨을 끊습니다간계와 사랑은 시민 비극의 전통을 잇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가령 레싱의 "에밀리아 갈로티" -> 실러의 "간계와 사랑" -> 헵벨의 "마리아 막달레나"로 계승되는 시민 비극의 전개과정을 생각해 보세요. 

 

 

 

 

실러는 1789년부터 서서히 고전주의의 경향의 작품을 집필하기 시작합니다. 사진은 바이마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이마르는 구동독 지역에 있는 소도시입니다. 1791년 실러에게는 또 다른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폐결핵 Tuberkulose"이라는 질병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병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실러는 극심한 기침식욕부진 그리고 불면증에 시달리면서, 서정시, 극작품 역사 연구 그리고 미학 이론 등에 몰두하였습니다.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은 몸을 사리지 않고 작품 집필과 학문 연구에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1794년 괴테는 자신과 유사한 위대한 작가를 알아보고, 몇 년 후에 실러를 바이마르에 초대하였습니다.

 

 

실러의 극 작품:

 

 

 

Sturm und Drang
1765 - 1785
도둑떼들 (1781) -> 피아스코의 반란 (1783) ->  간계와 사랑 Kabale und Liebe (1784) ->
바이마르 고전주의
1786 - 1805
돈 카를로스 (1787) -> 발렌슈타인 (3부작) (1799) -> 마리아 스투아르트 (1800) -> 오를레앙의 처녀 (1801) -> 메시나의 신부 (1803) -> 빌헬름 텔 (1803/ 04) -> 데메트리우스 (미완성) (1805)

 

 

 

위의 도표를 보면 실러가 병마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는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실러는 거의 1년에 대작 한 편씩 완성했습니다. 그렇기에 괴테의 문학이 본능적으로 유유자적하게 집필에 몰두하는 천재성을 지니고 있다면, 실러의 문학은 근면함으로써 주어진 여건을 개척해나가는 불굴의 노력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실러는 나중에 귀족의 칭호를 얻음으로써 평민 신분을 떨치게 됩니다.

 

 

 

 

프리드리히 실러는 실제로 과연 후회 없는 삶을  살았을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는 추상적 자유만을 부르짖었지만, 당대에서 봉건적 제후의 권력 체제에 대해서 실제로 어떠한 저항도 감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젊은 작가 내지 시인을 전혀 발굴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까닭에 독일 고전주의 작가는 괴테, 실러 두 사람밖에 없습니다. 괴테는 젊은 작가들, 낭만주의 작가들에 대해 어떠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실러는 유능한 젊은 작가들을 인지하였지만, 의도적으로 젊은 작가들을 외면하였습니다. 이를테면 그는 문학적 지지를 요청하는 횔덜린의 작품을 읽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나, 횔덜린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한편으로는 횔덜린의 위대성을 간파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예술적 차원의 질투심 때문에 일부러 횔덜린을 외면했던 것입니다. 사진은 당대에 망각의 현실 속에서 고결하게 미친 채 살아갔던 위대한 시인 횔덜린의 모습입니다. 어느 화가는 1840년대 초반에 그의 모습을 연필로 그렸습니다.

 

 

 

 

위의 사진은 실러가 바이마르에 거주했던 건물입니다. 하나님은 한 천재에게 모든 능력을 부여하여 불사의 명작을 완성하게 하였습니다. 대신에 그 천재는 일상의 행복을 포기하며 병마와 싸워야 했습니다. 삶은 실러에게는 지옥 같은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우리가 실러의 극작품을 대할 수 있는 것은 참으로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2013년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의 연극 축제에서 공연된 "돈 카를로스"의 한 장면입니다. 에스파냐의 황태자 돈 카를로스는 사랑하는 임과 헤어져야 합니다. 아비저 필립 왕이 애인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았기 때문입니다. 돈 카를로스는 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현실 감각을 거의 상실하고, 어려 가지 사건에 휘말립니다. 사진은 돈 카를로스와 엘리자베스 사이의 안타까운 관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이제는 당신과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없군요." - "이제 사랑하는 마음을 잊으세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의 연인이 될 수 없답니다. 나라를 지켜야 하므로..."

 

Bildergebnis für Don Carlos Schiller

 

사랑

프리드리히 실러

 

그대를 찾아오지, 사랑은

조용히 해, 말문 닫지는 말고

나의 사랑을 믿어 줘

절대로 내게 등을 보이지 마

난 그대를 볼 수 있어.

 

그대를 찾아오지, 사랑은

조용히 해, 말문 닫지는 말고

나의 사랑을 믿어 줘

제발 나를 향해 돌아서 봐

난 그대를 볼 수 있어.

 

그건 사랑이야, 사랑이야, 그건 사랑이야.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Die Liebe

Friedrich Schiller

 

Begegnet dir die Liebe

Sei leise, still, nicht stumm

Vertraue meiner Liebe

Und dreh dich niemals um

Ich kann dich seh´n..

 

Begegnet dir die Liebe

Sei leise, still, nicht stumm

Vertraue meiner Liebe

Und dreh dich endlich um

Ich kann dich seh´n...

 

Es ist die Liebe, es ist die Liebe, es ist die Liebe

Die uns leben läß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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